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그녀의 두번째 첫사랑

4. 피고와 검사의 재회

by 이세벽

현관문 밖에는 뜻밖에도 산꼭대기집 남자 재욱이 서 있다. 재욱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 보기는 처음인데 어쩐지 그가 낯익다.


재욱은 노동일을 하는 사람답지 않게 체격은 왜소하고 얼굴은 하얗다. 아마 겨울 내내 일이 없었는지 모른다.


외모만 봐서는 그가 아내에게 손찌검이나 하고 아무 데서나 욕지거릴 퍼붓는 사람 같지는 않다. 말쑥하게 양복을 빼 입고 있어서 그런지 면사무소 직원 같은 느낌마저 든다.

아무리 두툼한 양복이라고 해도 외투를 걸치지 않고 다니기에는 추운 날씨인데 재욱의 얼굴에 추운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월인은 그가 따뜻한 실내에 있다가 금방 나왔다는 걸 깨닫는다.

아마도 이 마을에서 가장 덥게 사는, 장모의 말대로라면 기름을 펑펑 때는, 뒷집 할머니 집에 앉았다가 온 모양이다.


월인은 무뚝뚝한 재욱의 얼굴에서 이렇게 불쑥 찾아온 이유를 읽을 수 없다. 하긴 용건이 있을 리 없다. 혹시 뒤늦게 병문안이라도 온 것일까.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래도 이웃이니까.

그다지 반갑지는 않지만 월인은 재욱을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아니 어물쩍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기도 했다. 어쨌거나 구면이고 마을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읍내에서 건 어디서 건 마주치면 모른 척하고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이 남의 집에 처음 오면 쭈뼛거리거나 둘레둘레 하는 것과는 달리 재욱은 곧바로 소파로 가서 앉는다. 월인이 뒤늦게 앉으라고 권하는 꼴이다.

재욱은 으레 하는 인사나 소개를 과감히 생략해 버리고 자기 이야기를 꺼낸다. 월인은 그제야 재욱이 긴장한 탓에 표정이 굳어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재욱은 이 마을에 온 뒤부터 막노동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처지라고 했다. 그리고 그 말이 자신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곧이어 운이 따라주지 못해서 오늘날 요 모양으로 살고 있지만 한때 전국 규모의 교육 출판 사업을 했을 정도로 머리도 비상하고 아는 것도 많고 손재주도 좋은, 한마디로 재주 많은 놈 빌어먹는다는 그 속담이 자신에게 딱 들어맞는 그런 경우의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마을 사람들과 교류가 없는 월인이지만 재욱의 사람 됨됨이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뒷집에서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곤 하던 장모가 틈틈이 심심풀이 땅콩으로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재욱도 숙희 내외와 마찬가지로 몇 해 전 비어 있던 산꼭대기 집으로 이사를 온 외지 사람이다. 그런 그를 뒷집할머니가 재욱을 양자 삼았다.


뒷집할머니의 양자 삼는 절차는 간단하다. 오늘부터 너는 내 딸이여. 아니면 오늘부터 너는 내 아들이니께 그리 알아. 이렇게 뒷집할머니의 선언이면 족한 것이다.

아무튼 뒷집할머니가 재욱에게 농사 지어먹으라고 제법 넓은 고추밭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재욱은 고추는 따 보지도 못하고 모조리 말려 죽였고, 그 뒤로 다시는 농사일 따위는 하려고 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생계를 위해 노동일을 하러 다녔다. 하지만 그것도 말 뿐이지 일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더 많았다. 재욱의 아내 역시 읍내에 있는 식당에 다니다가 그만두기를 반복해왔다. 한 곳에서 오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재욱이가 찾아와 술주정과 행패를 일삼기 때문이었다.

참다못한 그의 아내는 종종 집을 나가서 몇 달씩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재욱은 끈질기게 처갓집을 드나들며 장모를 설득하는 한편 아내 있는 곳을 알아내서 결국은 집으로 데리고 돌아오곤 했다.

이 모든 정보를 종합하면 재욱은 개망나니라는 말에 꼭 적합한 인물이다. 그러나 지금 월인 앞에 앉아 있는 재욱에게서 그런 개망나니 같은 흔적이나 조짐은 찾아볼 수 없다. 헛소문이었나 싶을 정도로 재욱의 표정은 그늘 한 점 없이 환하고 입가에 걸린 웃음도 해맑다.


- 사실은 어머니-재욱도 숙희처럼 뒷집할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른다.-께서 장작 좀 패주라고 잔소릴 해대서 왔습니다.

재욱은 비로소 오지랖 넓은 뒷집할머니가 채근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오게 되었음을 밝힌다.


벽난로를 들여다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월인은 예비로 예닐곱 개 사다 놓은 톱날을 다 망가트려 놓고도 모자라 정원석에 걸터앉아 줄로 톱날을 갈아댄 적이 있었다. 하지만 톱날을 일껏 갈아서 써 봐도 참나무장작 두어 개 정도도 토막 내지 못하고 다시 망가졌다. 설명서대로 줄질을 해도 톱날이 제대로 서지 않았던 것이다.


장모의 입을 통했든 어쨌든 월인이 톱질도 못하고 장작도 못 팬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졌던 것이 틀림없다. 한 번 퍼진 소문은 그대로 굳어버리기 십상이다.


비록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딸에게 전적으로 지원을 받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어려운 사정을 외면할 줄 모르는 뒷집할머니가 남의 딱한 사정을 듣고 가만있을 리 없었다. 뒷집할머니는 재욱을 볼 때마다 가서 톱질을 해주라고 닦달하곤 했던 모양이다.


- 엔진 톱을 사용할 때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자칫하면 어깨나 발이 날아가는 수가 있습니다. 겁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병신 된 사람이 더러 있어요.

재욱의 말투는 사뭇 진지하다.


- 아, 예.

월인은 인터넷에서 본 사진들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사고로 크게 부상당한 사람들의 사진을 보고 겁이 나서 전기톱 구매를 망설이긴 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새삼스레 겁을 먹을 일은 아니다.

- 도끼질도 만만하게 보시면 안 됩니다. 그런 일은 하던 사람이나 하는 거지.


- 조심하고 있습니다.


- 이 정도 난방하려면 장작 소비가 장난이 아닐 텐데요. 기름보일러는 일체 때지 않는다면서요.

- 제 아내가 건조한 기름보일러 난방을 싫어해서 벽난로에만 의지하다 보니 좀 많이 들긴 합니다.

월인은 천강의 방문을 슬쩍 바라본다. 낮잠을 자러 들어간 지 꽤 지났지만 천강은 아직 기척이 없다.

- 어머니께서 가보라고 성화를 부려서 오긴 왔지만, 형씨를 보니까 마음이 짠합니다. 부인, 선생님 때문에 형씨가 많이 힘들어 보입니다. 전보다 얼굴이 많이 상했어요. 형씨라고 불러도 괜찮겠죠. 사장이라는 호칭은 너무 정감이 없어서.


- 그야 뭐, 편하신 대로 하세요.


- 뭐 내가 돈 받겠다고 이러는 건 아닙니다. 돈을 바란다면 오지도 않았겠죠.

그래 놓고 재욱은 다시 자기 이야기를 한다.


- 사실은 제가 징역을 좀 오래 살았습니다.

의외의 고백이다. 재욱의 얼굴에 분노가 스치는 것을 월인은 놓치지 않는다.


-........

월인은 뭐라고 대꾸할지 몰라 그냥 고개만 끄덕인다.

- 제가 죽기 전에 꼭 죽이고 싶은 사람이 둘 있습니다.


-........

월인은 재욱의 농담이 섬뜩하고 불쾌하다. 하지만 억지로 웃음 지어 보인다.


- 하나는 친구고 또 하나는 검사입니다.

재욱의 얼굴에 살기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가는 걸 월인은 놓치지 않는다.

- 서울에서 교육 출판 사업을 하다가 실패해서 사채도 많이 쓰고....... 한마디로 상당히 어려웠죠. 돈 떨어지니까 친구라는 놈도 결국 저를 배신하더라고요. 친구란 놈이 저 살자고 나를 죽인 거죠. 제 사업체가 전부 그 새끼 손으로 넘어가고.......


-.......


- 저를 배신한 친구를 죽이려고 칼을 품고 다녔습니다. 진짜 칼 말입니다.


-.......


- 그러나 막상 얼굴을 보니까 죽이진 못하겠더라고요. 칼을 휘둘러 친구가 크게 다치고 피를 많이 흘리긴 했지만 치명적이진 않았습니다. 내가 죽이려고 했다면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놈 심장을 못 겨눴겠습니까.

재욱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목청을 높인다.


-.......


- 경찰에서도 살인미수 의견으로 송치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애송이 검사 새끼가 공명심에 사로잡혀 나를 살인미수로 기소를 해버렸지 뭡니까. 내 친구가 경찰이었는데 그놈이 봐줬다고 생각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그럴 수는 없잖아요.


-.......


- 그 검사 새끼가 다 이해한다며 가증스런 표정으로 저를 달래는 바람에....... 죽일 맘으로 칼을 품고 다녔다고 진술한 것이 빌미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설마 제가 살인미수죄로 기소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 교활한 검사 새끼 때문에 길어야 1년 조금 넘게 살 걸 무려 6년이나 살고 나왔습니다. 살인을 계획한 건 맞지만 안 죽였는데.......

- 그 검사 이름이 뭡니까?

월인은 궁금증과 어떤 우려를 동시에 느낀다.

- 그 개새끼.

그러나 재욱은 얼른 이름을 대지 않고 씹듯이 욕을 뱉어낸다.


-......


- 장동혁, 그 개새끼 내가 언젠가 찾아내서 죽일 겁니다.


-........

월인은 속으로 신음을 삼킨다.


재욱이 내뱉은 이름은 뜻밖에도 월인 자신의 이름이다. 월인은 비로소 재욱이 낯익었던 이유를 깨닫는다. 못 알아볼 정도로 살이 많이 빠졌지만 눈매며 콧날에서 오래전 검사실에서 마주했던 살인미수범의 모습을 본다.

그때 그는 사나웠고 반성하는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자신의 말대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위험해 보였고 출소하면 다시 살인을 시도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의 말과 기소 내용은 조금 다르다. 술을 마시다가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친구를 향해 느닷없이 칼을 뽑아 든 건 맞지만 그 자리서 친구를 찌르진 못했다.

재욱은 친구가 달아나는 걸 쫓아가서 찔렀다. 첫 번째 칼은 친구의 등에 깊은 상처를 냈다. 피해자는 죽을힘을 다해 저항했으나 온 몸 여기저기 칼에 찔려 결국 쓰러졌다.


출동한 경찰이 재욱을 체포했을 당시 그는 피해자를 깔고 앉아 있었고 피해자는 사력을 다해 두 손으로 칼을 움켜쥔 상태였다.


그러나 재욱은 친구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걸 듣고 정신이 돌아와서 살인을 포기했다고 주장했다. 경찰이 도착해서 그를 제지하지 않았더라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재욱의 주장이 경찰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어쩌면 그의 친구라던 경찰이 안타까운 마음에 그랬을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검찰에 송치된 뒤로도 재욱은 아예 처음부터 살의가 없었다고 우겼다. 그러나 그의 진술은 별 의미가 없었다.

월인의 인간적인 대접에 어느 정도 감화된 그가 살의를 고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결정적으로 살인미수로 보게 한 것도 아니었다. 모든 정황이 살인미수를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어리석게도 재욱은 법정에서 조차 부인으로 일관했다. 덕분에 판사는 반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검사의 구형보다 더 높은 형량을 선고했다. 이른바 올려치기 당한 것이다.


재욱은 항소심에서도 감형받지 못했다.


그런 그를, 아니 자신이 기소한 피의자를 이웃으로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게다가 언제 적 일인데 아직까지 검사한테 원한을 품고 있다니.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그와 이웃으로 살아가야 하다니. 월인은 어이없어 그저 헛웃음만 나온다.


- 선생님, 안녕하세요.

재욱이 자리에 일어나서 꾸벅 인사를 한다. 하지만 방문을 열고 나오려던 천강은 얼른 다시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린다.

- 허참, 사람을 못 알아보시는 게 분명하네요. 예전 같으면 길에서 만나도 반갑게 인사하시던 분인데.

재욱은 동정 어린 시선으로 월인을 바라보다가 전기톱과 도끼를 내달라며 일어난다.

재욱은 기필코 나무 몇 토막이라도 자르고 가겠다는 결의를 보인다. 월인이 그럴 것 없다고 만들어놓은 장작만도 아직 많다며 만류해도 소용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월인은 재욱과 함께 창고로 가서 문을 연다. 재욱은 손에 들고 있던 양복을 문고리에 걸어두고 뒤따라 들어온다.


어둠 속으로 먼저 발을 들여놓은 월인이 불을 켜자 창고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장작더미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닥엔 톱밥이 수북이 쌓여 있다.


며칠 걸려 전기톱으로 참나무를 자르고 도끼로 팬 장작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월인도 흡족했었다. 한 달 정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은 양이다.


- 어이쿠, 많이 장만해놨시다. 이거 사람 사서 했어요?

재욱은 괜히 빈손바닥을 턴다.


- 내가 틈틈이 팼습니다. 이젠 톱날도 갈아 쓰고 장작도 수월하게 팹니다.

사실이다. 월인은 청주에 있는 공구상가에 나가서 톱날을 갈아오면서 줄로 톱날을 가는 법도 배워왔다.


물론 그 후로도 몇 번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지금은 공구상가에 가지 않고도 줄로 톱날을 직접 갈아 쓸 만큼 능숙해졌다. 뿐만 아니라 도끼질에도 이력이 붙어 단 번에 통나무가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횟수가 잦아졌다.


- 형씨가 한 거라고요? 보통 솜씨가 아닌데요. 보아하니 형씨는 나무 한 번 안 해 본 것 같은데,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나보다 났시다.


- 장작 패는 일이 운동되고 좋습니다.

월인은 그저 웃는다.


장작 패는 일이 귀찮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오히려 장작을 패고 나면 밥맛도 돌고 몸도 개운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월인은 뒷집할머니나 장모가 사서 고생을 한다며 만류해도 사람을 사서 맡길 생각이 없다.


- 어머니는 그것도 모르고 나한테 성화를 부리셔.

재욱은 문고리에 걸려 있던 양복을 다시 입는다.


- 하여튼 어머니 오지랖은 글로벌하다니까. 어쨌든 이 몸은 물러갑니다.


아무리 뒷집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왔다고는 해도 양복 입은 채로 남의 일 하러 온 그 답지 않게 얼굴에 서운함이 비친다. 술값이라도 벌어보려던 것이었을까, 월인은 그냥 돌려보내는 게 좀 미안한 생각이 든다.

- 나중에 시간 되면 저희 식당에 와서 좀 도와주시면 어떨까요? 거기서도 장작을 많이 때거든요.


- 말씀은 고맙지만 장작 패는 게 내 밥벌이는 아니올시다.

재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간다.


- 괜찮으시다면 사례는 미리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자존심 상해할까 봐 재욱의 등에 대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문득 겨울이라 일이 없어 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퍼뜩 스쳤던 것이다.

재욱은 뒤돌아보지 않고 가면서 오른손을 들어 흔든다.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으니 알 수 없지만 꽤나 여유 있는 손짓이고 거만한 뒷모습이다. 그렇지만 좁고 허름한 그의 어깨에 걸린 자존심이 굴러 떨어질 듯 위태롭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장편소설] 그녀의 두번째 첫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