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뒤집어 놓은 편지
잠결에 투가 짖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그러나 투는 벌써 오래전에 죽지 않았는가.
월인은 눈을 뜨지 않고 누운 채 생각해본다.
환청이나 환영이 아니라 현실에 대해.
다행히도 천강은 머릿수건을 두르고 집안 곳곳을 청소하고 옷장을 정리하면서 돌아오려고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에도 쉽게 옅어지지 않는 상흔처럼 천강의 얼굴에 남아 있는 꽃그늘은 여전하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런 얼굴을 하고 살아온 것처럼.
이젠 꽃그늘 마저 본래 천강의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세월은 뭐든 그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과 의식을 길들이는 것 같다.
천강은 연휴에 놀러 온 혜미와 혜진이, 그리고 해주를 데리고 부들밭에 가서 이름 모를 들꽃으로 온몸을 장식하고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그날의 사진 속 얼굴에도 여전히 떠나보내지 못한 사랑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처럼 천강의 얼굴에 드리운 꽃그늘은 좀처럼 옅어질 줄 모르고 점점 짙어져 가고 있어 월인의 심정은 늘 안타깝고 쓸쓸하다.
산책을 나갈 때마다 천강은 이름 모를 들꽃을 꺾어다 투의 무덤에 헌화하곤 했다. 해주도 하굣길에 들꽃을 꺾어와 천강의 꽃무더기 옆에 나란히 놓았다.
그럴 때 월인은 죽어서라도 천강의 꽃을 받고 싶어진다.
생각해보면 한동안 투의 무덤에는 시들지 않은 코스모스가 놓여 있곤 했다. 그리고 사나흘 전부터는 코스모스 대신 들국화가 놓여 있었다. 어쩌면 국화가 아니라 구절초였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의식이 또렷하고 생각이 명료한데도 투가 현관문 앞에서 짖는 듯한 착각이 든다.
환청이다. 요 며칠 잠잠하던 환청이 다시 시작되는 것인지 모른다. 월인은 속엣 말로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온다.
가끔 투가 짖는 환청을 듣고 깨어보면 일곱 시 전후일 때가 많다. 그런데 오늘은 채 여섯 시도 안 됐다.
수면제를 먹고 누웠는데도 겨우 삼십 분을 자지 못한 것이다.
원인 모를 불면이 계속되고 있다. 수면제로도 어찌해볼 수 없는 불면이다.
월인은 거실로 나온다. 공기가 제법 서늘하다. 진작 벽난로를 지펴야 했다.
그러나 통나무를 잘라서 장작을 패고 매일매일 불씨를 다시 살리는 일이 귀찮고 버겁게만 여겨져 차일피일 미뤄왔다.
게다가 천강은 이제 예전처럼 벽난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건조하지 않은 열기와 참나무가 타면서 내는 그윽하고 안온한 냄새에 유난을 떨지 않는다.
사실 안온한 냄새는 애초부터 나지 않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천강은 참나무가 탈 때, 특히 덜 마른 참나무가 탈 때 더욱 진한 냄새가 난다며 탄복하곤 했다.
그래서 월인은 지칠 줄 모르고, 기쁨으로 참나무 장작을 해다 날랐다. 매일매일 아침마다 불씨를 살리고 참나무 장작을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천강이 거실에 나오면서 아, 이 건조하지 않은 열기, 이 편안한 냄새, 라면서 행복해 하는 걸 보려고.
하지만 이제 천강은 기름보일러에서 내뿜는 열기와 벽난로 열기를 구분하지 않는다. 벽난로에 구운, 고구마를 주식 삼아 먹던 기억은 없다, 천강에겐.
그렇다고 해도 벽난로를 피워봐야겠다고 월인은 생각한다. 귀찮은 결심이다.
거실 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안개를 바라보고 있던 월인은 결심한 듯 마른세수를 하고 나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안개가 집 앞까지 다가와 엎드려 있다. 금방이라도 입안 깊숙이 숨기고 있는 혀를 뻗어 무엇이든 집어삼킬 것만 같다.
산책이라도 하고 싶은데 안개의 장벽에 막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나 월인은 결심한 듯 깊이를 알 수 없는 안개 속으로 발을 내디딘다.
언제 가져다 놓은 것일까. 투의 무덤에 천강의 머리핀이 놓여 있다. 결혼 전부터 가지고 있던, 리본 모양의 분홍색 머리핀이다.
천강의 액세서리 함에 있던 것인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간다.
월인은 초조히 그러나 서두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거실을 가로질러 천강의 방문 앞에 선다. 잠시 망설이던 월인은 이윽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연다.
방안에 고여 있던 롤리타렘피카향이 먼저 달려든다. 그러나 천강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밤새 사람이 자지 않은 것처럼 침대는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방안은 언제나처럼 깨끗하게 정돈된 그대로다.
천강이 이렇게 이른 시간에 일어난 적은 거의 없다.
간밤에 여기서 자지 않았던 것일까. 월인은 생각하며 옷장을 열어본다. 옷가지들도 그대로 걸려 있다. 무엇이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월인은 천강이 금방이라도 돌아올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며 방을 빠져나온다. 그러나 아무래도 불길하다.
2층으로 가서 방마다 문을 열어본다.
허겁지겁 집에서 나온 월인은 자동차를 운전해서 읍내까지 나갔다 돌아온다. 그 사이 천강이 돌아와 있을 것 같다. 제발 돌아와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나 혼자 얼이 빠져서 이러고 다닌 거라며 웃고 싶다. 아니 꿈,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월인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 애를 태워 왔다는 걸 깨닫는다.
매일 아침 천강이 사라져버리는 꿈을 꿨고 천강의 행방을 확인하기 위해 헤매고 다녔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천강은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월인은 그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안심이 되었고 비로소 맘껏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천강의 방문을 연다. 조심성 없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방문을 연 뒤다.
그러나 롤리타렘피카의 잔향만 끼칠 뿐이다.
월인은 문을 닫으려다가 다시 한번 방안을 돌아본다.
마음속에 회오리바람이 부는 것 같다. 파고 높은 물결이 철썩철썩 가슴을 때린다. 해일이다. 어린아이처럼 소리쳐 울어버리고 싶다.
월인은 입술을 꼭 깨물고 2층으로 다시 올라간다.
그제야 월인은 2층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백지 한 장을 본다. 그 위에는 연필 한 자루도 놓여 있다.
월인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백지를 집어 든다. 백지 뒷면을 들추자 천강이 급히 휘갈겨 쓴 글씨들이 강물처럼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아저씨,
더는 이렇게 못 견디겠어요.
아저씨만큼이나 저 또한 기억이 돌아오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요.
그래서 아저씨에게로 돌아갈 수 있기를.........
지금 내 마음속에 있는 사랑이 안개처럼 걷히고 안개 너머에 숨어 있던 오래전 사랑이 하나의 섬처럼 나타나 주길 정말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렸어요.
하지만 할머니를 어머니로 해주를 딸로 받아들였듯이 아저씨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어요.
이제 기억은 돌아오지 않을지 몰라요. 아니 전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는 게 싫어서요.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아저씨는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아저씨가 아저씨가 아니라 내가 잃어버린 기억 속의 사랑이라는 걸 인정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그러나 아무래도 타인만 같은 숨 막히는 고통........
어쩌면 저는 상실의 고통을 벗어나려고 떠나는 건지 모르겠어요.
상실의 내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어서요.
어머니 말처럼 기억이 돌아온 뒤에 아저씨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살 수 없게 되더라도 어쩌겠어요.
그때 그런 맘이 들면 죽어야겠죠. 그러나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에요.
지금 나는 지금의 나니까요.
아저씨의 사랑, 제겐 과분하지만 전 아무것도 아저씨에게 줄 수가 없었어요.
전에 그렇게 좋아했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을 열 수 없었을까요?
그런 마음들이 이렇게 꽉 닫혀서 열리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하다못해 미움조차 없는걸요.
그게 아저씨에 대한 저의 마음이에요.
그러니 아저씨, 이젠 저를 잊어버리세요. 전 더 이상 예전의 천강이 아니잖아요.
아저씨,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젠 기억이 돌아온다고 해도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려고 해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리고 제 신변이 정리되면 해주를 데려갈게요.
부탁드릴게요. 제가 돌아와서 해주를 데려갈 때까지 저를 찾지 말아 주세요.
그럼……. 고마운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떠나기 직전 이곳에 앉아 있었을 천강을 생각하며 월인은 의자를 쓰다듬어 본다. 그리고 그녀가 남긴 편지를 코에 가져다 댄다. 롤리타렘피카향이 나는 것 같다.
문득 롤리타렘피카향이 환취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오랫동안 환청과 환영에 시달려온 것처럼 환취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게 환영이고 환청이고 환취였으면........
월인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면서 생각을 정리해본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몸은 직관적으로 움직인다.
분노인지 아니면 배신감인지 모를 어떤 감정들에게 조종당하는 기분이지만 떨쳐버릴 수가 없다.
월인은 방에 들어가 정장을 갖춰 입는다. 하필 입은 게 오랫동안 묵혀둔 양복이다. 결혼식 때 입었던.
무의미한 줄 알지만 월인은 그 차림으로 집을 나선다.
월인은 자동차 시동을 걸려다 문득 생각난 듯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곧장 서재로 들어가 책상 서랍 여기저기를 뒤진다.
서랍 맨 아래서 꺼낸 상자를 열자 검사 시절 우연히 손에 넣게 된 소련제 권총이 들어 있다.
실탄도 3발이 있다.
잠시 망설이던 월인은 권총과 실탄을 꺼내서 주머니에 넣는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아직 해주나 장모는 기척이 없다. 일어나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오늘이 토요일이다.
어머님, 저 급히 천강과 함께 여행을 떠나요. 사정은 돌아와서 말씀드릴 테니까 걱정은 마세요. 해주에게도 잘 설명해주세요. 죄송합니다.
월인은 꽤 긴 여행이 될 것 같은, 어쩌면 다시 못 올 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안고 또박또박 쓴 글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나온다.
집을 나서면서 천강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그만둔다. 전화를 걸면 가출한 사실을 알았다고 통보하는 꼴이 된다.
쫓기는 걸 알게 되면 더 빨리 더 멀리 달아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자동차 시동을 켜고 나니까 어디부터 가봐야 할지 모르겠다.
월인은 천천히 마을을 빠져나온다.
천강에겐 이 집 외에 세상 모든 곳이 미지의 세계이다. 천강 혼자서 가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와 갔을까. 기타 선생이다. 그 남자와 함께 갔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천강의 팔목을 잡던 그 남자의 눈길이 일순 젖어 드는 것 같았다. 당시 월인은 그 남자의 눈가가 젖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월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 눈가가 젖는 거냐고, 천강을 사랑하기라도 하는 거냐고 따져 물을 수는 더더욱 없었다.
월인은 그날의 그 장면을 떠올리며 그 남자와의 동행을 확신한다.
월인은 호반로에서부터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커브길에서 자칫 마주 오는 차와 추돌할 위험을 간신히 넘기고 신호를 몇 번이나 위반하고 도착한 곳은 김현수 음악학원이다.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다. 전화도 받지 않는다. 주말에도 수업이 있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마땅히 물어볼 만한 곳이 없다.
주위를 둘러본다. 가까이에 24시 해장국집이 있다.
월인은 들어가서 설렁탕을 시킨다. 신맛이 날 것 같은 깍두기와 반찬 설렁탕이 한꺼번에 나온다. 월인은 시큼한 깍두기를 한 번 베어 먹는다.
- 음악학원 말이에요. 주말엔 수업이 없나요?
월인은 개방된 주방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묻는다.
-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아주머니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가마솥을 닦는 데 열중이다.
- 저도 밤에만 일하는 사람이라서 잘 몰라요. 밤 열 시에 와서 아침에 퇴근하니까요.
자신의 대답이 아무래도 손님에게 불친절하다고 느꼈는지 덧붙인다.
월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계를 본다. 아직 여덟 시가 채 안 됐다. 하지만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선다.
- 왜, 그냥 가시려고요. 식사도 안 하시고.
- 죄송합니다.
월인은 설렁탕에는 수저도 담가보지 않은 채 그냥 식당을 나온다.
식당을 나가려다가 들어서는 아주머니와 마주친다. 아침 출근하는 아주머니 같다. 월인은 아주머니에게 학원에 대해 물어보려다가 그만둔다.
마침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음악학원 출입문을 열고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월인은 학생에게 달려간다.
- 학생, 원장 선생님은 언제 나오시나?
- 어, 오늘 안 나오실 텐데, 여행 가신다고 했어요. 원장님 캠핑카 타고 여행 가시면 삼사일 있다가 오시곤 해요.
학생한테서 자신이 이 학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아는 중요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 갑자기 가신 건가. 나한텐 그런 말씀 없었는데.
월인은 무슨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하게 된다.
- 깜박 했나 보죠. 필이 와서 갑자기 떠났을 수도 있고요. 그럴 땐 아무 때고 떠나거든요. 원장님 실력 짱이세
요. 드럼도 잘 치시고 피아노도 잘 치세요. 기타는 신이고요.
학생은 기타를 치는 시늉을 한다. 명랑한 아이다.
- 조금 있다 나오실지도 모르고요. 아직 출근 시간 전이거든요. 부원장님은 나오실 시간 됐어요.
학생은 친절하게도 종이컵에 커피를 타다 주고 로비 한쪽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앉아 계시라고 한다.
- 원장님은 주로 어디로 여행을 잘 가시지.
월인은 의자에 앉아 커피로 입을 적신다. 그 와중에도 달고 맛있다.
- 강원도에 잘 가세요. 정선, 정선엔 자주 가세요. 거기 가면 영감이 팍팍 온대요. 그런데 혹시 서울 기획사에서 오신 사장님이세요?
갑자기 생각이 미쳤는지 학생은 걸레질을 하다 말고 월인을 살핀다.
- 응, 아냐.
월인은 얼버무린다.
- 앞에 세워 놓은 벤츠 사장님이 타고 오신 거죠? 딱 봐도 기획사 사장님 포스가 팍팍 풍기세요. 입고 계신 수트가 어디 건지 맞춰 볼게요. 아르마니아, 구찌, 아니다 제냐 거다. 맞지요.
월인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시간을 본다. 부원장이라도 어서 빨리 나타나줬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 사장님, 제 노래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그러면서 학생은 걸레 자루를 잡고 마이클잭슨 흉내를 내며 love never felt so good을 부른다. 의외로 엉뚱한 구석이 많은 학생이다. 다행히 학생은 중간쯤에서 노래를 멈춘다.
- 저를 픽업해보세요. 절대 손해 볼 일 없을 겁니다. 전 비전이 있는 놈이라고요. 원장님도 그러셨어요. 제 노래가 별로였어요! 사장님이 원석을 차버리신 거라고요.
학생은 다시 청소를 시작한다. 실망하는 기색도 안 보인다.
- 아르바이트하는 거니?
월인은 아무런 대답을 못해 준 것이 미안해서 그냥 묻는다.
- 예, 교습비 대신 청소를 해요.
학생은 눈을 찡긋한다.
- 기타를 배우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원장님한테 방금 전처럼 노래를 부르며 배우게 해달라고 매달렸죠. 그렇게 된 거예요, 사장님. 이런 게 인생이 아니겠어요. 하지만 언젠가 제 얼굴을 TV에서 보게 될 거예요, 사장님. 그땐 저를 픽업하려고 해도 늦어요. 유튜브에 들어가면 제 동영상도 보실 수 있어요. 춤추고 노래하는.......
- 너 또 왕 구라치는구나. 그 습관 언제 버릴래.
언제 왔는지 뚱뚱한 여자가 다가와 학생에게 핀잔을 준다. 삼십대 중반 쯤 되어 보이는 그녀는 바지 차림에 굽이 거의 없는 구두를 신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작은 키는 아니다.
- 부원장님, 완전 구라는 아니죠.
- 시끄러워, 어서 청소나 해.
- 안녕하세요.
월인은 부원장이라는 여자에게 인사를 하고 급히 원장님을 볼일이 있어서 왔다고 꼭 만나야 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 글쎄요, 제가 도와 드릴 수 없을 것 같은데요.
-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은 없었나요?
- 뭐, 말씀을 안 하시진 않았지만....... 누가 찾아온다는 말씀은 없으셨는데. 급한 일이면 원장님께서 전화하실 거예요.
부원장은 학생만큼도 정보를 주지 않는다. 경계하는 눈빛이다.
- 부원장님도 모르고 계실걸요.
학생이 걸레질 하다말고 돌아서서 말한다.
- 야, 너. 입 안 다물어.
부원장은 버럭 소리를 지른다.
- 아시면 가르쳐드리세요. 서울 기획사 사장님이신데요. 슈트 입으신 거 보세요. 제냐 거예요. 밖에 벤츠 세워놓은 거 안 보셨어요. 사장님 차예요. 그렇죠? 사장님.
학생은 조금도 기죽지 않는다.
- 아, 응 그래.
월인은 어물쩍 대답한다. 자신의 차이긴 하니까.
- 어머, 그러셨어요. 진작 말씀하시죠?
갑자기 부원장의 태도가 부드러워진다.
- 뭐, 소개할 기회를 주시지 않으니........
월인은 부정하지 않고 얼버무린다.
- 아, 죄송해요. 전 대학교에서 실용음악을 가르치는 양희경이라고 해요.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게 갑자기 오셨어요.
- 약속했는데 그 친구가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전화도 꺼져 있고. 물론 약속 시간보다 제가 두어 시간 일찍 오긴 했습니다만.
생각지도 않았는데 거짓말이 술술 나온다.
- 원장님 앨범 때문에 오신 거예요?
- 예, 뭐.
- 원장님이 정신이 워낙 없으세요.
- 에이, 무슨 영감이 떠올랐나 보죠? 요즘 잔뜩 우울해 있었거든요. 예술가적인 비애죠.
- 너너, 쓸데없는 소리 자꾸 하면.......
- 정선 어디로 가신다고 하셨나요? 그쪽으로 가실 계획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무슨 캠핑장이라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어딘지 알면 제가 가면서 만나 뵙고 바로 서울로 올라가면 하는데.
월인은 넘겨짚어 본다.
- 죄송해서 어쩌나. 그냥 정선이라고만 하셨지 구체적으로 어디라고 말씀은 안 하셨어요. 그리고 사실은 저도 오늘 아침에야 전화 받고 알았어요. 갑자기 떠나고 싶어 간다고........
- 아, 예.
- 늦어도 화요일이나 수요일엔 돌아오실 텐데. 어쩌죠. 원장님이 전화를 해야만 통화를 할 수 있어요. 원장님 집 떠나면 전화 꺼놓는 거 아주 얄미워요, 저희도.
-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얄밉군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자동차 시동을 켜고 스마트폰을 확인해 보니까 부재중 전화가 와 있다. 장모다. 아무래도 사실대로 말해야 할 것 같다. 월인은 망설이다가 전화를 한다.
-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서 전화했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장 서방.
전화를 받자마자 장모가 먼저 묻는다.
-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천강 씨가 없어서 찾으러 나왔습니다. 아마 여행을 간 것 같아요.
- 기타 선생인가 뭔가 하는 작자하곤가?
- 아직은 잘 모릅니다.
- 기어코, 그것이 참지 못하고 갔네.
-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까 염려 마세요.
-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이 무슨 소용인가. 다 끝났네, 이제.
- 걱정하지 마세요. 찾아서 데리고 갈게요.
- 참 자네 팔자도........
장모는 말을 잇지 못하고 전화를 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