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그녀의 두번째 첫사랑

17. 그녀의 너무 아픈 사랑

by 이세벽

월인이 먼저 집을 나서는데 버드나무 가지 위에 걸린 스피커에서 이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아아, 지는 이장 전광석이구먼유. 마을 주민 여러분께 한 가지 알려 드릴 게 있어서 마이크를 잡았시유.

아아, 읍내 ‘소풍’에서 금일 12시에 우리 마을 주민 여러분께 점심을 대접하기로 했으니께 속을 비워가지고 있다가 많이 잡수시고 오시기를 바라마지 않어유.


그리고 이장으로서 당부 말씀 한 가지 드리겠시유. 거, 뭐시냐. 이런 말하면 괜한 자격지심으로 삐치는 사람이 간혹 있는디유, 그러지 마셔유. 지는 공직자로서 공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니께유.


흠흠, 누구 할 것 없이 그런데 가서 음식을 너무 많이 싸가지고 오지 마셔유. 민폐도 민폐지만, 우리 마을 챙피잖어유. 그 자리서 배부르게 드시고 빈손으로 나오는 것이 가장 신사답잖어유. 협조 부탁드려유. 그리고 말여유. 말이 나온 김에 말씀 드리것는디유.......

한 번 마이크를 잡으면 이장의 사설은 길어진다.


월인은 이장의 방송을 뒤로 하고 호반로로 진입한다.



소풍 현관 앞에는 벌써 화환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다. 월인은 아무에게도 알린 사람이 없다. 형과 동생의 지인들이 보낸 것일 것이다.


월인이 동철에게 전화를 거는데 송현이 대리가 나와서 인사를 한다. 뒤이어 희진 부장도 물 묻은 손을 닦으며 급히 나온다.


동철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 어젯밤에 셰프님 하고 룸에서 식사하셨던 분이 따로 단체석 예약하셨어요.


부장 희진은 송현이 대리가 들어가는 뒷모습을 쳐다본다.

- 형이요?


- 저한테 소개하지 않으셨으니까 누구신지 모르지만 그분이....... 서울에서 손님이 오실 거라고 그러셨어요. 모르셨던 거예요, 셰프님.


- 가족 모임으로 하자고 했는데, 형 나름대로 계획이 있나 봅니다.


- 그분이 주신 명함을 보니까 장 씨던데요. 셰프님 성함도 모르느냐고 핀잔 들었어요, 어제. 사모님, 아니 사장님 성함이야 사업자등록증에도 있고 포스 영수증에서 매일 보니까 알고 있지만.


- 아,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 괜찮아요, 셰프님. 저희들한테는 셰프님이면 돼요. 그런데 어제 같은 경우엔 좀 당황됐을 뿐이에요. 그분이 좀 짓궂게 캐물었어요. 나쁜 뜻이 아니고, 재미있으신 분이라고요.


- 형은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월인은 악의 없이 내뱉는다.


- 국장님이시던데요! 국장이면 이사관급아니신가요? 엄청 높으신 분이라는 걸 현이가 인터넷 검색해보고 알았어요. 저도 개인적으로 셰프님 어머님 칠순을 축하드려요. 좋은 날 되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 고맙습니다, 부장님. 늘 부장님께 신세를 지는군요.


- 당연히 제가 할 일인데요. 그런데 이건 제 개인적인 궁금증인데, 셰프님 전직이 무슨 대장 내시경하시는 분이셨어요! 이사관님께서 대화 중에 장검사, 장검사 그랬다면서요.


희진 부장은 짐짓 시치미를 떼고 새침한 표정이다.


- 부장님, 너무 썰렁합니다.


월인이 말하자 희진 부장은 손바닥을 치며 어린아이처럼 크게 웃는다.


- 제 평생에 이렇게 높으신 분들을 직접 뵙는 건 처음이에요. 너무너무 기분이 좋아요, 사실.


희진 부장의 말에 월인도 흐뭇하게 웃는다.



어머니와 장모가 나란히 들어오고 동수와 선숙이 뒤를 따라온다. 그리고 잠시 후 조카 혜미와 혜진이 그리고 천강과 해주가 손을 잡고 들어온다.


천강의 다른 손에는 기타가 들려 있다.


두리번거리던 천강은 월인을 보고 인사를 한다. 꽤 반가운 얼굴이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엔 여전히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 언니가 할머니를 위해서 연주를 하실 거예요, 아빠.


월인이 묻지 않았는데도 해주가 알려준다.


- 우리도 축가 준비했어요, 작은 아빠.


혜진이도 자랑스럽다.


- 언니가 반주해준댔어요.


혜미가 다 안다는 듯 월인을 보고 눈을 찡긋한다.


울산 형수가 들어오는 바람에 월인은 그쪽으로 간다. 형수 옆엔 키가 크고 말쑥하게 생긴 고등학생 조카 진철과 중학생 조카 진수도 서 있다.


월인은 형수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한다. 형이 일을 크게 벌였다는 것. 그러나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어떻게 알게 된 사람들이 서로서로 연락해서 그렇게 되어버린 거라고 동철이 한 변명을 그대로 옮긴다.

천강은 아직 사람을 못 알아보니까 아는 체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노파심에서 일러놓는다.


천강은 자신의 기억에 없는 사람이 자기를 아는 척하는 걸 가장 못 견뎌한다고, 아마도 그로 인해 자신이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에 빠져드는 걸 지독하게 싫어하는 것이라고 설명까지 덧붙인다.


형수는 손님들과 마주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철을 발견하고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는다.

- 형수가 서울로 다시 가세요.


월인이 농담처럼 말하자 형수는 코웃음을 친다.


- 서울에 있으나 울산에 있으나 다를 게 하나도 없어요.


- 그래도 아이들하고 함께 계셔야죠.


- 아이들도 저를 외롭게 하기는 마찬가지예요, 서방님.


월인은 괜히 다 큰 조카들을 나무라보지만 형수에게 위로가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장모가 마을사람들을 자리로 안내하고 있다.


월인은 달려나가서 삼삼오오 무리 지어 들어오고 있는 마을주민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넨다.


한복을 차려입은 숙희가 월인을 보고 반갑게 웃는다. 화장을 하고 머리까지 올려 묶은 숙희의 모습이 낯설다.

- 아이고 사장님 얼굴이 많이 상했네.


뒷집할머니, 포도밭집 남자 등 마을주민들이 월인의 손을 잡고 한결같이 내뱉는 소리다.


밴드 마스터로 보이는 남자의 사회로 어머니 칠순 기념행사가 시작된다.


그 남자는 유명 방송사의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고 있는 밴드의 리더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 말이 진실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남자의 한마디에 폭소를 터트리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한다.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그 남자는 꽤 우스갯소리를 잘한다.


월인은 계획하지도 생각지도 못한 행사가 그렇게 무르익어간다. 동철의 계획인지 아니면 동수의 생각인지 월인은 알지 못한다.


밴드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무명 가수와 댄서들을 동원한 건 동수의 방식이라고 월인은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동수는 엔터테인먼트사를 경영하는 친구가 있고 연예계 쪽에도 아는 사람이 많다.


울산에 있는 자동차 공장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회사를 차렸는데 언제 그런 궁리를 하고 서울을 왕래하는지 때론 불가사의하다.


형식적인 식순이 간단히 치러지고 천강의 기타반주에 맞춰 혜진이 혜미 그리고 해주의 축가 '즐거운 나의 집'이 이어진다.


천강은 간간이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능숙하게 반주한다.


하지만 천강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는 짙은 그늘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월인은 자신만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환영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돌아본다.


사람들은 그저 대견하게 노래를 듣고 있다.


그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서 천강은 '참새와 허수아비'를 부른다. 노래를 모르는 아이들은 몸짓과 고갯짓으로 노래를 따라 부른다.


천강이 노래를 부르다 목이 메여 잠시 흐트러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무대로 집중된다.


축하해야 할 자리가 잠시 숙연해진다.


천강의 노래가 끝났을 때다. 동수가 손가락 휘파람을 불고 앙코르를 외친다. 그 바람에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다시 고조된다.


사람들도 덩달아 앙코르를 연호한다. 하지만 천강은 못들은 것처럼 기타를 들고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천강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월인은 본다.


여흥이 시작된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한복을 차려입은 여자가 윤수일의 아파트를 부르며 춤을 춘다. 일명 막춤이다. 그러나 보통이 넘는 몸짓이다.


갑자기 천강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간다. 월인은 천강을 붙잡으려다가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잠자코 두고 본다.


천강의 노래를 한번 들었던 터라 사람들은 기대에 차서 천강을 바라본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해주가 바짝 붙어서 따라 나간다.


요즘 들어 스스로 천강의 보호자를 자청하는 해주다.


천강은 잠시 머뭇머뭇 춤추는 여자를 곁눈질하다가 한쪽 팔을 너울 파도처럼 흔든다. 다른 팔도 연이어 너울 파도처럼 흔든다.


천강의 몸짓은 점차 빠르고 격렬해진다.


밴드 마스터가 해주의 팔을 잡고 전자 오르간 쪽으로 데리고 간다. 천강은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흔들고 어깨를 들썩이고 허리를 바람처럼 나풀대고 다리를 강물처럼 출렁출렁 내딛는다.


춤이다. 천강이 춤을 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춤이지만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춤사위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천강의 몸에서 호수의 안개처럼 자욱하게 뿜어져 나온다.


월인은 여태껏 천강이 춤추는 걸 본적이 없다. 그런데도 천강은 마치 깃발처럼 펄럭펄럭 춤을 춘다. 때론 바람개비 같다.


어느 순간엔 여울 같다가도 무섭게 삼키는 소용돌이처럼 아연 긴장시키는 천강의 춤은 춤 아닌 다른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좌석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와 박수가 터져 나온다. 그런데 보니까 장모는 소리 없이 울고 있고 어머니는 탄식을 내뱉는다.


- 천강이가 언제 저래 춤을 배웠노. 춤추는 모습이 예쁘기는 하지만 적응이 잘 안 된다. 천강이가 완전히 달라졌다. 사람이 저래 달라질 수도 있는기가. 그래도 우야노 장 검사 자네가 잘 돌봐야지.


체념한 듯한 어머니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월인은 자리에 일어나서 바깥으로 나온다.



조각난 햇볕이 유리 파편처럼 가슴에 박힌다. 햇볕의 파편들이 박힌 자리마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겁더니 끊어질 듯 아프다.


천강은 천강이 아니다. 성품이 아주 바뀔 수도 있습니다. 의사의 말이 환청처럼 들려온다. 월인은 또 한 번 천강이 천강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래도 천강은 천강이다. 천강이 아닌 천강 탓에 월인은 표류하는 난파선 같은 속울음을 씹어 삼킨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천강이 기타를 들고 앉아서 핑거링을 하고 있다. 해주가 옆에 서서 천강의 어깨를 어루만진다.


해주는 천강에게 다시 선택을 받은 것이 확실해 보인다.


- 사람들은 제가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천강은 말을 해놓고 한참을 핑거링만 한다.


- 형, 형수 노래 듣고 놀랬다.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동수가 월인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시늉이다.


- 형수 가수로 데뷔시키자. 내가 형수 매니저 할게.


- 쓸데없는 소리 잘하는 건 여전하다.


- 저런 목소리면 대박 난다. 얼굴 예쁘지, 몸매도 늘씬하고 키도 크지, 완벽하잖아.


- 형수는 환자야. 그리고 이제 곧 사십대고.


- 요새 나이는 상관없다. 그리고 환자는 뭐. 억눌렸던 끼를 발산하니까 보기 좋고 만. 사고가 나쁜 것만은 아니네. 긍정적인 측면도 있잖아.


긍정적 측면이라니. 월인은 뭐라 대꾸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 아무튼 형, 잘 생각해봐.


동수는 월인의 어깨를 툭 치고 선숙 있는 쪽으로 돌아간다.


동철은 서울서 온 손님들을 대접하느라 분주하다.


울산 형수는 혼자 외롭게 앉아서 음식을 깨작이며 천강을 바라보고 있다. 그쪽으로밖에 시선 둘 곳이 없다는 듯 무대를 벗어난 시선은 어딘지 허둥댄다.


조카들은 무대의 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희희낙락 자기들끼리 모여 즐겁다.


- 오늘 아침, 어머니라고 하시는 분이 저에게 그러더군요. 내가 너를 낳은 어미다. 그분은 늘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제게 어머니가 계시겠죠.


결혼했다면 남편도 있을 테고, 어쩌면 아이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분들이 타인처럼 낯설 뿐입니다. 아무런 감정도 없고, 오히려 그분들이 불편합니다. 왜 그런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딸이라고 하고 아내라고 하고 그리고 친구라고 하면 기억할 수 없는 저는 바보가 된 것 같고, 우울해져요........


나는 상대방이 누군지 모르는데,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서 내가 니 엄마다, 내가 너를 낳았으니 나는 너한테 이래라 저래라 말할 자격이 있다, 그런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떤 기분일지.......


여기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이 아이는 제 딸이라고 합니다. 아니, 제 딸입니다. 제가 낳았든 낳지 않았든 그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억에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이 아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부터 이 아이를 제 딸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옆에 서 있던 해주가 엄마, 라고 낮게 부른다. 천강은 앉은 채로 해주의 팔을 당겨 포옹하고 등을 쓰다듬어 준다.


- 제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저는 노력할 겁니다.........

천강은 눈시울을 붉힌다.


- 여기 계신 분들이 저의 부모이고 남편이고 그리고, 가족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위해 애쓸 겁니다. 제 안에 있는 그리움을 좇다 보면 오늘 해주에게 다가선 것처럼 언젠가 그분들에게 다가가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더라도 인정해주셨으면 합니다. 지금은 그것이 저의 감정이고 현실이니까요.


천강은 천천히 코드를 바꿔가며 핑거링을 한다. 핑거링이 어쩐지 불안하다. 코드가 바뀔 때 느려지기도 한다.

- 불행히도 제가 사랑하던 한 사람이 떠나려 합니다. 그 사람마저 제 기억에도 없는 일들을 핑계로 냉정하게 돌아서려 합니다. 기억에도 없는 남편과 아이를 핑계로 말입니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아픔입니다. 어쩌면 그 사랑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윽고 천강은 자리에 일어선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다.


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새와 작별하듯 ~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천강의 목소리는 애절하고 스트로크는 경쾌하다. 자신의 기타 스트로크에 맞춰 춤추듯 몸을 흔들며 전신으로 노래를 부른다. 그렇지만 표정도 가볍게 흔드는 몸짓도 모두 슬픔이다.


천강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은 이별의 상처가 남긴 꽃그늘이다. 월인은 혼자 생각으로 씁쓸하고 다행스럽다.

- 가수로 데뷔시키자.


동수는 월인과 눈이 마주치자 입술 모양으로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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