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재
‘오늘 아침은 밤새 내린 폭설로 인해 시내 곳곳에서 교통이 마비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직도 눈이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께서는 차량 운전을 자제하시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모든 분의 안전을 기원하며, 음악 보내드리겠습니다. 에릭 클랩튼의 Tears in Haven.’
라디오에서 수연의 목소리가 사라지기 전부터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수연은 전화로 교통 상황을 알려주는 통신원이지만, 담당 피디의 요청으로 마지막 멘트까지 하게 되었다.
운산연의 부탁 때문이었다. 서너 달 전부터 수연의 목소리가 매일 아침 출근길에 라디오 전파를 탔다. 개인택시 운전자들이 보내온 시내 곳곳의 교통 상황을 라디오로 전해주는 교통 통신원이었지만 감미로운 목소리 덕분에 출근길 운전자들로부터 뜻밖의 팬레터를 받는 등 인기를 얻고 있었다.
올리브 07은 라디오를 끄고 차창 밖 눈 내리는 고속도로를 바라봤다. 도로 위에는 이제 달리는 차량이 거의 없었다. 대신 제설차가 나타나서 눈을 치우며 지나갔다. 밀려난 눈은 갓길에 산처럼 쌓였다. 염화칼슘도 뿌려대고 있었다. 하지만 제설차가 지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고속도로에 눈이 다시 쌓였다.
얼마 후, 멀리서부터 제설차가 다시 눈을 치우며 다가왔다. 다른 제설차인지 얼마 전 지나갔던 제설차가 돌아온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제설차는 또다시 눈을 갓길로 밀어내고 염화칼슘을 뿌리며 멀어졌다. 하지만 눈을 치우는 속도보다 눈 내리는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눈은 다시 쌓이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난파선처럼 승용차 서너 대가 시차를 두고 엉금엉금 기어서 지나갔다. 이내 고속도로는 다시 텅 비었다. 무전기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밤새 사고 소식은 없었다. 올리브들은 눈을 부릅뜨고 고속도로 여기저기에서 밤을 새웠지만 기대하던 다중 충돌 사고는커녕 단독 사고조차 구경하지 못했다. 어쩌다 한두 대씩 지나가는 차들은 보란 듯이 멀쩡하게 기어서 눈앞에서 멀어져갔다. 폭설이 예보된 데다 눈이 계속 쌓이자 몇몇 톨게이트에서 차량 진입을 통제했기 때문이었다.
- 여기 올리브 제로, 미평사거리에서 연쇄 추돌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제보자의 말에 따르면 추돌한 차량이 일곱 대라고 합니다.
올리브 07이 깜박 졸음에 빠져 있을 때였다. 무전기로 수연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올리브 07은 올리브들을 시내로 내려보내야겠다고 마음먹고 송신기를 집어 들었다. 어차피 전부 출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지금부터라도 시내에서 일어나는 출근길 교통사고에 대비해야겠다는 뒤늦은 판단이 섰다. 고속도로에서 사고 차를 기대하기는 글러 먹은 일이었다.
- 여기 올리브 07. 전부 미평으로 집결하세요.
올리브 07은 클러치를 밟아 중립에 있던 기어를 저단으로 넣었다. 그리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천천히 가속페달을 밟았다. 레커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바퀴를 감은 체인에서 철커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그 소리를 들으며 여유 있게 중앙선을 넘어 하행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철커덕 철커덕 철커덕......... 점점 소리가 빨라졌다.
- 여기 올리브 11, 죽암 언덕에서 출발했습니다.
- 여기 올리브 03, 청원에서 출발합니다.
- 여기 올리브 05, 일죽에서 출발했습니다.
올리브 07이 도착했을 때는 부상자들이 이미 병원으로 후송된 뒤였다. 경찰들도 먼저 와서 사고 처리와 교통정리를 하느라 분주했다.
인도로 돌진해서 가로등을 들이받고 앞 범퍼가 종잇장처럼 구겨진 승용차, 서로 뒤엉켜 나뒹군 세 대의 승용차, 꽃집 유리창을 박살 낸 채 뒷모습만 드러낸 봉고차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나머지 두 대의 승용차는 전혀 다른 길과 방향에서 제각각 반파된 채 서 있었다.
올리브 07이 사고 차 앞으로 레커차를 들이미는 동안 의경이 다가와 수신호로 도움을 주었다. 그는 레커차를 세우고 내려 시선이 마주치는 대로 경찰과 의경에게 눈인사를 건네면서 크레인 조종간을 붙잡고 붐대를 뽑아냈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차례로 도착한 올리브 03과 11도 사고 차 앞으로 레커차를 대놓고 내려서 크레인 조종간을 붙잡았다. 이어 붐대가 차례로 허공으로 뻗어 나갔다.
경찰의 사고조사가 끝난 된 뒤에야 올리브 03과 올리브 11이 사고 차를 달고 차고지에 다녀왔다. 곧이어 그들은 나머지 사고 차를 달고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까지는 십 여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제야 올리브 05가 도착했다. 그가 남은 두 대의 사고 차를 업고 달았다. 그동안 다른 회사 레커차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올리브 07은 사고 차 한 대를 매달아 놓고 팔짱을 낀 채 상황을 지켜보며 경찰과 이야기를 나눴다.
경찰은 최초 사고 유발자한테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고 말했다. 자세한 건 조사를 더 해야 알겠지만 아마도 내리막길에서 만취 상태로 질주하다가 신호를 무시한 채 사거리로 뛰어들면서 시작된 사고인 듯했다.
*
오전 내내 시내 곳곳에서 사고 제보가 들어왔다. 사고 차를 떼어놓고 돌아서면 기다렸다는 듯이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교통방송을 마치고 난 수연은 정장을 입은 채 전화를 받고 무전을 치느라 분주했다. 하지만 정오가 가까워 오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전화기도 시내 외곽에서 대기하고 있는 올리브들의 무전기도 숨을 죽이고 침묵에 빠졌다. 체감 시간은 오후 서너 시 같았는데 사무실 벽시계는 11시 1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 11시 11분이네. 열하나는 명진공업사에 취직했다던데. 여수 간다더니 정신을 차렸나 보네.
올리브 07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시계를 들여다보면 우연히 시간과 분이 일치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하필 11시 11분이어서 그런지 그만둔 올리브 11이 떠올랐다. 그가 명진공업사에 취직해서 견인차를 몬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 다행이네. 다들 배고플 텐데, 삼겹살이라도 구울까!
수연이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조금 전 들어온 올리브 05가 차고지 한쪽에 사고 차를 떼어놓고 있었다.
- 삼겹살 있어! 구워주면 좋지.
올리브 07이 어색하게 웃었다.
- 여기 올리브 제로, 올리브 03, 11 사무실로 와서 식사하세요.
수연은 송화기를 집어 들고 무전을 날렸다.
식당 안에는 금방 기름 연기와 훈훈한 열기가 가득 차고, 고소한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분주히 움직이며 식탁을 차리고 있는 그녀는 어느새 정장을 벗어 던졌는지 청바지에 헐렁한 스웨터 차림이었다.
- 삼겹살에는 역시 하얀 밥이 진리다.
올리브 07이 밥을 뜬 수저 위에 삼겹살과 김장김치를 얹어 입안에 넣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음~ 소리를 냈다.
- 삼겹살은 언제 먹어도 맛있죠. 김장김치랑 먹어서 더 맛있는 거 아닌가요?
까마귀 05도 상기된 얼굴로 삼겹살을 김장김치에 싸서 입에 넣었다.
- 그렇지? 장모님께서 김장김치를 바리바리 싸 보내 주셨는데 변변하게 인사도 못 드렸다.
올리브 07은 개인택시 하는 수연의 형부 편에 김장김치를 보내주셨다는 말이 불현듯 떠올라 자책감이 밀려왔다.
- 한 번 다녀오세요.
올리브 05가 삼겹살을 뒤집으며 올리브 07을 바라봤다.
- 시내에 있어서 금방 올 줄 알았는데, 03과 11이 늦네. 나는 사무실에 가서 무전 한 번 더 할 테니까, 알아서 구워 먹어.
수연의 시선은 올리브 07이 아니라 올리브 05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가 나가면서 툭 친 어깨도 올리브 07이 아니라 올리브 05였다.
- 장모님한테 한번 가긴 가야 하는데…….
올리브 07은 수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흘렸다.
- 식사하고 형수님하고 다녀오세요.
- .......
수연이 문을 열고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올리브 07은 생각에 잠겨 고개만 끄덕였다.
*
수연과 함께 아버지 산소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 무서워.
집으로 돌이오는 차에서 수연은 올리브 07을 쳐다보며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 뭐가?
- 자기라는 사람.
- 말 안 해서 서운했어!
- ......
- 수연이 알면 힘들까 봐 말 안 거야. 혹시 잘못돼도 나 혼자 책임지려고, 끝까지 감추었어.
- ......
- 밤중에 혼자 와서 아버지 산소 봉분을 파내고 돈 가방을 묻을 때, 솔직히 나도 겁났어. 끝내 지켜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고, 만약 잘못됐으면 모든 걸 다 잃었겠지.
- ......
- 하지만 이제 다 끝났어. 저 돈은 이제 우리 거야.
올리브 07은 승용차 트렁크에 넣어 둔 돈 가방이 눈에라도 보이는 듯 뒤로 고개를 돌렸다.
- ......
하지만 수연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내내 침묵했다.
수연의 무거운 침묵 때문이었다. 올리브 07이 마음속으로 한껏 누리던 승리의 쾌감과 환호성은 차츰 열등감으로 바뀌었다. 그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무거운 수연의 침묵을 견뎌야 했고, 동시에 자신의 치부가 드러난 것처럼 자존심 상하고 초조했다.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수연의 손목을 잡아끌고 금은방으로 들어갔다. 어떻게든 수연의 완고한 마음을 무너뜨리고 어렵게 얻은 행운을 함께하는 동조자로 만들고 싶었다. 소극적으로라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마는 수연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수연은 그 어떤 보석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자꾸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는 억지로 그녀를 붙잡아두고 주인이 깊숙한 곳에서 꺼내 온 가장 크고 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반지를 수연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수연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의 손을 뿌리쳤다.
- 그런 돈으로 나한테 반지를 사 주려고 했어? 그런 돈으로 나하고 결혼하려고 했냐고!
그가 승용차 운전석에 오르자 수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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