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그녀의 두번째 첫사랑

5. 부지깽이

by 이세벽

거실은 싸늘하고 천강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다. 월인은 잠옷 위에 걸치고 있던 가운을 여미고 허리끈을 질끈 동여맨다.


지금쯤 천강은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손질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새벽에 깨는 건지 아니면 밤새 잠을 못 이룬 건지 알 수는 없다.


엊그제부터다.


천강은 멀리 떠날 사람처럼 성장을 한 채 방에서 나오곤 한다.


이젠 집에 데려다 달라 울며 애원하지 않고 스스로 집을 찾아 나설 작정을 할 만큼 자의식이 한층 더 강해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천강은 떠난다는 말을 못 하고, 아니 떠날 곳을 알지 못해 막막해하다가 다시 주저앉아 버리고 만다.


언젠가 그 모습 그대로 집을 나가버릴지 모를 것 같은 불안감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월인은 천강의 포기에 안도하였다.

하지만 천강은 전혀 다른 문제로 월인을 혼란에 빠트렸다.


천강이 월인을 세 사람으로 구분 짓고 있다는 걸 안 것도 처음 성장을 하고 나오던 아침이었다.


'밥하는 아저씨는 어디 갔어요?'

성장을 하고 나온 천강을 실망시키기 싫어 밖에 나가서 외식하자고 조심스럽게 제안을 했는데 천강이 생뚱맞은 얼굴로 그렇게 물어온 것이다.


월인은 얼른 대답을 못했다.

밥하는 아저씨가 누구일까 생각해보니 자신인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왜 그렇게 질문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운 건 월인이었다.


'장작 패는 아저씨도 통 안 오시는 것 같던데.......'


천강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순간 재욱이 떠올랐으나 그럴 리 없었다. 천강이 자신을 셋 어쩌면 그 이상의 존재로 구분지어서 각각 다른 사람으로 보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주방에서 밥하는 월인과 장작을 패는 월인을 전혀 다른 남자로 착각하고 있다는 걸 알고 나자 매번 그를 처음 보는 낯선 남자로 보는 듯한 그 눈빛이 이해가 되었다.


음식 배달 온 남자에 대한 기억은 사라져 버리고 없는 듯 월인을 향해 가끔 반가워하던 눈빛도 웃음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또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던 월인은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말했다.


난감해하는 건 의사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일 겁니다.' '어쨌든 나아지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의사는 그런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월인은 벽난로 앞으로 다가가서 손바닥을 대본다. 실미지근하다. 벽난로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다. 장작이 거의 다 타고 불씨조차 보이지 않는다.

잠들기 전에 참나무 장작을 넉넉하게 던져 넣고 바람구멍을 닫아두었지만 밤새 시나브로 타버린 모양이다.


같은 양의 나무 둥치를 던져놓아도 어떤 날은 아침까지 제법 불기운이 기승을 부리고 또 어떤 날은 일찌감치 타버리거나 채 절반도 타오르지 못하고 꺼져버린다.

벽난로 옆에 걸어둔 부지깽이로 타다 남은 잿더미를 들추자 잉걸불 하나가 갈라진 혀를 내민다.


남은 불씨는 월인이 다시 불을 피워야 하는 수고를 덜어준다.

일순 되살아난 불씨로 벽난로 안이 환하다.

시꺼멓게 그을린 벽난로 안은 아스라이 먼 우주 같고 타다 남은 나무와 잿더미는 마치 폐허의 혹성 같다.


간밤에 가속팽창하고 있는 우주의 모습을 실감 나게 보여 준 우주과학 다큐멘터리 영상 탓일 것이다. 월인은 혹성 위에 비스듬히 들러붙어 엄청난 속도로 수직 상승하는 꿈을 꾸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은 아득히 멀어졌고 새로운 별들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월인은 혹성을 부둥켜안은 채 떨어져 나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월인은 벽난로 안의 재를 아래로 긁어내리고 참나무 장작 몇 개를 잉걸불 위에 기대 놓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불의 혀가 참나무 장작을 핥기 시작한다.

'잿더미 속에 감추어진 기억의 불씨를 찾아내어 되살려주기만 한다면 굶주린 천강의 기억이 불의 혀처럼 일어날지 모르는 일인데....... 도대체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부지깽이는 무엇일까. 어쩌면 나 자신이 부지깽이가 아닐까. 그런데 어떻게 잿더미가 되어버린 천강의 기억 속으로 파고들지.'


금방 벽난로가 뜨거워진다.


월인은 생각난 듯 서재로 들어가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나오면서 '소풍'으로 전화를 한다.

저편으로 달려가고 있는 신호음이 들리기 시작하자 천강이 퇴원한 뒤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소풍'이 눈앞에 선하다.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언덕 위의 커다란 나무 아래 벤치가 놓여 있는 정원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삼백 삼십여 제곱미터 정도 되는 천장이 높은 거실이 나온다.

입구에는 카운터 겸 안내 데스크가 있다. 언제나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고 친절하게 계산해 주는 송현이 대리와 인사를 나누고 들어가면 거실 맞은편으로 한옥식 미닫이문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문 앞에는 걸터앉을 수 있는 넓이의 마루가 있다. 미닫이문을 열면 연회가 가능한 온돌방들이다. 방의 칸막이는 언제든지 붙였다 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거실 한쪽은 앉은뱅이 식탁이 놓여 있는 온돌방이고 나머지 절반은 원목식탁으로 채워져 있다.


우측 주방 옆 창가에 월인의 사무실이 조그맣게 있다. 그곳에 앉아 있으면 인공연못에 있는 물레방아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린다.


정원의 작은 연못엔 비단잉어들이 산다. 월인은 창문을 열고 잉어들에게 먹이를 주곤 했다.


사무실 쪽문을 열면 월인이 손수 설계하고 꾸민 주방이다.

유명 호텔 주방장들의 자문을 구하고 또 자신의 상상력을 보태서 주방을 설계했다. 비싼 식대를 지불해가며 천강과 함께 수많은 호텔과 주방을 견학하고 머릿속에 담아 온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천강이 한 번 본 것들을 정확하고 정밀하게, 심지어 벽지의 무늬며 몰딩의 생김새까지 단숨에 스케치해주었기 때문에 훨씬 수월하게 인테리어를 할 수 있었다.

월인은 '소풍'을 시작하기 전에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소풍의 주 메뉴인 간장게장뿐만 아니라 월인이 개발한 메뉴가 따로 준비되어 있어서 특별히 요리를 배워야 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월인은 한식에서 양식, 일식, 중식 등 어지간한 음식은 거의 다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요리를 따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그 세계를 좀 더 체계적으로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소풍'의 주 메뉴인 간장게장은 월인이 대학시절 외할머니에게 전수받은 것이다. 대학 다닐 때 집밥이 먹고 싶어지면 월인은 가끔 전철을 타고 제물포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 가곤 했다.

친구들까지 데리고 갑작스럽게 찾아가도 외할머니는 금방 진수성찬을 차려주시곤 했는데 친구들은 반찬이며 찌개를 맛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공짜로 밥을 얻어먹는데 대한 인사치레만은 아니었다.


외할머니가 계시지 않아도 부엌을 뒤지면 집밥의 그리움을 달래줄 반찬 한두 가지는 나왔다. 그중에서도 독에서 꺼내 먹었던 간장게장 맛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월인이 입대해서 훈련을 받고 있을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월인은 그전에 이미 간장게장 담는 법을 외할머니에게 배워서 알고 있었다.


사내놈이 별걸 다 알고 싶어 한다며 면박을 주면서도 외할머니는 독 고르는 법에서 보관하는 장소나 방법까지 세세하게 가르쳐주었다.


집안에서 외할머니의 간장게장 담그는 방법을 전수받은 사람은 월인이 유일했다. 월인의 어머니도 이모들도 외할머니의 간장게장 담그는 방법을 전수받지는 못했다. 그만큼 외할머니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요리는 월인이 어릴 때부터 즐겨해 오던 취미다. 그러다 보니 식재료 다루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고 칼질도 능숙하다.


아흔아홉 칸 대갓집 살림을 하던 외할머니의 음식 솜씨를 어머니가 물려받았고 월인은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손맛을 두루 체험하면서 음식에 대한 관심을 키워왔다.

어머니가 전통적인 요리법을 고수하고 외할머니에게 배운 음식들을 고집스럽게 지키려고 애를 써왔다면 월인은 새로운 음식과, 낯선 음식 문화를 집안의 식탁으로 가져오는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그만큼 월인은 맛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고 새로운 음식에 대한 관심도 많았다.


하지만 요리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공직에서 물러날 때도 그랬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아 사퇴를 하면서도 요리사가 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미 대륙 횡단을 다녀와서 수순처럼 로펌에 취직을 한 것이다.

송현이 대신 부장 희진이 전화를 받는다. 희진은 천강의 안부를 먼저 묻는다. 그리고 달리 할 말이 없는지 어제 마감 전에 보고한 것을 또 이야기한다.

눈이 왔는데도 어제는 손님이 많았다고. 주방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이틀 째 나오지 않았다는 것도 알려준다. 그만둘 것 같지는 않은지 사람을 새로 구하겠다는 말은 없다.


월인은 벽시계를 쳐다본다. 정각 9시다. 어쩌면 눈 때문에 아직 송현이는 출근 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부장 희진은 눈이 오든 비가 오든 항상 가장 먼저 출근한다. 출근해 보면 언제나 그녀는 수저며 행주 따위를 삶고 있다.


- 부장님 어제 퇴근 못했어요?

월인은 어제 그녀가 퇴근하지 않고 '소풍'에서 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묻는다.

송현이나 다른 직원들도 그렇지만 '소풍'의 주방장 겸 지배인격인 희진 역시 생활정보지를 통해 뽑았다.


그녀가 담근 열무김치를 맛보고 월인은 조리사 자격증도 없는 그녀를 선택했다. 하지만 여태껏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다. 그녀는 처음부터 조미료나 설탕을 쓰지 않고도 음식을 맛깔나게 만들 줄 알았다.

희진은 월인보다 여섯 살 정도밖에 많지 않다. 그런데도 그녀가 만드는 음식은 외할머니의 음식처럼 친근하고 정갈했다.


'소풍'의 밑반찬 중 일부는 순전히 그녀의 레시피대로 만들어 낸다. 월인은 그녀에게만 그것을 허락했다.


그밖에 다른 음식들은, 하다못해 쌈장이나 초고추장 하나라도 월인의 레시피대로 만든다. 그래도 그녀가 만들면 월인이 만든 것과 달리 어딘지 모르게 좀 더 정갈해 보였다.


월인은 그것이 여자와 남자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월인은 그녀의 성실함에 보답하려고 희진을 소풍의 부장으로 승진시켰다.

- 눈 때문에 걱정돼서요. 퇴근했다가 출근 못 하면 어떡해요. 셰프님도 못 나오시는데.

희진의 대답은 따뜻하고 책임감 넘친다.


- 며칠째 집에 못 들어간 거 아닙니까?

월인은 희진에게 미안하다.

- 여기 걱정은 마세요, 셰프님.

희진은 좀 과장되게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소풍'은 건물도 사업자도 천강의 명의로 되어 있어 월인은 처음부터 종업원에게 자신을 셰프로 소개했다. 때문에 월인이 '소풍'의 주인이라는 걸 알고 나서도 습관처럼 종업원들은 월인을 셰프님라고 부른다. 월인은 그것이 싫지 않다.

- 소풍이 아니라 부장님이 걱정이죠. 그러다가 남편한테 쫓겨나면 어쩌시려고.

- 남편이 들어오지 말랬어요. 눈길에 사고 난다고.

- 기훈이 학교는 어쩌고요.


- 저는 집에 가서는 아무것도 안 해요, 셰프님. 하다못해 수저 하나도 안 삶아요. 남편이랑 아들이 다 해요. 제 빨래까지. 기훈이도 이제 고등학생이잖아요.

희진 부장은 쾌활하게 웃는다.

- 문의로 이사하시라고 할 수도 없고.

- 지금은 다른 생각 마시고 사장님, 아니 사모님만 잘 돌봐드리세요.

- 혼자 주무시려면 무섭지 않으세요?


- 현이랑 같이 잤어요.


- 송현이도요! 부모님께서 야단하실 텐데.

스물여섯 살 난 여자가 며칠 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고용주로서 죄책감이 먼저 든다.


하긴 제때 제설이 잘된다고 해도 청주에서 문의까지 오가기는 위험부담이 따를지 모른다. 게다가 밤늦은 퇴근길에 눈이라도 만나면 더 그럴 것이다. 생각해보니 요 며칠 사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간헐적으로 눈이 내리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주인이라는 사람이 직원들의 출퇴근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으니, 하는 자책감이 든다.


서른한 살 학부모인 대규는 버스로 출퇴근하니까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다른 직원들은 문의에 살고 있으니까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 제가 허락받았어요. 아, 현이 막 샤워하고 나왔어요. 하실 말씀 있으시면 바꿔드릴게요.

- 아닙니다, 부장님. 고생이 많다고, 고맙다고 부장님이 전해주세요. 부장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오늘은 집에 들어가세요.


송현이는 지금껏 취직해서 서너 달을 버틴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소풍에서 벌써 2년째 일하고 있다. 월인은 그게 희진의 세심한 배려 덕이라는 걸 안다.


희진은 야단치지 않고 상대방이 잘 알아듣도록 자상하게 설명하고 설득시킬 줄 아는 여자였다. 그녀는 궂은일에도 솔선수범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왠지 월인은 그녀에게 빚을 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월인은 방열 장갑을 끼고 참나무 장작 하나를 집어 벽난로 안으로 던져 넣는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고 불길이 치솟는다.


어느새 열기가 퍼져 집안이 따뜻하다.

월인이 로펌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 살고 싶다고 했을 때 농담처럼 던진 천강의 첫 질문은 뭐해서 먹고살려고,였다.


'한정식집을 했으면 해.'

월인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농담이었으니까.


'자기가 요리 잘하는 건 아는데, 그걸 직업으로 삼을 만큼 대단하다고는 못 느꼈어. 아니 직업으로 삼으려고 할 만큼 요리에 열정이 있다는 걸 못 느꼈다고 하는 편이 맞겠네. 바빠서 그랬을 수 있지만.'

천강도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농담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공직이 그랬듯이 회사도, 아니 변호사 생활도 나한테 맞지 않아. 내가 좀 아둔해서 그걸 이제야 깨달아. 돌이켜보면 법조인이 된 것은 편협한 선택이었어. 법조인이 되면 부모님이나 나를 아는 사람들의 기대치에 어긋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아. 하지만 정작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는 고민하지 않았어. 무엇보다 법정에 서면 나 자신이 한없이 무력하게 느껴져.'

월인은 조금 진지하게 말했다.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식당을 하겠다고 하긴 했지만 요리사가 되는 게 꿈은 아니야. 요리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식당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뿐이지. 그렇다고 나 좋은 대로 하겠다는 건 아니야. 자기가 반대한다면 굳이 식당을 할 생각은 없어. 회사에 그냥 다니라면 다닐 거고. 나한테는 자기가 원하는 게 무언지가 중요해. 하지만 대답하기 전에 우리의 결혼 생활을 한 번 돌아봐주었으면 해. 결혼 후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며 함께 밥을 먹은 날이 얼마나 되는지. 신혼여행조차 제대로 가지 못한 건 그렇다 치고, 나는 나대로 바빠서 새벽이나 밤늦게 들어오는 날이 대부분이야. 자기도 해외 출장이나 야근으로 집을 비우는 날이 많고. 집에 와도 자기가 없기 때문에 혼자 살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 집안에 배인 자기의 향취가 나를 맞아주는 덕분에 외로움이 배가 되는 것은 결혼 전과 확실히 다르지만 그것은 부작용에 가깝지. 나를 힘들게 하거든.'


의도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진지한 대화가 되어 가고 있었다.

'자기와 헤어져 있으면 항상 자기가 그리웠어. 함께 있으면 이렇게 좋은데 어떻게 그립지 않겠어. 솔직히 말하면 자기가 보고 싶어 운 적도 있어. 자기랑 결혼하니까 타국의 호텔방에서 혼자 자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 회사를 그만둘까 생각해봤는데 그래 봐야 자기도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이 많은 것 같아서 포기했었던 것 같애.'


천강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자기야. 나는 시골중학교 선생이 되고 싶었어. 그것으로서 내가 이 세상에 필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믿어. 자기를 만난 뒤로 줄곧 그런 꿈을 꿨어. 그런데 말이야. 식당 말고 그냥 농사꾼이 되면 어때. 나는 자기가 농사꾼이 되면 더 나을 것 같아. 나는 중학교 선생을 하고 자기는 밀짚모자 쓰고 트랙터를 모는 농사꾼이 되는 거야. 수업을 마치고 나면 내가 새참을 내다 줄게. 그러면 매일 얼굴 보고 함께 밥 먹고 함께 자고. 생각만 해도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아.'


월인은 천강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줄은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쩌면 실망하고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천강은 월인보다 더 다른 삶을 원하고 있었다.


월인이 아침 준비를 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천강이 방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월인은 얼른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거실로 나간다. 천강이 놀라지 않게 느긋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잊지 않는다. 천강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기웃거리다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다.

천강은 월인과 눈길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한다. 지금 천강은 밥해주는 월인과 만나는 것이다. 천강은 누구를 만나든 태도나 눈빛은 처연하다.


가족과 친구를 모두 잃고 혼자 남겨진 아이의 슬픔 같은 것이 천강에게서 배어 나오는 것이다.


- 선생님, 이리 오세요.

월인은 조심스럽게 천강을 부른다.


눈 내리는 겨울에 봄가을에나 입는 원피스를 입은 것이 걱정스럽고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예쁜 천강을 보니 기쁘다.


- 저기 저.......

천강이 말을 잇지 못하고 달아나려다 들킨 사람처럼 당혹스러워하는 이유를 월인은 알고 있다. 그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어디론가 떠날 작정이었지만 집 밖으로 나서는 것조차 두려워진 것이다. 지금 떠나려고 나왔는데 가야 할 곳도 가고 싶은 곳도 생각나지 않는 막막함이 천강에게서 보인다.


- 식사 준비가 다 됐습니다.

월인은 작정하고 천강을 타인처럼 정중하게 대한다. 어쩌면 그게 어느덧 숙녀처럼 행동하고 숙녀처럼 생각이 깊어진 천강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지 모른다.


천강은 자꾸 현관문 쪽으로 시선을 던지면서도 월인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하고 주춤주춤 식탁 앞으로 다가온다.


가까이 보니까 정성 들여 화장한 얼굴이다. 오늘은 그냥 옷만 갖춰 입은 게 아니라 처음으로 자기 얼굴을 바라보고 사고 전처럼 화장을 한 것이다.


'천강은 매일매일 조금씩 자신을 되찾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새로운 자아로 변신 중일까? 분명한 것은 자기 얼굴조차 낯설어하던 천강이 이제 자기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렵게 자기를 받아들인 그녀가 다음엔 무엇을 또는 누구를 받아들일지?'


월인은 기대와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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