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휴대전화가 반복적으로 진동음을 냈다. 그간 연락이 뜸하던 대학선배한테 온 전화였다. 그가 시도 때도 없이 전화 해대서 귀찮을 때도 있다. 하지만 한 달 넘게 전화가 없으면 괜히 걱정되고 기다려졌다.
- 응, 형.
나는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 거 있잖아. 이 대표가 잘 쓰는 감성 카피. 그런 거 하나 써라.
내가 받자마자 상대방 목소리 확인이나 안부 인사도 없이 불쑥 용건을 꺼내는 버릇은 여전하다.
- 갑자기 전화해서 무슨?
그가 맥락이 없이 던진 말이어도 짐작이 갔다. 그는 일찌감치 법복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아버지가 대표로 있는 법무법인에 몸 담았다. 그리고 이슈가 될만한 굵직굵직한사건을 맡으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그것이 여의도를 향한 포석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 유권자들의 표심을 요지부동 사로잡을 수 있는 그런 카피 말이다.
선배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사뭇 호기로웠다.
- 계약서에 사인부터 해야죠.
부서에서 올라온 기획안을 살펴보고 있던 나도 그간의 전후 사정에 대한 질문이나 축하 인사를 생략했다.
드디어 공천을 받게 되었군요, 축하드립니다,라는 말이 입에서 맴돌았지만 나는 벌써 머리로는 부장 시절 기획했던 정치광고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행정통으로 여러 정권에서 업적을 인정받은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하지만 정치 쪽에선 초년생이었다. 그런 그가 우리의 도움을 받아 여의도 입성에 성공했다. 그가 우리를 믿고 끝까지 따라준 덕택이었다. 이제 그는간간히 뉴스에 오르내리는 거물정치인이 됐다.
상명하복에 길들여진 유약한 그의 이미지를 벗겨버리고 절제력과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정치인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당시 나는 그의 의상과 메이크업까지 전문가를 붙여 관리했다.
- 사무적이기는. 내가 이 대표 말고 누구한테 이 중차대한 일을 맡기겠냐. 내 맘 같으면 이 대표를 참모로 모셔오고 싶은데.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내가 낙마한다 해도 우리 회사 사무장하면 되고, 성공하면 내 보좌관 몇 해 하다가 내 지역구 물려받으면 좋잖아.
- 형 지역구! 형은?
나는 마음에도 없이 맞장구를 쳤다.
- 나는 청사로 가야지.
그는 법무부 장관이라는 오랜 꿈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의 아버지가 못 이룬 꿈이 그에게 전이된 것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꿈은 자력으로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 우연이 쌓이면 필연이 된다.
나는 그가 늘 하는 말을 되뇌었다. 그가 여의도를 고집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꿈에 가까이 다가가서 가능성을 높여보려는 것이었다.
- 어때? 같이 갈래. 기회가 늘 오는 건 아니다. 특히 이 대표처럼 비빌 언덕이 없는 사람은 머리 좋아도 출세하기 힘들어. 결심만 하면 내가 이 대표 언덕이 돼줄게.
그는 선심 쓰듯 웃음을 흘렸다.
- 아이구 말씀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대신 계약서에 서명하면 여의도로 가는 대교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 서명한다니까.
- 알겠습니다. 며칠 있다 계약서 들고 사무실로 갈게요. 아니면 선배가 한 번 오든지?
사실은 오후에라도 직원을 보내 사인을 받아 올 마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계약을 놓칠까 봐 조급해하는 기색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 그건 그렇고 점심이나 먹을까! 그게 좋겠다. 해원으로 와.
- 그러죠. 그럼.
나는 벽시계를 보면서 광고주에 대한 예의로 흔쾌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아예 서명을 받아올 작정으로 광고 의뢰 계약서를 열고 출력을 눌렀다.
나는그를 잘 안다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광고를 만들려고 하니까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광고는 상품의 속성이나 정체성을 파악하는 게 중요한데 말이다.
상품을 알려면 가까이 두고 사용해 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 일환으로 나는 선배와 자주 통화하고 술도 함께 마셨다. 선거 캠프에 들러참모들과 회의하는 모습을여러 차례 참관하며 그의 말투와 표정 그리고 몸짓에서 영감을 얻으려 애썼다.하지만 소비자에게 감동을 주거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만한 뭔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자칭타칭 중도주의자인데 그가 선택한 진영은 색깔이 분명했던 탓에 더욱 정체성을 찾기가 난감했다.
법복을 입고 있을 때 그는 좌우를 가리지 않는 정의로운 소신 판결로 종종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막상 정치판에 뛰어들자 그것은 오히려 단점이 되었다.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입히는 것이 광고다. 나는 그가 속한 진영에 맞는 색깔을 입히려고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와 잦은 충돌이 있었다.
그는 법조인으로서의 소신과 정치인으로서의 소신을동일시했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다른 것이고 달라야 하며 선명한 색깔을 하지 않으면 표심을 얻을 수 없다고 맞섰다.
작은 충돌이 반복되던 그와 나의 관계는 결국 파국 직전까지 갔다. 그는 나를 멍청한 고집불통으로 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여의도로 진출하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지역구에서 어정쩡한 색깔 옷을 입고 성공한 예가 거의 없었던 탓이었다.
결국 나는 광고에서 손을 떼겠다고 그에게 통보했다. 대신광고 총괄 책임자로 그가 마음에 두고 있던 부장을 추천했다. 그는 망설임도 받아들였다.
광고의 방향은 그가 주도하는 대로 두 가지 색깔이 뒤섞여 갔다. 그러다 보니 안보에서는 빨강 경제에서는 파랑 외교에서는 중도 이런 식이었다. 그는 법관 시절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색깔보다 평균적 정의, 보편적 정의를 외쳤다. 하지만 색깔이 분명하던 진영의 유권자들마저 혼란스러워하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 상대 진영에서는 그를 회색주의자, 기회주의자, 보신주의자로 공격했다.
여론이 악화되었다. 그리고 이를 반영하듯 여론 조사 결과는 참혹했다.그가 속한 진영으로부터 사퇴 압박이 나올 정도였다.
선배의 아내가 사무실로 나를 찾아온 건 그즈음이었다. 결혼식에서 면사포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처음 보는 셈이었다. 그땐 짙은 화장을 한 데다 그나마 멀리서 잠깐 본 것이 전부여서 그의 아내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몰라본 데 대해 그녀에게 사과하고 나서야 나를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 초등학생이 봐도 줏대 없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으로 보일 텐데, 오빠 자신만 모르는 거라고요. 오빠 딴에는 매사에 정의롭게 처신한다고 하는 꼴이랍니다. 법관이고 변호사일 땐 그게 맞을 수 있죠. 한 가지 사건만 다루면 되고 개별적인 정의면 충족되니까. 그러나 정치는 다르잖아요. 자기가 어느 진영에 속해 있는지, 진영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원하는 정의가 무엇인지조차 몰라요. 오빠가 그렇게 바보천치인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거침없는 언변으로 선배의 정치적 지향점을 바로잡고 이를 유권자들에 널리 알려달라며 단호한 시선으로 나를 줄곧 바라봤다. 마치 내 앞에서 선배를 꾸짖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데 나는 그녀를 처음 맞닥트린 순간부터 열릴 듯 말 듯 흔들리는 기억의 문에 신경이 쓰여 전체적인 맥락만 파악할 뿐 세세한 말은 건성으로 들어 넘기고 있었다. 옅은 화장기 속 그녀의 얼굴이 그렇게 낯익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짧은 시간에 많은 말을 했지만 요지는 선배의 색깔을 분명히 하고 그리고 그의 상남자 이미지도 이지적으로 바꾸는 방향으로 컨셉을 확고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벌써 유세기간의 중반을 넘긴 데다 그동안 만들어 놓은 색깔 없는 색깔이 이미 유권자들 마음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어려울 거라고 했다.
- 이 대표님이 다시 맡아서 이끌어 주면 되든 안 되든 그건 대천명이고, 이 대표님이 잘 만드시는 스토리 광고를 통해 이미지 개선과 색깔 입히기를 하면 즉 진인사 하면, 그 결과는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선배의 아내는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막힘없는 화법으로 기억의 문을 열려고 애쓰는 나를 사로잡았다.
- 뜻이 정 그렇다면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선배가 동의한다면 말입니다.
말하는 사이 기억의 저편에서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하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안개 속인 듯 형체가 흐렸고 서성이는 그녀가 누구인지 분명치 않았다.
- 오빠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단호한 태도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를 움직일 수 있는 결정적 힘이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했다.
- 음, 결과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제야 선배가 자신의 아내를 나한테 보냈다는 걸 깨달았다. 광고주가 원한다면 더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이 대표님은 죽은 상품도 되살려내는 전설적인 광고인이라 들었습니다. 여의도에 입성시킨 경험도 있다 들었고요.
그녀는 나를 설득했다는 자신감으로 과장된 칭찬을 퍼부었다. 민망했다. 나는 마치 마음을 정리하려는 듯한 표정으로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만든 광고의 장점과 매력을 과장되게 추켜세우는 그녀의 목소리가 차츰 기억 속의 짙은 안개를 걷어냈다.
나는 죽은 상품은 몰라도 상대의 목소리로 오래된 기억을 되살려내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화로는 금방 상대가 누군지 알아채면서도 막상 얼굴을 보면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어하고 허둥대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나는 눈을 뜨고 확인하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더욱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은 안개를 뚫고 나온 햇살처럼 기억 속의 그녀를 비췄다. 지금보다 예닐곱은 어린 그녀였다.
나는 놀라움을 감추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물컵을 들고 서성였다. 그녀가 나를 전혀 못 알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알아봤다면 마음속 동요가 어떤 식으로든 드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여태껏 자신만만한 웃음을 띠고 알 수 없는 확신과 자신감으로 나를 설득하려고 했고 결국 설득했다.
그녀는 어느 순간도 나를 향해 놀라움이나 의문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육칠 년 전쯤 일이었다. 나와 아내는 이혼하기 위해 법에 따라 1개월의 숙려기간을 가져야 했다. 그 1개월이 지난 뒤였다. 나는 아내와 함께 가정법원에 가서 이혼 의사를 확인하고 나왔다.
어색한 미소를 남기고 뒤돌아서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반대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사사건건 어긋나는 생각과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는 다툼으로 감정이 메마른 상태여서 그런지 섭섭함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후련한 심정도 아니었다.
아내의 승용차가 법원에서 빠져나와 반대편 차로로 천천히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나는 멀어지는 아내의 승용차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갑자기 몸을 돌려 상가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의자에 앉자마자 순두부찌개를 주문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뒤여서 그런지 손님은 한 사람뿐이었는데 그마저 식사를 마치고 나가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음식이 차려지고 있을 때였다. 나는 뭔가 빠트린 걸 깨달은 것처럼 아, 소주도 한 병 주세요,라고 쾌활한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 상을 차리던 오십 대 중반의 여자가 지친 얼굴로 들릴 듯 말 듯 예, 하고 물러났다.
결혼 전 꿈꾸었던 극진히 아끼고 애틋한 마음으로 밤새워 안아주는 그런 사랑은 그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나 또한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이혼하고 또 누군가를 만나고 다투고 싸우고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며살아가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나를 슬프게 했다.
나는 얼굴을 감싼 채 몇 번 속울음을 삼켰다. 조금 전 반찬을 놓아주었던 여자가 주방에서 펄펄 끓는 순두부찌개를 조심스레 받쳐 들고 나오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울음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세면대 물을 힘껏 틀어놓고 누가 들을까 숨죽여 울었다.
고개를 들자 울고 있는 내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웃음이 나왔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유난을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세수를 하고 나와서 소주를 따라 빈속에 들이부었다. 뜨거운 기운이 짜르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 야, 이 부장. 무슨 일이야. 낮술을 다 마시고.
소주 한 병을 거의 다 비워 갈 무렵 친구가 식당문을 열고 들어왔다. 백수나 마찬가지였던 나를 광고회사에 발을 들여놓게 한 장본인이었다.
- 이모님,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려고 크고 활기찬 목소리로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그 사이 식당 안엔 저녁 식사 손님으로 거지반 차 있었다.
- 그러지 말고 다른 데로 가지! 부장 승진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바빠서 축하 전화도 못했다. 아무리 작은 회사라지만 부장 자리를 그렇게 빨리 꿰차냐.
그는 이모에게 술을 가져오지 말라 손짓하고 내 앞에 마주 앉았다.
- 부장이 뭐 대수라고..... 대표님이 나를 좋게 봐주셔서 좀 빠르긴 했지. 안 마실 거면 그냥 일어나지 앉기는 뭐 하러 앉아.
나는 마지막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다, 너 때문이야.
나는 승용차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앞뒤 없이말을 던져놓고 눈을 감았다.
- 니가 능력이 있는 거지. 엊그젠가 대표님한테 전화했는데, 너 부장 됐다고 그러더라. 그래서 알았지. 나는 대표님한테 달리 청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내가 청탁한다고 들어줄 리도 없고. 가끔 대표님한테 전화해서 니 안부를 묻긴 했지. 내가 대표님한테 소개했으니까 그 정도 관심은 보여야 하잖아. 너 일 잘하느냐고 물으니까, 사무실에 간이침대 들여놓고 살다시피 한다던데! 세 사람 몫은 너끈히 한다고 나한테 고맙다 그러더라. 너무 그러다 제수씨한테 쫓겨나는 거 아니냐!
-.......
나는 그에게 너 때문에 이혼했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대신 눈을 감고 맥없이 웃었다.
그의 말대로 내가 일하는 광고회사는 대기업에 비하면 규모가 작았다. 백수였던 나는 그의 소개로 광고회사의 전 대표를 만났고 그 자리서 채용되었다.
전 대표는 잘 나가는 시점에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서 자기 회사를 차렸고 꽤 유능해서 몇 년 새 자리를 잡았다. 내가 입사한 뒤로도 회사는 나날이 성장을 거듭했고 나는 그 여세의 덕을 본 한 사람이었다.
연봉도 대기업 이상 받았고 명함을 내밀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광고계에서는 알아주는 회사로 성장했지만 아내는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아내에게 남편의 기준은 자상하고 배려심 많고 따뜻하고 뭐 이런 거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회사에서 자는 날이 더 많았다. 쉬는 날에도 출근하는 일이 잦았다. 그 덕에 부장으로 승진은 했지만 아내와는 이혼해야 했다.
친구의 말처럼 아내에게 쫓겨난 셈이었다.
그의 낡은 승용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나는 동승석에 앉아 잠시 졸았다. 전날 밤에 한숨도 자지 못한 탓에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얼마쯤 지나서 눈을 떴는데 벌써 사방이 어두웠다. 차는 퇴근길 차량에 갇혀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한 시간도 안 걸릴 거리를 서너 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하게 만드는 악명 높은 교통체증에 이골이 난 것인지 그나 나나 조급증 내지 않고 차량행렬을 바라볼 뿐이었다.
불현듯 아내가 잘 들어갔는지 궁금했다. 나는 습관처럼 휴대전화기 화면을 열었다. 하지만 화면만 바라보다 그대로 내려놓고 다시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았다.
그가 어디론가 전화를 해서 누군가를 불러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전화를 하더니 예쁜 애들 어쩌고 하는 양이 어디 잘 아는 마담과 통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 야, 가까운 순대집이나 가자. 요란 떨지 말고.
- 너 부장 승진했는데 축하해야지. 친구야, 적응 잘해줘서 고맙다. 사실 너 소개해줘 놓고 욕먹을까 걱정했거든.
- 내가 그렇게 무능해 보였냐?
나는 등을 기댄 채 고개만 돌려 그를 쳐다봤다.
- 니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잖아. 그래서 얼마 못하고 그만둘까 봐.
- 대표님도 워낙 잘 챙겨주시고, 생각보다 일이 재미있더라고. 성취감도 있고.
- 그렇다고 사무실에 간이침대까지 들여놓을 필요는 없잖아. 제수씨 생각도 좀 해야지.
-.......
- 아무튼 잘 됐다. 니가 부장 됐다는데 내가 왜 이렇게 뿌듯하냐.
- 근데 어디 가려고?
- 잘 아는 마담이 있는데, 얼마 전에 룸살롱 개업했어. 한 번 가봐야지 하면서도 시간이 나야 말이지. 겸사 겸사 해서.......
- 야, 나 그런데 가서 술 마실 기분 아냐.
- 무슨 일인데? 아까부터 분위기가 좀 이상하긴 한데. 말을 해야 알지.
- 내가 법원까지 왜 갔겠냐!
- 너, 혹시 제수씨랑 헤어졌냐!
- 그래.
- 야 씨, 농담하지 마.
- 진짜야. 너 때문에 이렇게 됐어.
- 무슨 소리야.
- 회사에서 먹고 자고 하는 남자를 누가 좋아하겠냐.
- 야, 그렇다고 소개해준 나 때문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지.
- 나 때문이라고 말하면 내가 너무 비참해지잖아. 니 탓이라고 그냥 해라.
- 진짜 이혼했구나. 그래 내 탓이다.
- 나 내일 일찍 출근해야 돼.
- 대표님한테 오늘 너 하루 빌려간다고 했어. 승진 축하 파티 할 거라고.
- 내가 맡은 일이야. 대표님하고 상관없는......
- 너 그 아픈 맘을 뭘로 달래려고. 일이 손에 잡히겠냐.
- 아프고 말 것도 없어. 일은 일이고.
- 그래 니 성격 아는데 오늘은 내 말대로 하자. 제수 씨도 없고. 자유다. 자유. 프리덤.
- 프리덤은 생리대 이름이야.
- 그게 언젯적인데......
그렇게 티격 태격하면서 룸살롱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직 청소가 덜 끝나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가슴을 다 드러낸 스물서넛 남짓한 여자가 카운터에서 우리를 맞았다. 그녀는 우리에게 깍듯이 인사를 건네고 청소를 마친 방으로 안내했다.
미리 준비한 듯 우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웨이터가 양주와 과일 안주를 내왔다. 나는 빈 속이 틀림없는 친구의 위장을 걱정했다.
그는 술은 빈 속에 마셔야 제 맛이잖아,라는 말로 일축했다. 그리고 웨이터가 방금 가져다 놓은 우유와 숙취제 따위를 털어 넣었다.
카운터에서 우리를 맞았던 여자가 눈치껏 그의 옆에 앉아 시중을 들었다. 맥주와 양주를 섞어 몇 잔 마시자 취기가 새롭게 올라왔다.
얼마 후 마담이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옆에 앉았다. 그녀는 사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나이가 많아서 오히려 편했다. 내가 양주를 홀짝일 때마다 마담이 나를 귀여워하며 번번이 안주를 입에 넣어주려고 했다. 취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덥석 받아먹을 만큼 뻔뻔해지지 않았다. 나는 몇 번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어색하게 받아먹었다.
어느새 룸 안에는 내 승진을 축하해 주러 온 친구 두 명이 와 있고 스무 살 남짓한 여자 아이들이 우리 사이에 끼어 앉아 시중을 들고 있었다.
마담이 언제 나가고 수희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가 언제부터 내 옆에 앉아 있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마담 따위는 까맣게 잊고 술기운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그녀와 러브샷을 하고 그녀를 껴안았다. 그게 누구이든 사람의 품은 한 없이 따뜻하고 포근했다. 나는 그 느낌이 좋아서 자꾸 그녀를 껴안았던 기억이 난다.
아내와 처음 만나서도 자주 껴안고 자주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점점 그 횟수가 줄어들다가 잠자리도 하지 않고 지낸 지가 언제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수희와 포옹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그녀에게서 향기가 날아들수록 턱 없이 이혼한 아내가 그리워졌다. 나를 향해 어색하게 웃음 짓던 아내의 마지막 모습이 안타깝고 불행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가끔은 수희의 어깨와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없이 울었던 것도 같았다. 그녀가 가만가만 내 등을 토닥여주던 기억이 생생하다.
룸살롱에서 수희와 헤어졌다면 아마 나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각각 여자 파트너와 짝을 지어 호텔방으로 향했고 나도 그녀와 함께 호텔방으로 갔다.
수희는 호텔방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틀어막고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그녀의 등을 두들겨 주고 냉장고에서 이온 음료를 따서 마시게 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쉬게 한 뒤에 밖으로 나와 어딘가에서 컵라면을 구해다가 뜨거운 물을 부어 먹게 했다.
나도 뒤늦게 찾아든 허기를 달래려고 컵라면 몇 수저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주 아주 외로운 맛이 나서 그랬겠지만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내가 떠났다 생각하자 세상이 절멸하고 나 혼자 남은 것 같이 외롭고 외롭고 외로웠다. 아내 외에 다른 여자는 나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다.
- 오빠,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그녀가 컵라면을 먹다 말고 내게 물었다. 내 흐느낌에 놀란 듯했다.
-.........
나는 좀 어색하고 미안해서 눈물을 닦고 억지로 웃었다.
- 아까부터 자꾸 울길래......
- 사실 오늘 이혼했어. 친구들이 승진 축하해 준다고 모인 자리인데 하필 이혼한 날이 된 거지.
- 오빠, 바람피우다 들켰어!
- 아냐, 그런 거. 회사 일로 야근이 잦았지. 하지만 단 한 번도 바람을 핀 적은 없어. 이렇게 여자와 호텔방에 들어온 것도 처음이야. 못 믿겠지만......
나는 쑥스럽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억울할 것 같았다. 아니 외로움이 더럽고 추하게 여겨질 것 같았다.
-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빠 말은 믿을 수 있을 거 같아요.
- 내가 항상 늦게 들어가거나 며칠에 한 번씩 들어가니까...... 아내는 항상 화가 나 있었어.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늘 찬바람이 불었지. 우리는 서로 외로웠던 건데.........
나는 또다시 울음이 솟구쳐 올라와서 입을 꾹 다물었다.
- 오빠를 이런 데서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걸.......
수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내가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에 보답하려는 듯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사실 대학원에 다니고 있어요. 쉽게 돈을 벌려는 생각으로 이런 일을 하는 건 아니에요. 이런 일이 쉽다 여기는 사람들은 정말 뭘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해야 하나. 변명 같지만......
그래요, 남들이 봤을 땐 저도 쉽게 돈을 벌기 위해 몸을 파는 여자인 거죠. .......
저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지금은 사랑하지 않은 채 붙들려 있는데......
그 남자, 대학교수예요. 이지적으로 잘생긴 데다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잘해서 학생들에게 인기도 많고 따르는 사람도 많아요.
처음엔 나도 그런 남자와 사귄다는 게 자랑스럽고 뭔가 큰 행운이라도 얻은 것처럼 들떴어요. 그런데 그 남자가 하는 짓이라는 게 정말 어처구니없었어요.
처음엔 사랑이라 여기고 받아들이려 노력했죠. 하지만 못 견디겠더라고요. 역겨워서......
거절하면 주먹질과 발길질이 날아들었어요. 그걸 나 혼자 넘어져서 다쳤다거나 사고를 당했다고 변명하고 다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죠.
부모님도 알게 되고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이 알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 남자는 여전히 교수 자리에 앉아 있어요. 더 최악인 건 모두 내 잘못도 있을 거라 짐작하는 거예요. .......
그 남자에게 복수하는 방법을 찾다가 여기까지 왔다면 믿지 못하겠지만..... 진짜예요.
그 남자는 내 처녀성을 가져가 놓고도 늘 나를 의심하고 더럽다 말했어요. 그러면서도 변태짓을 하고 또 요구하고. 내 몸을 더럽혔죠.
하지만 내 몸을 더럽힌 놈이 바로 자신이라는 걸 그놈은 모르는 듯했어요.
그래요. 내가 사랑한 사람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더럽혔고 학대했어요. 그리고 더럽다고 주먹질하고 의심했죠. 나는 그놈에게 짓밟히고 더러워졌어요. 더 이상 더 더러워질 수 없을 만큼요.
그래서....... 내가 그놈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이 길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놈을 괴롭게, 아니 미치게 만들어 버릴 작정이에요.
여자는 눈물을 흘리거나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냉소적으로 웃거나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 좆같은 개새끼......
나는 그 음울하고 절망에 빠진 목소리에 섬뜩해져서 외로움도 잊고 과장되게 웃음을 터트렸다.
- 그렇게 욕을 하니까 전혀 다른 사람 같아.
- 한 번만 더 할게요. 좆같은 개새끼 씨발놈 콱 디졌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그런 좆같은 개새끼 안 잡아가고 뭐하는지 몰라, 씨발.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웃지 못했다. 여자의 가슴에 맺힌 한이 오롯이 내게 전해져서 너무 아팠다.
그날, 그 호텔방에서 우리는 키스라든지 섹스라든지 하는 따위의 애정 행각을 저지를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각자의 외로움과 아픔이 너무 컸다.
날이 새자마자 나는 출근하기 위해 서둘러 나섰고 여자는 좀 자다가 나가겠다며 내가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 그런데 지금처럼 사는 게 복수가 될까?
나는 뒤돌아 서서 수희를 바라봤다. 어쩐지 그녀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고 자학을 그만 멈췄으면 했다.
- 그놈은 이곳 단골이에요.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그놈에게 접대를 하곤 하죠. 그놈이 이곳 여자들을 껴안고 뒹군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 ........
나는 속으로 경악하면서도 억지로 웃었다.
- 아마, 그놈이 룸에서 나를 맞닥트리면 미쳐버리겠죠. 하지만 그놈은 절대 나를 아는 척하지 않을 거예요. 나도 그럴 거예요. 그 놈과 함께 온 사람 옆에 앉아 몸을 부비고 껴안게 될지 몰라요. 그럴 수 있기를 바래요.
- 그 사람이 무섭지 않니?
- 그래서 끝내려는 거예요.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돌아서 나왔다. 안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선배의 아내가, 내 사무실에서 나가기 직전 잠시 머뭇거리다 돌아서서 우리 어디선가 만난 적 있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예식장에서 뵈었잖아요, 하고 활짝 웃었다. 나는 그녀가 그날을, 그 날 만났던 나를 영원히 기억하지 못하기를 바랐다.
선배의 아내가 돌아가고 난 뒤 나는 알 수 없는 안도의 숨을 몰아 쉬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비밀이 없는 세상인데 대교를 건너는 동안 무사할 수 있을까! 대교를 건넌 뒤에는!
아내와 이혼하고 그 여자를 만난 그날로부터 석 달이 훌쩍 지났다. 하지만 아내와 나, 어느 누구도 구청에 이혼신고서를 내지 않아 우리의 이혼은 무효가 되었다. 아내는 떠나지 않았고 우리는 연애 시절의 며칠처럼 되찾은 사랑의 행복함에 빠져 지냈다.
아무래도 너만 한 남자를 혹은 여자를 만나기 쉽지 않을 거 같아서, 이랬으면 행복감이 더 오래 갔을지 몰랐다. 그런데 우리 둘 다 구청에 니가 갈 줄 알고 안 갔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바람에 새로운 시작의 날들이 짧고 아쉽게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 다른 생각으로 부딪치고 다투고 토라지고 비난하고 헐뜯으며 산다. 그리고 다행히 무한 반복해서 다시 용서하고 화해화고 사랑을 나누는 법도 알게 되었다. 인생 뭐 별거 있어,라고 말할 만큼 우리도 사랑과 인생 모두에 좀 느긋해졌다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