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그녀의 두번째 첫사랑

18. 선 긋기

by 이세벽

주방에서 천강이 아침 식탁을 차리고 있다.


놀란 월인은 벽시계를 쳐다본다. 월인이 보통 때보다 늦게 나온 건 아니다.


천강이 머릿수건을 두르고 앞치마까지 한 것이 단단히 작정하고 시작한 모양이다. 표정에서도 그렇지만 몸짓 하나하나에서 전에 없는 결의가 느껴진다.


그녀는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분주하게 오가며 음식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사고 전에도 하지 않던 일이다.


음식을 만드느라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인 건 언제나 월인의 몫이었다.


월인은 어쩐지 천강의 부지런함조차 사고의 후유증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인다.

내게로 돌아와주기만 한다면 천강이 다른 사람이어도 상관이 없으리라.

월인은 타인이 되어버린 천강에게 예의를 갖춰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새롭게 교제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호감을 얻어야 한다고 월인은 생각한다.


천강이 좋아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러나 천강이 예의바른 사람을 좋아할지 아니면 씩씩한 사람을 좋아할지 몰라 막연하다.


- 내가 할게요.


월인이 부러 경쾌하게 외친다.


예의도 바르고 씩씩하게 하려는 것인데 천강이 놀라거나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나 않을지 걱정된다.


- 아니에요. 오늘부터는 제가 아침밥을 차릴게요. 아니 주방일 하고 집 안 청소는 제가 할게요.

제가 이 집 식구인 건 분명한데, 아무것도 생각 안 난다는 핑계로 마냥 아무 일도 안 하고 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이 집에서 나가기 전까지만이라도 앞으로는 제 몫을 할게요.


다행히 차분하고 똑 부러지는 말투다.


사고 전 천강에게서는 느낄 수 없던 다른 인성이 스며 있는 건 분명하지만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여자의 자기 주장이다.


그것이 오히려 월인을 불안하게 한다.

- 무엇보다 제가 혼자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야 아저씨도 마음이 놓일 거 아니에요.


저한테 감정이 없고 기억나는 게 없다고 해도 아저씨는 제 남편이라면서요.


그걸 인정할 수는 없지만, 아마 깨어난다고 해도 돌이키기 어려울 것 같지만, 어쨌든 아저씨를 힘들게 하고 싶진 않아요.


저 때문에 아저씨가 불안해하는 것도 싫고요. 제가 혼자 살 수 있다는 걸 알면 아저씨도 마음 놓이실 거 잖아요.


아닌 게 아니라 천강은 또다시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그러니까 지금 천강은 진짜 선긋기에 나선 것이다.


월인과 자신 사이의 선을 분명하게 그으려는 것이다.


- .......


월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마음은 뭐라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입가에 웃음까지 내건다.


- 죄송하지만 전 아저씨에게 정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아요.


아저씨가 고맙고 믿음직스럽긴 하지만 기타 선생에게 느끼는 것 같은 그런 사랑은 정말 눈곱만큼도 없어요. 이해해주세요.


- 그럼요. 그걸 천강 씨가 어쩌지 못한다는 거 다 아니까.


월인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천강을 바라본다.


천강의 씩씩한 행동하고는 달리 눈가에 진 꽃그늘은 어제보다 짙고 푸르딩딩하다.


가슴의 멍이 얼마나 크고 깊어야 저렇게 눈두덩이까지 푸른 멍이 번지는 건지.......


월인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다.


- 천강 씨가 다른 인격체라는 거 받아들이고 인정할게요.


그러니까 천강 씨가 건강하기만 하다면 천강 씨가 기억 없이 새로 시작할 수 있을 만큼 모든 게 정상적이기만 하다면 천강 씨의 인생을 시작해야 한다고 믿어요.


누구도 기억에도 없는 과거로 천강 씨를 억지로 돌려보내지 못해요. 불가능한 거잖아요.


월인은 자신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주저함이 없다.


마음에 없다고 억지를 부려서도 안 되고 또 억지를 부린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으리라.


그런데 월인이 천강의 선 긋기에 이토록 자신이 넘치는 건 천강이 기타 선생에게 선 긋기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천강 스스로도 재차 밝혔고 숙희에게도 전해 들었다.


기타 선생이 사랑은 아니라고 했다고. 자신은 좋은 기타 선생이고 싶다고. 그리고 자기에게는 애인이 있고 천강에게도 이미 남편이 있고 가정이 있다며 천강을 설득하고 달래더라는 것.


그 때문이겠지만 천강의 얼굴에 드리운 꽃그늘이 차라리 애처롭다.


월인 자신은 천강 때문에 멍들고 천강은 또 다른 남자 때문에 멍드는,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이 또 애처롭다.

천강은 밤새 얼마나 운 것인지, 아니면 눈 한번 못 붙인 것인지 알 수 없다.


- 내가 도울 건 없어요?


메마르고 건조한 기억 상실 속으로 물기처럼 촉촉하게 스민 사랑을 버리는 일이 천강에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월인은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는 천강의 아픔은 고스란히 전해온다.


이제는 스스로 버려야만 하는 사랑, 그 아픈 남자를 천강은 아예 잊을 수 있을지.


그래 주면 고마울 텐데, 싶기도 하다가 또 다른 사랑이 자신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마저 든다.


천강의 새로운 사랑, 또 다른 사랑이 자신이기를.......


- 아저씨, 오늘은 그냥 지켜봐 주세요.


천강은 된장찌개에 넣을 두부를 썰다가 월인을 쳐다보고 해쓱하게 웃는다. 농축된 아픔이 배어나는 웃음이다.

도마 위에는 미리 썰어놓은 호박과 양파, 버섯 따위가 소복이 쌓여 있다.


천강은 조심스럽게 천천히 두부를 자른다.


월인은 칼을 쥔 천강의 왼손과 두부를 잡고 있는 천강의 오른 손을 바라본다. 손등에는 실핏줄이 도드라져 있다.


사고 전에 천강은 밥을 짓거나 요리를 만드는 일에는 관심도 취미도 감각도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월인의 생일상을 차릴 때도 요리책을 펼쳐놓고 레시피를 거듭 읽어가며 음식을 만들곤 했었다.

그래서 천강이 만든 음식은 맛도 모양도 어딘지 요리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미식가에겐 환영받지 못할지 모르지만 생일상으로서는 꽤 감동적이었다.


울산 어머니가 입원해 계시는 동안에도 천강은 요리책과 인터넷 등에서 많은 레시피를 보고 음식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퇴원한 후로는 다시 요리와 멀어져 버렸다.


그렇듯 요리는 천강에게 언제나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이었다.


가령 콩나물을 무칠 때 월인 같으면 양을 눈으로 파악하고 손대중으로 소금을 넣어 대개 한두 번에 간을 맞추는 반면 천강은 콩나물 무게를 재고 거기에 따라 숟가락으로 개량을 해서 소금을 넣어야 하는 그런 형국이다.

천강에겐 요리가 그만큼 어렵고 까다로운 작업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천강은 익숙하게 계란찜을 하고 된장찌개를 끓여낸다. 그리고 밥 한 공기를 푸고 그 옆에 수저와 젓가락을 놓는다.


그러고 보면 동수의 말처럼 긍정적인 변화도 있는 것이라고 월인은 생각한다.


- 지금 해주하고 함께 식사하시겠어요?


천강은 마침내 다 차려진 식탁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난 듯 월인을 쳐다본다.


- 아뇨, 전 기다렸다가 어머니와 함께 먹겠습니다.


- 그러세요, 그럼.


- 음식 만드는 거 어렵지 않아요?


월인이 묻는다.


- 어려울 게 뭐 있어요. 늘 먹던 음식인데요. 전 원래부터 요리를 잘했던 것 같아요. 하나도 어렵지 않거든요.

천강은 말하다가 입술을 깨문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다.


- 실은 그 남자 때문에 이것저것 레시피들을 머릿속에 외워뒀어요.


겨우 울음을 삼킨 천강이 다시 입가에 웃음을 띠고 말한다.


- 그 남자의 아내가 되면 뭘 만들어줄까 생각하다가 문득 제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는 걸 알았죠. 그래서 된장찌개, 계란말이, 김치찌개 같은 손쉬운 음식들 하는 법을 외웠죠. 하지만 이제 다 쓸모가 없게 되었네요.

천강은 감정을 삭이느라 후, 하고 한숨처럼 웃음을 내뱉는다. 하지만 천강의 눈가가 촉촉이 젖는다.


- 아, 그랬군요.


월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천강의 꽃그늘을 바라본다. 할 수만 있다면 위로라도 해주고 싶다.


- 아니다, 이젠 가족을 위해서 더 많은 레시피를 외워야겠네요. 해보니까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데요, 뭐.

천강은 애써 명랑한 척이다.


- 아저씬, 해주 학교 데려다주고 와서 다시 차려드릴게요.


천강은 잰 걸음으로 가서 해주 방문을 연다. 학교 갈 준비를 마친 해주는 할머니와 함께 나오려다가 천강과 마주친다.


- 해주야, 엄마가 밥상 차려 놨어. 어서 가서 먹자.


- 아빠가 아니고, 엄마가?


- 그럼. 할머니는 조금 있다가 아저씨랑 드세요. 제가 해주 학교 데려다주고 와서 차려 드릴게요.


- 네가 밥을 했어?


- 그렇다니까요.


- 정말인가? 장 서방.


- 예, 어머님, 제가 나오니까 벌써 주방에 나와서 밥하고 있더라고요.


- 엄마, 맛있게 먹겠습니다.


식탁 앞에 앉은 해주가 큰소리로 외친다.


- 반찬은 장 서방이 했겠지.


- 아니에요, 어머님. 오늘 아침 반찬은 천강 씨가 다 한 거예요. 된장찌개하고 계란말이도 천강 씨 솜씨고요.

- 엄마, 맛있어요.


해주가 말한다.


- 그래!


장모는 수저를 들어 된장찌개 맛을 본다.


- 어때요?


천강이 묻는다.


- 응, 괜찮다. 맛있어. 장 서방이 끓인 것만은 못하지만.


- 아저씬 요리사잖아요.


- 은진아, 장 서방은 요리사가 아니야. 장 서방은 말이다. 명문대 나온 검사 출신이란다. 변호사 자격증이 있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변호사 사무실도 낼 수 있다, 장 서방은.


요리사는 그냥 취미로 시작한 거야. 어찌 보면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주다 보니까 요리를 더 많이 하게 된 건지도 몰라.


너는 결혼해서 음식 한 번 안 해봤어. 장 서방이 다 했지. 그걸 네가 꼭 알았으면 좋겠다.


천강은 새삼 놀랍다는 듯 월인의 얼굴을 쳐다보고 웃는다.


- 물론 그런 점보다는 네가 전에 더없이 좋아하던 사람이다.


- 아저씨가 좋은 사람이란 건 저도 알아요. 그렇지 않다면 저한테 이렇게 오랫동안 참을 수 있었겠어요. 제가 억지를 부려도 다 받아주시고…….


- 그래그래, 이제 네가 정신이 드나보다.


- 아저씨 덕택이에요. 소풍에서 약속했으니까 가족이 되려고 노력할 거예요.


- 그래 고맙다, 은진아. 네가 듣기 싫어하는 말인 줄 알지만........


사실 너도 장 서방하고 매일 매일 얼굴 보며 살겠다고, 잘 다니던 무역회사 그만두고 여기까지 온 거야.


장 서방도 너하고 매일매일 얼굴 보며 살겠다고 변호사 일 그만두고 여기까지 와서 식당 하는 거고.


처음엔 무슨 애들 장난 같아서 화도 나고 걱정도 많이 했다. 하지만 네가 복이 있어서 다행히 식당도 잘된다.

- 네, 그랬군요.


어쩐 일로 천강은 발끈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은진아. 해주 밥 먹는 동안에 거실에 가서 잠깐 이야기하자.


장모는 천강의 손목을 잡고 앞서간다. 천강은 순순히 따라간다.


월인은 두 사람이 주방에서 나가는 걸 보고 해주 앞에 마주 앉는다. 하지만 청각은 거실 쪽으로 곤두서있다.

- 네 말대로 엄마가 엄마 같지 않고 생판 남 같아서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게 황당하게 여겨진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장모는 거실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에도 말을 멈추지 않는다.


- 너는 기억에 없으니까 엄마를 엄마라고 여기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엄마는 네가 내 딸인 걸 알고 있고,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으니 나는 엄마로서 할 도리를 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너나 나나 서로 억지를 부릴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 같구나. 너는 기억에 없어서 엄마가 억지스럽게 보이고 나는 기억이 있어서 네가 억지스럽게 보이는 거 아니겠니.


그래서 하는 말인데 기필코 네가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면 엄마는 너를 따라 갈 거다. 설혹 네가 싫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엄마는 너를 혼자 보낼 수 없다. 네가 멀쩡하다고 해도 남편, 자식 두고 혼자 따로 산다는 거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성치 않은 몸으로 혼자 나가서 산다고 하는데 어찌 엄마로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니.

- 저도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봤어요.


천강은 장모 옆에 나란히 앉는다.


- 얼마간이라도 혼자 지내면서 제 자신을 돌아보려고요. 해주만 저하고 함께 가게 해주세요.


- 그건 안 된다. 넌 아픈 사람이야. 집 두고 혼자 산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어.


- 이곳은 저한테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다고 자꾸 강요하는 것 같아요.


- 누가 너한테 강요한다고 그러니.


- 이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저한테 그걸 강요해요. 심지어, 사진들이며 화분까지 모두다. 그게 저로서는 가장 힘들어요.


천강은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다.


- 사실 전 아무것도 잃어버린 게 없어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만약 제가 기억을 잃어버린 게 확실하다면 말이에요. 기다려주세요.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언젠가 그것을 깨닫게 되든지, 무슨 변화가 생길 거잖아요.


핏줄인데도 어떻게 이렇게 당기는 구석조차 없겠어요.


- 너는 나 보고 기다려 달라고, 그냥 지켜봐달라고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다. 너도 없는 이집에서 내가 장 서방하고 무슨 명분으로 함께 지낸다는 말이냐.


그렇다고 어미 된 도리로서 나 몰라라 하고 서울로 가버릴 수도 없으니, 너를 따라가는 게 옳다.


너를 혼자 가게 내버려 둔다면 앞으로 내가 어떻게 너의 엄마라고 말할 수 있겠니. 엄마가 따라가는 게 싫거든 얼마간 더 그냥 이 집에서 견뎌 봐라.


엄마는 너를 혼자는 안 보낼 테니까 엄마를 데려가든 이 집에 그냥 있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장모는 완강하다.


천강은 한숨을 푹 쉬고 만다.


- 만약 꼭 집을 나가야겠고, 엄마를 엄마라고 하는 게 정 싫으면 가정부 아줌마라고 생각해도 좋다.


네 말대로 이 할머니가 가정부로 따라간다고 생각해라. 이사를 가지 않고 여기 산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엄마를 엄마라고 생각하지 말고 새로 들어온 가정부라고 생각해라. 그러면 안 되겠니, 은진아.


장모는 목이 멘다.


장모의 말을 듣고 있는 천강은 어쩐지 괴로운 표정이더니 고개를 쳐들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낸다.


- 해주를 데려간다는 것도 그렇다. 해주는 맘이 편하겠니. 아빠 따로 엄마 따로 헤어져 사는데, 너한테 가자면 아빠가 걸릴 테고, 아빠한테 있자면 엄마가 걸릴 것이다.


왜 어린 맘에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하는 거니. 해주도 상처가 많은 아이라는 걸 너는 알아야 한다.


그건 기억에 있건 없건 상관없이 네가 해주를 딸로 받아들이기로 했으니까 지금부터라도 가슴에 새겨두어야만 하는 것이다.


해주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되었고 입양 기관을 통해 우리 곁에 오게 되었다.


바로 네가 해주를 선택했으니 배 아파 낳은 아이보다 더 큰 책임감으로 양육해야 마땅하다.


기억이 없다고 해도 네 말대로 생각은 멀쩡하다니까 하는 말이다.


천강은 아무래도 주방에 있는 해주가 듣는 게 마음에 걸리는 눈치다. 확연히 성숙해진 천강의 모습이다.


- 걱정할 거 없다. 해주는 나이가 어려도 자기가 처한 운명이랄지 그런 걸 잘 아는 아이다. 그리고 쉬쉬한다고 해도 또 드러내놓고 말한다고 해도 조금도 그것에 마음 쓰거나 위축되는 아이가 아니다. 네가 복이 있어 해주를 만났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천강은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 그리고 내 무식한 생각에도 좀 멀어졌다뿐이지 인간은 어차피 모두가 혈육이다. 그러니 니 새끼 내 새끼 가릴 것도 없겠지만 멀어진 혈육을 마음 가까이 품으려면 그만한 노력과 희생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부모 된 도리로서 자식을 배려하는 게 바른 생각이다.


- 해주는 기억과 상관없이 이젠 제 딸이에요.


천강은 휴지로 콧물을 닦아내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 그러니까 이사하지 말고 여기서 살자는 말이다. 또 한 가지, 네 기억과 상관없이 가슴 속 깊이 담아두어야 할 일이 있다. 이것도 네가 이성이 있다고 하니까 하는 말이다.


너를 판단력도 없는 바보 천치로만 생각하고 대화를 시도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늦었지만 너한테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말씀해 보세요.


- 너를 위해서, 너의 앞날을 생각해서 엄마가 당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행히 네가 좋아했다던 그 남자가 먼저 정신을 차린 모양이긴 하지만 앞으로는 절대로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두지 마라.


네 기억에 없다고 해도 너는 엄연히 남편이 있고 자식이 있는 몸이다. 그것을 가슴에 새겨 두고 잊으면 안 된다. 이것은 기억에 있건 없건 엄연한 사실이다.


천강은 생각만으로도 괴로운 듯 고개를 떨어뜨린다.


- 너는 몰라서 그렇지, 너희 부부는 여느 부부와 달리 유별나게 금실이 좋았다. 너도 네 남편을 네 몸처럼 아끼고 사랑했고 네 남편 역시 너한테 그랬다.


그러니 기억에 없다고 함부로 마음을 줬다가는 이다음에, 네 기억이 돌아오고 나면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 지금 기억에 없다고 다른 사람한테 마음을 주고 나면 나중에 기억이 돌아온 뒤에 네 목숨을 끊을지 모른다 이 말이다.


은진아, 넌 그런 사람이었어. 어렸을 때부터 순결하고 정숙하고 지혜롭고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아이였지. 그런 네가 죽고 못 살던 사람을 배신했다는 걸 알면 살아갈 수 있겠니!


- 그런데 왜 제 마음속엔 아저씨가 없는지, 아저씨를 봐도 아무런 감정이 없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 집에 사는 게 더 고통스럽고요.


천강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낮은 목소리로 하소연한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월인은 생각한다. 천강의 눈물도 꽃그늘도 그리고 또한 자신의 불면증도.



한사코 마을버스를 타고 다니겠다 고집하던 해주가 오늘은 순순히 천강의 손에 이끌리어 승용차에 오른다.

장모의 말처럼 해주는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잘 아는 아이다.


투는 오랫동안 자동차가 멀어지는 걸 바라보다 저만치 커브를 돌 때쯤 풀이 죽어 돌아선다. 월인이 사료를 한 움큼 쏟아주어도 시큰둥하다.


멍하니 서서 먼 데를 바라보던 투가 슬쩍 월인을 올려다본다. 그러고는 또다시 먼 데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무척 서운하고 외로워 보인다.


월인이 집으로 향하자 투는 돌아서서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컹, 하고 한 번 짖는다. 거실 창으로 내다보니까 투는 천천히 정원을 가로질러 가다가 생각난 듯 뒤를 돌아본다.


투는 언제나 호두나무 그늘에 엎드려 해주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다 방문객이 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짖을 때도 있고 산에서 내려온 뱀을 잡을 때도 있다.


그러나 투는 무엇보다 동네 개들이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지키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월인은 동네 개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영역에 집착하는 투가 늘 안타깝다.


투가 호두나무 그늘로 들어가 엎드리는 걸 확인한 월인은 주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천강이 장모와 이야기하느라 미처 치우지 못한 그릇들을 주섬주섬 개수대로 옮긴다.




금방 해주가 돌아올 시간이 된다. 아이들에겐 꽤 긴 시간이겠지만 집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는 어른들에겐 몇 시간이 눈 깜박할 새에 훌쩍 흘러가 버리는 것 같다.


천강은 거실 창밖으로 마을 길을 내려다보고 있다. 해주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엄마, 마을버스 타고 다닐게요. 아이들 보기에도 미안하고 선생님들께도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등굣길에 해주가 그런 말을 했다며 천강은 해주를 대견스러워한다. 하지만 이제 막 어른이 된 어린 엄마가 어른 흉내를 내는 것 같아 어딘지 부자연스럽다.


그렇지만 해주를 기다리는 천강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親친이라는 한자가 저절로 떠오른다.


중학교 국어시간에 선생님은 타지로 나간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나무 위에 올라서서 동구 밖을 살펴보는 부모의 마음이 친할 친이라고 가르쳐주었다.


선생님의 설명이 재미있어서 월인은 잊지 않고 기억한다. 월인은 해주가 천강의 친딸이, 마음의 친딸이 되었으면 한다.


천강은 동구 밖 버스 정류장까지 나가서 기다리다 마을버스에서 내린 해주를 으스러져라 껴안고 한바탕 소란을 떤다.


- 엄마랑 함께 샤워하고 나와서 맛있는 거 먹자.


천강이 해주를 앞세워 욕실로 향한다. 해주는 아직 샤워할 시간이 아니지만 싫다 소리 않고 천강을 따라 들어간다. 천강과 해주, 엄마와 딸 둘이 함께 샤워한다.


해주의 숙제를 도와준 후에는 종종 해주의 손을 잡고 마을 길을 산책한다. 가끔은 대청호 옆 자전거 길에서 둘이 함께 자전거를 타고 놀기도 한다.


하지만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어도 천강의 얼굴엔 여전히 결별의 상처가 남긴 꽃그늘이 선명하다.


밤에도 천강은 종종 해주를 이 층에 데리고 올라가서 시간을 보낸다. 해주는 곧잘 천강의 기타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혹은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동구 밖 과수원 길........


누군가를 버리는 일은 누군가로 채우는 일인 것처럼 천강은 날마다, 매 시간 해주에게 마음을 쏟는다.


그것만이 꽃그늘에서 벗어나는 방법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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