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그녀의 두번째 첫사랑

22. 돌아온 천강

by 이세벽

- 다음은 왜 없어!

천강은 다 읽고 난 ‘그녀의 두 번째 첫사랑’을 의자 옆에 내려놓는다.


- 자기가 원하니까, 잃어버린 시간을 알고 싶어 하니까 쓰긴 썼는데……. 그 뒤는 보여주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걸 쓰는 동안에도 많이 망설였어. 이걸 자기한테 보여 줄 수 있을까, 이걸 써야 할까, 등등.

자기가 간절히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쓰지 않았을 거야. 말로는 다 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기도 하고.


- 써놓은 거면 보여줘. 그냥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을게. 솔직히 내 이야기 같지 않아. 그렇지만 뒤가 너무 궁금해. 내가 어떻게 되었을지.

- 그 뒤는 나 혼자만의 시간이고 나 혼자 겪은 일이야. 부끄러운 시간이고 너무 절망적이어서 자기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아. 그리고 본다고 해도 자기한테 도움이 되지 않을 거야.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아.


- 미안하지만 자기의 절망이 나한테는 위로가 될 수 있어. 자기가 얼마만큼 절망했는지에 따라서....... 내가 자기한테 버림받은 게 아니라는 확신을 하게 될 거고, 그러면 내가 자기를 버렸다는 미안함이 들겠지, 그게 나한텐 위로가 돼. 이기적이지만, 지금은 그래.


만약 끝내 안 보여주면 자기가 나를 다른 남자한테 보내고 나서 춤이라도 췄다고 생각할지 몰라. 그런 생각이 나를 괴롭히면 앞으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안 되겠지! 안 그래.


- 협박이네.


- 응, 협박 맞아. 솔직히 내가 자기한테 돌아오는 게 쉽지는 않았어. 나를 받아줄지 어떨지도 알 수 없었으니까.


내가 며칠 동안 잠만 잤다는데, 그건 어렴풋이 기억이 나. 꿈인 것도 같고 환상인 것도 같고. 모든 것이 분명하지 않아. 안개 속에 갇혀 있었던 느낌이야.


어쨌든 꿈과 환상 속에 나타난 사람이 자기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쩌면 그 남자인 것도 같아.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채로 며칠 잠만 잤어.


마음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데 되질 않았어.


마침내 정신을 차렸는데 모르는 사람이 내 옆에 있었어. 그 남자가 나를 여보, 당신 이렇게 부르는데 충격을 받았어.


하지만 내 인생이 바뀌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


그래서........ 자기가 간절하게 보고싶었지만 그걸 드러내놓고 말할 수는 없었어.


그 남자가 친절하고 배려심이 많아서 더욱........


모든 게 불편하고 어색했지. 그 남자도 나도.


그러다 우연히 자기 전화번호가 떠올랐어. 하지만 두려웠지. 전화해도 될까. 전화해도 괜찮을까.


사실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자기한테 전화한 거야. 그냥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라도 알고 싶어서.


- 그래 그건 잘했어. 하지만 이건 읽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월인은 몸을 돌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에이포용지 묶음을 집는다. 그리고 천강에게 건넨다.


- 자기가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잖아.


천강은 에이포용지를 받아들고 일어선다.


- 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확신했어. 자기가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럴거면서 자기 아내를 결혼까지 시키는 바보가 어딨어. 그때 나를 그냥 방에 가둬두지 그랬어!


- 그러고 싶었지. 그러려고도 했고. 하지만 대신 시간을 끌어보기로 했지. 실제로 결혼은 꽤 오래 미뤄졌어. 이듬해 봄에서야 결혼을 했으니까.


자기가 기억을 되찾고 나면 자신이 잊힌다는 것 때문에 그 남자도 결혼을 망설였어.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천강 씨가 혼란에 빠질까 봐 그랬던 거지.


그리고 기억이 돌아오면 난감하기 짝이 없을 게 분명하니까.


그래서 암묵적으로 시간을 끌었던 거지. 양쪽 다 그런 생각으로 차일피일 결혼을 미뤘던 거야.


그 남자는 그 남자대로 어차피 돌아올 기억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길 바랄 수밖에 없었어.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남자 부모에게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노력했고 웨딩사진도 찍었어.


천강 씨의 독촉 때문에 아무 일도 안 하고 무작정 미루기만 할 수는 없었으니까.


결국 결혼 날짜는 잡혔고 그 남자도 나도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어.


그러나 그쪽 부모의 반대와 어머님의 반대로 결혼식을 할 수는 없었어.


두 사람은 혼인 신고를 하고 여행을 다녀오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했지.


우리 이혼은 웨딩사진 촬영하기 전에 진즉에 해 두었던 거고, 어머님은 서울로 가시면서 해주도 데려가셨지.

해주를 내가 데리고 있기에는 너무 망가져 있었어. 우울증이 심했지. 그걸 어머니도 알고 계셨고.



천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월인이 건네준 나머지 에이포용지로 시선을 가져간다. 하지만 바로 읽지 못하고 다시 눈을 들어 창밖을 한참 바라본다.




지금쯤 천강과 그 남자가 신혼여행지에 도착할 시간이다.


이제 기나긴 불면의 나날을 끝내고 싶다.


월인은 천강이 혼자 지내던 방을 둘러보며 혼잣말로 안녕, 내 사랑이라고 해본다. 해후의 인사인지 작별의 인사인지 조금은 모호하다.


참으로 오랜만에 이 방에 들어와 마음 놓고 인사를 건네는 거니까 해후이긴 하다. 하지만 작별이기도 하겠다.

해후와 작별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건가! 월인은 생각하며 천천히 방안을 둘러본다. 옅은 롤리타렘피카향이 떠다니는 것도 같다.


그 남자, 천강의 첫사랑이, -첫사랑이라고 불러주는 게 마땅하다. 천강에겐 그 남자가 첫사랑인 것이다.- 그 남자 김현수가 롤리타렘피카향을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천강이 좋아하게 된 걸까.


........ 그 흔한 해외로 가지 않고 왜 정선으로 간 건지 월인은 알지 못한다.


어쩌면 캠핑카를 타고 세상 밖으로 내달리던 그 날로 돌아가려는 것인지 모른다고 월인은 생각해본다.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곳에서 시작하려는 것인지도.


장모는 천강의 결혼 아니, 월인과 천강의 이혼을 완강하게 반대하다가 결국 서울로 돌아가 버렸다.


- 하늘이 두 조각나도 쪼개지지 않을 사람들이었는데, 아무리 사람 팔자 뒤웅박이라고는 하지만 자네하고 은진이가 사고 한 번으로 이렇게 될 수가 있겠나. 차라리 누구 하나 죽는 게 나았지.......


장모는 말을 잊지 못하고 기어코 눈물을 쏟았다. 그동안 장모는 참 많이 야위어버렸다.

빠끔히 열린 장롱문 사이로 챙겨 가지 않고 남겨 둔 천강의 옷가지들이 설핏 보인다.


천강이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라며 입는 것조차 꺼리던 것들이다. 월인은 열어보지 않고 장롱문을 잘 닫는다.


천강의 옷가지들처럼 월인도 오래전에 천강에게 잊혀졌다.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또는 노력과 정성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일이었다.


행여 하는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기대를 접지 않았지만 천강의 기억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더 기다려야 했고 더 기다리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마저 빼앗겼다.


언젠가 천강이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 기억이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견디자, 참자며 나를 설득하고 달래보지만 소용이 없다.


이 엄습하는 외로움, 절망, 어둠을 견딜 수 없다.


단 하루도 버틸 수가 없다.

천강에게 월인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사랑이다. 이제 그 남자가 천강의 사랑이다.


월인은 방을 나서려다가 다시 돌아서서 장롱문을 연다. 열지 말아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밀려오지만 이미 늦었다.


장롱 안에서 오래오래 묵은 천강의 냄새가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 월인은 참지 못하고 천강의 옷자락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는다.


이러면 안 돼. 월인은 자신을 타이른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천강의 냄새가 온몸으로 퍼지는 만큼 외로움도 커진다.


해일처럼 월인을 덮치는 건 환지통이다.


잘려나간 몸에서 오는 통증. 잘려나간 내 몸, 천강.


그리움은 고통이다. 그리움에 떠밀려 익사하고 말 것 같다. 끝내 월인은 천강의 옷자락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 내어 운다.


진정이 된 뒤에도 어린아이처럼 코를 훌쩍인다. 월인은 천강의 옷가지들을 하나씩 쓰다듬어 본다. 비로소 천강이 벗어놓고 떠난 허물 같다.

월인은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자신의 통곡이 부끄러워진다.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얼굴을 두 손으로 비벼 운 흔적을 지운다. 그리고 다시 장롱문을 닫는다.


2층을 돌아보고 쓸쓸하게 계단을 내려오는데 아까부터 어디선가 군고구마 냄새가 난다. 그 때문인지 천강이 아직도 이 집안에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올겨울 들어서는 벽난로를 사용하지 않고 기름보일러로 난방을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벽난로를 지펴놓은 것처럼 열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환취처럼 고구마 냄새가 자꾸 난다.

바로 옆에서 천강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월인은 괜히 벽난로에 달린 쇠서랍을 잡아당긴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새까맣게 탄 고구마 하나가 덜그럭거리며 굴러 내려온다. 만져보니 돌덩어리처럼 딱딱하다.


그 위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또다시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눈물이다. 월인은 눈물을 훔칠 생각도 않고 그대로 쇠서랍을 닫는다.


욕실로 향하는 한걸음 한걸음이 무너질 듯 위태롭다.


욕조에 물이 넘친다. 뜨거운 것이 물의 온도는 40도 정도 될 듯하다. 닥쳐올 한기에 대비하려면 좀 뜨거운 게 좋을 듯하다.


너를 지울 수만 있다면........ 아, 이 아픈 사랑을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세월을 믿고 기다릴 텐데....... 그렇지만 세월이라는 지우개가 내 안에 있는 너를 지울 수는 없을 거야.


너에 대한 기억과 추억과 이야기들은 비바람에 도리어 돌올해지겠지. 수천 년이 지나도 난 너를 잊지 못하고 아파할 테지. 이 고통은 점점 더 커지고 눈물이 마를 날 없을 테지. 네가 보고 싶어 날마다 소리쳐 울겠지, 나는.


한 발을 먼저 욕조에 담근다. 물이 욕조 바깥으로 출렁이며 넘쳐흐른다.


월인은 발을 담근 채로 뜨거운 열기가 가슴까지 올라오기를 기다린다, 하나의 전도체처럼.


죽음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 조그만 음식 조각이 기도를 막아도 죽고 혈관이 터져 피가 많이 흘러도 죽고, 교통사고로 죽고, 떨어져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넘어져 죽고, 산사태에 휩쓸려 죽고, 건물이 무너져 죽고, 배가 가라앉아 죽고, 불에 타죽고.......


그러나 막상 나에게 무력을 가하는 건 쉽지가 않다. 연탄불을 피워 놓고 일산화탄소를 마셔볼까. 산 정상에 올라가 벼랑으로 뛰어내려볼까. 2층 거실에서 목을 매달아 볼까. 그도 아니면 권총으로 내 머리를 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이미 내 목숨을 향해 어떤 식으로 무력을 가할지 결심을 굳혔다.


가슴 위까지 충분히 데워지고 나서야 천천히 물속으로 몸을 담근다. 이번엔 물이 양동이로 쏟아붓는 것처럼 한꺼번에 몽땅 욕실 바닥으로 흘러넘친다.


피가 흐르는 손목을 물에 담그고 욕조에 기대앉자 또 한 차례 물이 욕조 바깥으로 넘친다. 선홍빛 물이..........

누군가 함부로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환청 같다.


야, 장동혁, 장 검사.


술에 취한 듯 함부로 월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도 들린다.


그제야 월인은 며칠 전 재욱이가 출소했다는 소릴 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문을 부술 듯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려온다.


졸음이 밀려온다.




- 자기야,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천강은 월인의 목을 껴안고 흐느껴 운다. 그리고 월인의 등을 자꾸 쓰다듬는다.


- 재욱 씨가 나를 살렸어. 마침 출소한 재욱 씨가 술에 취해 집에 왔었고 그걸 말리려고 숙희 씨도 달려왔었어.


나를 죽이려고 왔다가 살려 놓은 거지. 재욱 씨가.

- 해주는 어디 있어?


- 이제 해주가 생각났어! 난 해주를 잊어버린 줄 알았네.


-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묻기가 겁났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 해주는 줄곧 당신하고 연락을 했어. 당신이 기억을 못하는 거지. 대학생이야.


- 아, 자기랑 나랑 그렇게 오래........ 믿기지 않아. 내가 도대체 몇 살인 거야! 좀 오래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 응, 좀 오래되긴 했지. 하지만 지나간 시간일 뿐이야.


- 자기가 해주를 돌봐줬구나, 혼자서.


- 아니, 해주가 나를 돌봐줬어. 외롭지 않게 지켜주고 자기 소식을 전해줬어.


- 아!


-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해주를 다시 데리고 왔어. 공부를 아주 잘해.


기숙사에 있는데 주말이면 와. 그런데 오늘은 좀 늦네. 아마 집에 오기 전에 자기한테 전화할 거야. 항상 그래왔으니까.


해주가 집에 들어서면 내가 묻거든. 엄마는 잘 있지! 라고.


- 자기는 늘 내 곁에 있었구나. 해주도 그렇고.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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