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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그녀의 두번째 첫사랑
19. 그녀의 두 번째 첫사랑
by
이세벽
Oct 9. 2022
아래로
산 위에 떠 있던 달이 어느 새 호두나무 가까이에 와 있다.
달빛에 실하게 익어가고 있는 호두를 청솔모가 훔쳐가지 못하게 지키고 있는 건 투다.
투는 자기 집에 들어가지 않고 호두나무 아래 엎드려 있다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나도 사납게 짖으며 달려간다.
그러다 언젠가 청솔모 한 마리를 물고 온 적이 있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월인이 올해는 투 덕에 호두를 좀 딸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데 천강의 방문이 열린다.
- 잠이 안 와요. 커피 한 잔 마시려고요.
월인이 뒤돌아보자 천강은 말한다. 애써 명랑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천강의 얼굴엔 금방 소나기라도 퍼부을 듯 한 얼굴이다.
- 내가 타 줄까요? 잠이 안 올 땐 커피보단 녹차가 좋아요.
잠이 안 온다면서 커피를 마시려 하는 것도 그렇지만 날이 지날수록 꽃그늘이 짙어지는 게 더 걱정이다.
자신이 천강에게 선택받기 전에 쓰러져 눕는 건 아닐지.
- 커피가 마시고 싶어요. 2층에서. 냉커피로, 얼음 갈아 넣고. 한잔 가득 주세요.
천강은 실내화를 끌면서 2층으로 올라간다.
- 잠이 안 온다면서…….
- 어차피 잠을 못 잘 것 같아요.
월인은 커피를 타서 얼음을 갈아 넣고 천강이 좋아하는 곶감도 몇 개 꺼내 쟁반에 담는다.
천강은 2층 거실 창가에 다가서서 어둠 속에 엎드린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다.
- 며칠째 제대로 잠을 못 잤었어요.
천강은 급히 눈물을 감추고 소파에 앉는다.
- 내일 병원에 다녀올까요?
월인은 천강의 눈물을 못 본 척 태연하게 대한다.
- 병원은요. 원인을 제가 아는데요. 이건 다른 병이에요. 마음의 병....... 내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아요. 그 어두운 구멍은 끝이 보이지 않고....... 나를 집어삼키려고 해요.
- .......
월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달리 뭐라 위로할 수 있는 말이 없다.
- 아저씨....... 아저씨, 저 그 남자가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아요.
웃음 띤 얼굴로 월인을 바라보던 천강은, 그러나 갑자기 흐느낀다. 그러다가 아예 엎드려 엉엉 소리 내어 운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엎드려 울고 있는 천강은 영락없이 실연당한 소녀다. 월인은 가슴이 먹먹해져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얼마쯤 울다가 허리를 편 천강은 결심한 듯 단숨에 커피를 벌컥벌컥 마신다. 그리고 연이어 게걸스럽게 곶감하나를 다 먹어 치운다.
과장된 식탐으로 마음의 고통, 아니 결별의 아픔을 잠깐이라도 잊어보려는 것일까.
- 그 나쁜 놈이 뭐랬는지 아세요. 자기는 복잡한 거 딱 싫대요. 그래서 내가 뭘 그렇게 복잡하게 했냐고 했더니........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는 여자하고 연애하는 거 자기 체질이 아니래요.
자기는 총각인데 유부녀하고 만나고 싶겠냐고.
기억하든 못하든 당신이 유부녀인 게, 그게 현실이라고.
사실은 지금까지 내가 아픈 것 같아서 받아줬다. 하지만 앞으로는 더는 못 받아준다.
이러는데 자존심 상해서 죽어버리고 싶었어요.
그 나쁜 놈이 저한테 충고까지 하는 거예요.
기억에 없다고 결혼한 유부녀가 그러면 되겠느냐고, 남편과 자식도 생각하라고.
그래서 너무 속상하고 자존심 상해서 잊어주겠다고 했는데, 그게 맘대로 잘 안 돼요.
그리고는 또다시 엉엉 운다.
어머니 칠순잔치 때 공개적으로 한 말과 내용은 같지만 좀 더 구체적이다.
월인은 그 기타선생이라는 남자가 또다시 고맙다.
- 아저씨, 저랑 섹스할래요?
천강은 눈물을 훔치면서 월인을 바라보고 웃는다. 월인은 당황스러워서 대답을 못한다.
천강이 천강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바라던 일인가. 천강을 부둥켜안고 뜨거워지고 싶었다. 아니 지금이라도 그러고 싶다.
천강의 몸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세포 하나하나를 세듯이 어루만지면, 천강을 친친 동여맨 기억 상실의 사슬이 마술처럼 풀릴 것 같다.
그런데 왜 선뜻 천강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지 못할까.
이 어색함, 이 민망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래 하자. 이 한마디면 되는데, 그 말이 제 무게를 못 이겨 저 발바닥 아래로 처박히고 만다.
- 맘에 없는 사람하고 관계를 해서는 안 돼요. 천강 씨한테 큰 상처를 남길 수도 있어요.
월인은 천강의 손을 붙잡고 침대로 가는 대신 충고를 던진다.
천강이 아닌 천강의 사랑, 지금 앞에 서 있는 이 도발적인 여자의 사랑을 얻을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무엇보다 지금 천강에게 나는 모르는 아저씨일 뿐인데. 천강이 아무하고나 섹스하도록 하고 싶지는 않다.
그 아무나가 나일지라도.
차라리 사랑에 빠진 그 남자하고 사랑하게 하는 게 낫지.
- 천강씬 나를 사랑하지도 않잖아요.
월인은 걷잡을 수 없이 달려드는 생각들을 떨쳐내고 천강을 바라본다. 어쩔 수 없이 배어나는 안타까움을 월인도 느낀다.
- 그 나쁜 놈을 잊고 싶어요.
- 시간이 지나야죠. 모든 일에는 시간이 필요해요.
-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들어지니까 그렇죠.
- 죽을 만큼 아프고 나면 차츰 내리막길이 와요.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다 그래요. 미움도 고통도 끝이 있기 마련이죠.
나한테 행운이 있어서 그다음에 찾아오는 또 다른 사랑이, 천강 씨 사랑이 나였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천강 씨가 원해도 망설이지 않을게요.
- 저한테 사랑을 기대하지는 마세요. 그럴 수 있었다면 진작에 했겠죠.
천강은 씁쓸하게 웃는다.
-.......
월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 아저씨, 망치 좀 찾아주세요.
천강이 먹던 곶감을 집어던지고는 벌떡 일어난다. 갑작스런 천강의 태도에 월인은 어리둥절하다.
- 아저씬 그냥 계세요. 제가 찾을게요. 창고에 있죠?
천강은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뒤돌아보며 말한다.
- 내가 꺼내 줄게요. 뭐 하려고 그래요.
- 기타를 부숴버릴 거예요.
천강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기타를 가지고 나온다. 월인은 난감하다. 말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망치를 내어줄 수도 없다.
- 들어가 계세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천강은 정원 등을 환하게 켜고 밖으로 나간다.
- 내가 가져올게요. 기다려요. 하지만 기타를 부순다고 달라지진 않을 거예요. 아까 말했듯이 시간이 필요해요. 많은 시간이........
- 내가 먼저 말라 죽을 거예요.
천강은 막무가내다.
- 알았어요. 가져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요.
어쩔 수 없이 월인은 천강을 세워놓고 정원을 가로질러 창고로 간다.
창고에서 망치를 찾아 나오는데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천강이 투를 부르며 길가로 달려나가고 있다.
어쩐지 다급하고 심상찮은 느낌이다. 그제야 월인도 꼬리를 치며 달려왔어야 할 투가 안 보인다는 걸 깨닫는다.
천강의 모습이 사라지고 난 뒤다. 외마디 비명이 들려온다. 천강의 목소리다. 그리고 동시에 기타를 땅바닥에 내리치는 소리가 난다.
달려가 보니 길바닥에 투가 널브러져 있다.
저만치 가로등 불빛 아래는 재욱이 키우는 어쩌면 진돗개일지 모르는 황구가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그 자세가 어찌나 무덤덤한지 조금 전에 투의 목덜미를 잔인하게 물어뜯은 개라는 생각이 안 든다.
녀석이 평소에도 사납게 짖거나 으르렁대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다. 지금도 황구는 흥분한 기색조차 내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섬뜩할 정도로 위협적이다.
황구가 슬그머니 시선을 거두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제야 월인은 쪼그려 앉아 투의 상태를 살펴본다. 목덜미에서 피가 흥건히 묻어난다. 사지가 늘어져 있고 맥박이 뛰지 않는다.
- 죽은 것 같습니다. 묻어 주고 들어갈 테니까 천강 씨는 들어가세요.
월인이 천강을 등 떠미는데 언제 나왔는지 장모와 해주가 다가오다가 죽은 투를 보고 놀라서 우뚝 멈춰 선다.
해주는 망치를 들고 있는 월인을 바라보며 겁에 질린 얼굴이다.
- 아빠가 죽였어요?
해주가 울먹이며 묻는다. 장모는 아니라는 듯 달래는 손짓으로 해주의 어깨를 끌어당겨 감싸 안는다.
- 아니야, 해주야. 개들끼리 싸웠어. 윗집 개가 그러는 걸 엄마가 보고 달려가서 기타로 쫓았는데 너무 늦은 것 같구나.
월인은 망치를 뒤로 감추고 서둘러 변명한다.
해주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월인은 천강과 해주를 정원으로 밀어내다시피 한다. 정원까지 밀려난 천강은 망가진 기타를 정원석에 툭툭 치며 울분을 삭인다.
해주는 천강의 허리에 얼굴을 파묻고 운다.
월인은 장모가 가져다준 하얀 수건으로 투를 감싼다.
- 도도해서 죽은 거야. 겁도 없이 저보다 몇 배는 더 큰 개한테 대드니 이런 꼴을 당하지. 괜히 서울서 데려왔어.
장모가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모른다.
월인은 투가 늘 엎드려 있던 호두나무 근처에 땅을 파고 묻는다. 작은 봉분을 만들면서 보니까 언제 왔는지 해주가 곁에 서 있다.
- 내일 호두나무에 이름표를 해 걸자.
월인이 봉분 위에 나뭇가지를 세우면서 말한다. 해주는 고개를 끄덕인다.
정원을 둘러보아도 천강은 보이지 않는다.
장모가 해주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고 월인은 괜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달이 호두나무 꼭대기에 걸려 있다. 이제 달빛 머금은 호두들은 온전히 청솔모의 차지가 될 것이다.
- 장 서방, 은진이가 안 보이는데.
집으로 들어갔던 장모가 다시 나오더니 소리친다.
- 2층에 올라가 보셨어요?
- 집 안에는 없는 것 같네. 해주 말로는 집으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 산책하러 갔나!
월인은 혼잣말을 하며 길 쪽을 굽어본다.
남쪽 길에는 가로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불을 밝히고 있어 배나무밭과 공방에 가려진 곳 말고는 길이 훤히 보인다. 그러나 그 길에는 천강은 물론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 기타만 여기 있네.
장모의 말을 듣고 보니까 정원석 옆에 부서진 기타가 쓰러져 있다.
북쪽 산 아랫길은 황토집을 지나면서부터는 암흑천지다.
월인은 무작정 그쪽으로 달려간다.
천강 씨, 천강 씨, 불러보지만 대답이 없다. 월인은 중간쯤 가다가 돌아선다. 어둠에 적응되고 나니까 시야가 트여 어둠 속이라도 보이긴 보이는데 그 길에도 사람의 흔적은 없다.
월인은 장모를 안심시켜놓고 차를 몰고 나간다. 호반로를 달리면서 상향등을 켜고 눈으로 길 먼 곳까지 빠르게 훑어보지만 천강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울타리 너머 자전거 길도 텅 비어 있다. 혹시 집안 어디에 있는 건 아니었을까. 아니 어쩌면 뒷집에 가서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뒷집할머니는 주인 없는 개한테 밥을 준 죄밖에 없는데.
보복하려고 개를 찾으러 갔나?
별의별 생각이 드는 건 그사이 여기까지 걸어오기엔 거리가 너무 멀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월인은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편도 2차 선이지만 갓길이 거의 없는 좁은 도로인 데다 커브가 계속되어서 차를 돌리기가 여의치 않다. 거기다 갑자기 반대차선으로 차들이 연이어 달려오고 있다.
차를 돌릴 기회를 보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읍내까지 거의 다 와간다. 결국 읍내 입구 사거리 신호등 앞에서 차를 돌린다.
핸들을 꺾어 유턴하면서 라이트 불빛을 따라 읍내 방향을 쳐다보는데 길 중간에 여자가 등을 보인 채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월인은 급히 방향을 바꾸어 그쪽으로 내달린다. 라이트 불빛 속에 들어온 여자는 천강이다.
시간이 얼마 안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그사이 벌써 여기까지 와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월인이 조심스럽게 옆으로 다가가도 천강은 한눈팔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만 나아간다.
월인은 공사 중인 곳에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린다. 그제야 천강은 놀라서 월인을 바라본다.
-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세요? 이 시간에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천강은 손등으로 눈두덩을 훔친다. 월인은 비로소 천강이 울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 무섭지 않았어요? 내가 데려다줄게요. 어딜 가는지 말해 보세요.
- 아저씨! 그 남자 좀 죽여주세요.
천강은 울음을 터트리며 풀썩 주저앉는다.
- 이젠 전화도 안 받아요. 만나서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 지금 그 남자 죽이러 가는 길이에요, 그럼.
- 예, 안 그러면 내가 죽을 것 같아요.
- 내가 대신 죽여줄게요.
- 그래 주세요. 아저씨, 부탁이에요.
- 그 남자가 어디에 있는지, 갑시다. 차에 타세요.
월인은 먼저 장모에게 전화를 걸어 천강을 찾았다고 걱정하지 말고 주무시라고 전한다.
천강을 태우고 읍사무소 문화센터로 간다. 읍사무소 1층 현관만 불이 켜져 있고 다른 곳은 불이 꺼져 깜깜하다. 문화센터로 쓰는 3층도 마찬가지다.
- 그 사람은 청주에 있어요. 청주에 그 사람이 운영하는 음악학원이 있어요.
감회에 젖은 듯 어둠 속에 서 있는 건물을 바라보던 천강은 이윽고 혼잣말처럼 내뱉는다.
- 밤인데 찾아갈 수 있어요?
- 예, 찾기 쉬워요.
- 그럼 가봅시다.
- 청주 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음악학원 간판이 보여요. 간판 옆에는 그 사람이 공연하던 사진도 걸려 있고요. 가수예요, 그 남자. 몇 년 전에 가요제에서 대상 받았대요.
국도로 접어들자 천강의 목소리가 한결 밝아진다.
- 노래를 잘하겠군요.
- 그게 웃겨요. 노래는 정말 못하는 거 같아요.
천강은 웃는다. 천강은 그 남자에게로 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모양이다.
- 노래 못하는 가수군요.
- 그걸 그 남자도 인정해요. 노래도 못 부르는데 어떻게 대상을 받았는지 모르겠다고. 정말 우습죠.
- 예, 재밌네요.
청주 쪽으로 십여 분 달렸을 때부터 우측으로 상가 건물이 나오고 간간이 간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음악학원 간판이 나온 것은 청주 시내에 거의 다 와서다.
천강의 말처럼 간판 옆에는 공연 중인 남자의 사진이 걸려 있고 그 사진 위로 서치라이트 불빛이 쏟아져 내린다.
여느 간판하고 달리 휘황하단 느낌이 드는 그 간판에는 그 남자의 이름인 듯한 글자가 엘이디 조명 위에 새겨져 있다. 김현수 음악학원 이렇게.
간판 위에 작은 글씨로 실용음악, 기타, 드럼, 작곡, 색소폰, 입시 전문 등등의 글도 보인다.
그 남자의 공연 사진 아래에는 가요제에서 수상한 경력이 적혀 있다. 길을 끼고 첫 신호등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첫 번째 상가 골목에서 또다시 오른쪽으로 꺾어서 진입한다.
- 여기서 다시 꺾어요.
천강은 급히 오른쪽으로 꺾으라고 말한다. 천강의 기억이 아주 명료하다는 생각이 든다.
상실 이후의 기억들은 흰 도화지에 쓴 검은 글씨처럼 잘 보이는 모양이다.
기억이 돌아오면 다시 지워진다는데 이렇게 또렷해도 되는 건지. 정말로 지워지기나 할는지.
오른쪽으로 꺾어서 직진하니까 음악학원 건물 앞쪽이 나온다. 늦은 시간인데도 음악학원 입구엔 불빛이 환하다.
- 어때요, 내가 죽일까요. 아니면 천강 씨가 죽일래요.
- 내가 죽일게요.
천강은 발로 자동차 문을 밀어내면서 환하게 웃는다. 어쨌거나 위안이 되는 모양이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다.
로비에만 환하게 불이 켜져 있고 복도는 불이 꺼져 있다. 수업이 끝난 것 같은 분위기다.
천강은 복도 쪽을 한 번 바라보더니 맞은편 방문을 연다. 원장실이다.
- 천강 씨! 지금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어린 여자의 비명소리와 동시에 당황한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월인이 뒤에서 보니까 남자와 여자가 부둥켜안고 있다가 놀라서 물러앉는 중이다. 테이블 위에는 마시다 만 맥주와 맥주가 반쯤 담긴 잔과 땅콩과 마른오징어 따위가 널브러져 있다.
천강은 말없이 다가가서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병을 들어 남자에게 휘두른다.
옆에 앉아 있던 어린 여자가 악, 하고 비명을 지른다.
숙희의 말대로 기타 선생의 애인으로 보이는 여자는 스무 살 안팎의 어린 나이다.
천강의 무릎에 테이블이 밀리면서 맥주잔이 엎어지고 병이 넘어진다.
- 진정하세요. 천강 씨!
남자가 천강의 손목을 잡고 맥주병을 빼앗는다.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는 침착한 목소리다.
하얀 와이셔츠에 빨간 넥타이를 맨 말끔한 남자의 모습은 예술가답지 않고 회사원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직은 미소년 같은 앳된 얼굴이다.
일어났는데 키도 180센티는 훨씬 넘을 듯하고 몸도 군더더기 없이 날렵해 보인다.
월인은 순간 질투심마저 느낀다. 그렇지만 숙희의 말대로 천강의 상대가 되기에는 어리다.
- 이 여자, 미친 거 아냐. 오빠, 이 여자 알아?
어린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내뱉는다.
- 말조심해. 나이도 어린 게 어디라 대고 말을 함부로 해.
남자는 어린 여자를 꾸짖는다.
- 뭐야, 오빠. 이 여자랑 잤어!
어린 여자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직선적이다.
- 야, 너 나가.
남자는 도리어 어린 자기 애인을 내쫓는다.
- 그래, 어쩐지 수상하다 했다. 미친 새끼야. 이런 늙다리한테 반해서 그렇게 힘들어했냐. 씨바랄 조ㅈ......
남자가 어린 여자의 뺨을 갈겨버린다. 어린 여자는 휘청거리며 의자 위로 넘어진다.
월인은 천강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걸 본다.
어린 여자는 핸드백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핸드백으로 남자의 가슴을 힘껏 내리치고는 잘 먹고 잘살아라. 개새끼야, 내뱉고는 나가버린다.
어린 여자가 학원 출입문을 구둣발로 쾅 차면서 밖으로 나가는 걸 확인한 천강은 남자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흥, 하면서 돌아선다. 마치 사랑놀이에 빠진 어린 소녀 같은 행동이다.
하긴 맥주병을 들어 휘두르는 것도 천강의 모습은 아니다.
- 안녕하세요.
그 남자는 그제야 어색하게나마 월인에게 인사를 건넨다.
- 미안합니다. 내가 천강 씨 남편입니다.
- 아, 예. 숙희 씨에게 말씀 들었습니다.
남자는 의외로 공손하다.
- 아시겠지만 제 아내가 많이 아픕니다.
- 예, 잘 알고 있습니다.
- 제 아내 때문에 애인하고 오해가 생겼습니다.
- 저야, 괜찮습니다.
- 아무튼, 죄송합니다. 오늘 일은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월인이 사과하는데도 남자는 거듭 괜찮다며 도리어 미안해한다.
돌아오는 내내 천강은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은 채 말이 없다가 집에 도착할 무렵 또 소리 없이 울고 있다.
사랑은 이렇게 아픈 것인가. 천강은 그 남자 김현수하고 얼마만큼 멀어지면 저절로 눈물이 나는가 보다, 생각이 들어 월인은 월인대로 아프고 고통스럽다.
오래전, 천강은 월인이 첫사랑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김현수는 천강에게 두 번째 첫사랑이 되는 것이다.
천강이 아닌 천강에게는 또다시 첫사랑이겠지만.
- 이젠 모든 게 끝났어요.
천강은 어느 새 울음을 그치고 어색하게 웃고 있다.
- 괜찮겠어요.
이대로라면 천강이 괜찮지 않을 거라고 월인은 생각한다.
- 잊을 거예요. 전부다.
천강은 아랫입술을 깨문다.
월인의 눈에는 일그러졌다 펴지는 천강의 그 붉은 입술이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맹세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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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과 단편 소설을 씁니다. 종종 시도 씁니다. 때로는 노래도 만들고(작사,작곡, 편곡) 있습니다. 필요하면 그림도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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