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동강
고속도로를 질주하던 월인은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 캠핑카를 발견하고 속도를 낸다.
금방 뒤따라 잡은 월인은 캠핑카에 바짝 다가갔다. 하지만 차창에 선팅이 짙게 되어서 안이 보이지 않는다.
월인은 창문을 내리라고 손짓을 하고 경적을 울린다. 그러나 상대방은 무심코 달린다.
월인은 캠핑카를 추월해서 앞쪽으로 끼어든다.
몇 번이나 경적을 울리고 상향등을 켜면서 월인을 추월하려고 하던 캠핑카는 결국 체념한 듯 갓길에 차를 세운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김현수가 아니다. 옆좌석에 앉은 여자는 화를 삭이느라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다.
- 죄송합니다. 급히 사람을 찾아야 해서......
월인은 머리숙여 사과한다.
삼거리다. 우측으로 가면 태백이고 좌측으로 가면 정선 경찰서 방면이다.
월인은 좌측 깜빡이를 켜고 진입한다. 다리 위다. 동강 줄기 같다.
천천히 가면서 차창을 내리고 동강 줄기를 내려다본다. 스치는 바람도 아프고 흐르는 강물도 아프다.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다시 창문을 올린다.
다리를 건너고 나자 세 갈래 길이 나온다. 길을 선택하는 것은 생각보다 고민스럽다.
하지만 뒤따라오는 차가 있어서 망설일 시간이 없다. 월인은 동강을 따라간다.
얼마 가지 않아서 하상 주차장이 나온다. 그곳에 많은 차가 주차되어 있지만 캠핑카는 보이지 않는다.
또다시 갈림길이다. 무심코 우측으로 핸들을 꺾는다. 그런데 또 하상 주차장이다.
그곳에도 차들이 빼곡히 주차되어 있다. 천천히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 다시 길로 진입한다.
이번엔 동강을 버리고 직진한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내가 보인다.
장날인 듯싶다. 상인들이 펼쳐놓은 좌판 사이를 겨우 뚫고 들어와 보니 지구대 앞이다.
어디선가 구수한 냄새가 날아온다. 살펴보니까 농협 건물 옆에 천막으로 지은 순대국밥집이 있다.
비좁은 지구대 주차장에 간신히 주차한다.
도로를 건너가 순대국밥집 천막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간다.
왁자지껄하다. 시골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서 순댓국을 앞에 놓고 막걸리를 마시며 이야기 하고 있다.
중년 사내는 벌써 술에 취했는지 목소리가 높다.
- 아주마이, 거시기가 곡할놀시던데요.
중년 사내가 주인 여자를 보고 알아들을 수 없게 지껄인다.
- 삼추이, 인자 낭청으 그만 떨고 어서 일어나기요. 가제나 바뿐 사람 붙잡고 갈구지 말고.
- 아주마이는 참, 내가 뭘 오래 저지래했다고 그러시요.
마침 그 남자 옆자리가 비어 있다. 월인은 그 옆에 앉는다. 초등학교 아이들 의자만큼 낮아서 쌓아놓은 순대 무더기가 앞을 가로막는다.
아주머니는 남자 말에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월인을 반긴다.
월인은 순대국밥을 주문한다. 여자는 뒤돌아서더니 금방 국밥을 말아온다. 말을 붙여볼 기회조차 없이 여자는 휙 가버린다.
- 놀러 오신 분은 아니신 것 같으네요.
수저를 들고 국밥을 뒤적이는데 옆에 앉은 남자가 대놓고 월인을 쳐다본다.
- 아, 예.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도 월인을 힐끔거리는 눈치다. 그제야 월인은 시골 사람들 틈에서 자신의 옷차림이 유독 두드러진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나 상관없는 일이다.
- 정선에 괜찮은 자동차 캠프장이 어디 있습니까?
- 여 동강가가 마카 캠쁘장 이래요.
- 아, 예. 그렇지요.
국밥을 두어 수저 뜨던 월인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아주머니를 불러 계산하고 나온다.
자동차로 돌아온 월인은 스마트폰으로 강원도 정선 캠프장을 입력하고 검색을 누른다.
정선에 있는 캠핑장만 수십 개다.
그중 오토캠핑장으로 검색되는 곳 역시 스무 곳쯤 된다.
누군가는 자신의 블로그에 오토캠핑장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 두었다. 숲 가운데 카라반도 세워져 있고 캠핑카도 보인다.
병방치 탐방 안내도와 레일 바이크, 모노레일 따위의 사진도 올라와 있다. 김현수의 취향은 모르지만, 천강이라면 좋아할 만한 장소들이다.
하지만 천강의 취향이 달라졌으니 그것도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드러내놓고 즐길 만큼 여유롭지 않아서 인적이 드문 장소에 캠프를 쳤을지 모른다.
캠프장이 아닌 외진 숲속 어디에.
정선을 자주 다닌 사람이라면 그런 곳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김현수가 정선으로 온 건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전화가 걸려온다. 동철이다. 월인은 전화를 받는다.
형은 다짜고짜, 마치 월인이 확답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법무법인으로 가자고, 거기에 맞춰 일을 진행하자고 한다.
- 전문성 갖춘 변호사는 내가 다 섭외해 놓을게. 명망 있는 변호사도 한둘쯤 영입할 거야. 장 검사는 일주일에 한 번만 출근해. 뭐 형편 되는 대로. 그 나머진 사무장인 내가 다 알아서 할게.
- 형, 그냥 어디 기업 쪽으로 옮겨. 그럴 수 있잖아.
- 그래, 알았어. 그쪽도 알아볼게……. 사실은 알아봤어. 그런데 마땅한 자리가 없다. 문제 많은 나를 받아주려고 하겠어. 형 사정이 좀 그래. 나 실업자 되면 장 검사도 고달파.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형이 백수에 어린 조카가 생겼는데 굶게 내버려 둘 건 아니잖아. 장 검사만 믿을게.
- 나 지금 바빠. 그 문젠 나중에 이야기해.
월인은 전화를 끊고 자동차 시동을 건다.
해가 지기 전에 한 곳이라도 더 많이 찾아다니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다.
성수기가 지나서인지 주말인데도 야영장은 비교적 한산하다.
막 도착해서 텐트를 치고 있는 가족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캠핑카로 온 것이 아니라 승용차에 텐트를 싣고 와서 야영하려는 것 같다.
세워놓은 카라반은 손님이 가져온 것이 아니라 야영장에서 설치해놓은 숙박 시설이다.
해주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신이 나서 물가로 달려간다.
월인은 액셀러레이터를 거의 밟지 않고 천천히 움직이면서 눈으로만 캠프장을 훑어보고 돌아 나온다.
대여섯 곳을 돌고 다시 야영장으로 들어서는데 스마트폰이 울린다.
- 혹시 자네는 알고 있었나. 어제 새벽에 숙희, 그년이 천강을 불러냈다고 하는데. 그 미친년이, 그 푼수 없는 년이 기어코 일을 저질렀다는데. 그년을 감옥에 처넣을 방도는 없는 겐가!
장모는 천강의 가출이 숙희 탓이라도 된다는 듯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 김현순가 뭔가 하는 작자가 새벽에 찾아와서 얼굴이라도 한 번만 보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바람에 그랬다고 그 잘난 주둥아리로 동네방네 떠벌리고 다니는데, 그년 아가리를 찢어놓을 수도 없고....... 김현순가 그 작자를 납치범으로 신고하게. 아니 내가 신고 해야겠네.
- 어머니 제가 그 남자를 만나러 가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월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모는 전화를 끊어버린다.
다른 야영장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또다시 전화가 온다. 이번엔 숙희 전화다. 월인은 망설이다가 받는다. 전화를 받으면서 다른 야영장을 향해 달린다.
- 사장님, 아니 변호사님. 정말 죄송해요.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어요. 하지만 순전히 천강 씨를 위한 마음이었다는 걸 알고 계시겠죠, 변호사님. 저는 천강 씨가 예전처럼 변호사님과 다정하게 산책하는 걸 보고 싶었던 거예요. 제 맘 아시잖아요. 제가 천강 씨를 얼마나 좋아한다고요.
숙희는 수다스럽게 변명을 늘어놓는다. 월인은 당장이라도 전화를 끊고 싶다. 하지만 천강이 누구와 어디로 갔는지 알아내려고, 아니 숙희가 스스로 천강이 간 곳에 대해 발설하기를 기다리며 묵묵히 그녀의 수다를 듣고 있다.
- 변호사님, 제가 천강 씨를 불러낸 건 맞아요. 하지만 이런 일이 생길 줄 어떻게 짐작이나 했겠어요. 만약 알았다면 절대로 불러내지 않았죠. 변호사님, 듣고 계시죠?
- 예. 숙희 씨.
월인이 바라는 것은 천강이 간 곳이다. 그것만 알면 다른 건 듣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걸 직접 물어보면 입을 꼭 다물어 버릴 것이다.
자꾸 이것저것 말하다 보면, 많은 말을 하다 보면, 무의식중에 천강이 어디로 갔는지 말할 수도 있다. 그때를 기다리자. 월인은 성급함을 보이지 않으려고 자신을 다독인다.
- 글쎄 새벽에 기타 선생이 식물원에 찾아왔어요. 전 처음에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나갔어요. 차라리 그냥 천강 씨가 학원에 다니면서 기타를 배웠으면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지 않았을지 몰라요. 못 보는 사이 기타 선생도 천강 씨도 용광로처럼 달궈진 거예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누가 알겠어요. 매일 얼굴 봤으면 감정이 급격히 뜨거워지지 않았을 거잖아요, 변호사님.
- 아, 예.
뜨거워졌다는 말이 불에 달군 쇠로 가슴팍을 누르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뜨겁다니, 무모한 일탈이지 않은가. 뜨겁다고 해도 일탈에 지나지 않는다. 지나치게 뜨겁다는 것은 욕이 기승을 부리는 것이다. 아니 욕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잘못일지 모른다.
냉정히 짚어보면, 천강은 백지의 기억 위에 새로운 사랑을 쓰고 있다. 그게 월인이 아닌 다른 남자일 뿐. 굳이 비중을 따진다면 천강은 욕보다 애가 더 큰 사람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천강이 기필코 그 남자를 고집하는 것도 애일 것이다. 욕이라면 굳이 그 남자여야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그래서 욕이 아니라 애라서 더욱 견디기 힘들다.
수많은 생각들을 접어두고 월인은 태연하게 숙희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 우리 아저씨가 야단해서 기타 선생을 식물원 테이블로 데리고 갔어요. 사람이 찾아왔는데 그냥 쫓아낼 순 없잖아요. 할 수 없이 거기 가서 커피를 타줬는데, 글쎄 기타 선생이 커피를 마시다 말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려요.
다 큰 남자가 우니까 영문도 모르고 불쌍한 맘이 들더라고요. 그래 물어봤더니 천강 씨 한 번만 보게 해달라고 그래요. 안 그러면 죽을 것 같다고.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이 없더라고요. 기타 선생 등짝을 패면서 가라고 야단했죠. 그런데 숫제 엉엉 울더라고요. 사람 맘 약해지게. 그것도 큰 사람이 우니까 제 맘도 무너지죠. 다른 누구라도 어쩌지 못했을 거예요, 변호사님. 듣고 계시죠.
- 예, 이해해요. 숙희 씨.
- 자기보다 열 살, 열 살은 좀 안되지만 아무튼 나이가 많은, 솔직히 나이 차이는 좀 나잖아요, 요즘 애들은 그런 거 별로 안 따지긴 하지만 아무튼, 기타 선생이 천강 씨를 사랑했나 봐요. 맘이 짠하더라고요.
- 그래서 동정심에 천강 씨한테 전화를 걸어준 거고요.
월인은 유도심문이라도 하듯이 숙희를 안심시킨다.
- 네네, 동정심이죠. 저도 인간인데 눈물 앞에서 약해지죠.
숙희는 덩달아 안심하는 눈치다.
- 마침 천강 씨가 전화를 받았군요.
- 예, 깨어 있었나 봐요.
- 아, 그랬군요. 뭐 누구나 그럴 수 있죠.
- 그렇죠, 변호사님. 역시 변호사님은 이해심이 많으셔.
- 그런데 천강 씨가 나온다고 그러던가요.
- 아뇨. 못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싫다고 만나지 않겠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전화를 끊었죠. 사실 저도 잘 됐다고 생각했어요. 둘이 만나서 좋을 게 뭐 있겠어요.
그런데 기타 선생이 가려고 막 일어서는데, 천강 씨가 잠옷 차림에 가운만 걸치고 식물원으로 뛰어 들어왔어요.
얼마나 뛰었는지 한동안 숨을 헐떡이느라 말을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두 사람이 마주 보고 한참을 서 있었어요.
기타 선생이 마치 천강 씨 숨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고요. 바라보고 있는 저도 숨이 다 막히더라고요.
마침내 천강 씨 호흡이 안정이 되니까 서로 다가가서 껴안더라고요. 그리고 이마를 맞대고 소리 없이 우는 거예요. 기타 선생도 천강 씨도. 바라보는 저도 미치겠더라고요. 마음이 아파서.........
아무튼 그리고 헤어졌어요. 천강 씨가 집으로 가는 걸 보고 전 불을 끄고 들어갔어요. 기타 선생도 차를 타고 떠나는 걸 봤고요.
설마 둘이서 야반도주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죠. 두 사람의 만남도 이별 의식 같았으니까요. 그게 전부예요, 변호사님.
천강 씨 오기 전에 기타선생한테 변호사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전직 검사 출신이고 변호사라고, 그러니까 마음 접으라고 말해줬어요.
그런데 겁도 없이........ 아무리 사랑이 좋다지만 애들 불장난도 아니고 그럴 거면 죽든지 살든지 떳떳하게 밝히고 해결을 보려고 해야지.
- 알았습니다.
실망스럽지만 월인은 거기서 전화를 끊고 싶다. 기타선생이 숙희에게 어디로 갈 건지 밝히지도 않았겠지만 설사 숙희가 안다고 하더라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 변호사님, 재욱 오빠 교도소에 있는 거 아시죠?
- 아, 예.
- 제가 접견 다니잖아요. 어머니가 영치금 넣어주고 오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한 달에 두 번 다녀요. 그런데 그 인간이 변호사님 전에 검사일 때 재욱 오빠를 억울하게 옥살이시켰다고 그러더라고요.
나가면 변호사님을 죽인다고 지랄해서 그래서, 제가 평생 감옥에서 썩고 싶으냐고, 지랄 말고 조용히 입 다물고 살라고 야단해줬어요.
그 인간 칼 품고 다니는 거 습관이에요. 지 마누라도 죽인다고 벼르고. 무슨 말인지 알죠. 그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 변호사님.
말이야 바른 말이지 변호사님이 누굴 억울하게 옥살이시키실 분이겠어요.
야영장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둠이,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처럼 세상을 천천히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짐승의 뱃속처럼 칠흑이다.
이제 자동차 불빛을 벗어나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월인은 상향등을 켠다.
또 다른 야영장을 향해 한참을 달려가는데 길가에 불빛이 보인다.
간판불은 켜져 있지 않지만 무슨 가게 같다. 가까이 다가가서 봐도 식당인지 구멍가게인지 모르겠다.
한쪽엔 과자와 잡화가 놓여 있고 그 옆으로 테이블이 몇 개 놓여 있는 것이 식당과 가게를 겸하는 집 같다.
입구에서부터 두부 냄새가 향긋하다. 일흔이 넘은 할머니가 주인이다.
때 묻은 한복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머릿수건을 질끈 동여맨 모양이 과거에서 온 것 같다. 월인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식탁 앞에 의자를 당겨 앉는다.
- 운제 맹금 두부를 쏴놨는데, 두부 정식 드레요?
할머니는 월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분주하게 손을 놀리면서 말한다.
- 예, 그런데 이 시간에 두부를 쒀놓으시면 누가 사가나요?
- 그기, 젊은 사나가 지 애미나를 우찌나 애끼는지 꼭 새로 만든 두부를 먹이고 싶다 해서 웃돈을 얹어주지 뭡니까. 그래 만들어주고 남근기래요.
- 아, 그렇군요. 여기 어디 캠핑장이 있나보군요.
- 캠뿌장은 모르겠구 차를 대고 놀만 한 곳은 여개 동강 편편한 개구장가에 널랬지래요.
- 두부를 사간 사람이 혹시 키가 크지 않았습니까?
월인은 괜히 물어본다.
-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지.
- 여자가 조금 나이 많아 보이죠?
- 남자 혼자 왔드래. 여자는 펜션에 있다 하드래요. 왜, 누귀래 찾아요?
- 아닙니다.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담긴 두부 한 모와 잘 익은 김치 한 접시하고 무말랭이 따위의 밑반찬에다 조가 들어간 쌀밥이 나온다.
간장 양념을 두부에 끼얹어서 먹어보니 달고 고소하다. 월인은 천천히 두부를 먹는다. 간혹 밥 위에 무말랭이를 얹어 입에 넣고 씹어 삼킨다. 그럴 때마다 무말랭이 씹히는 소리가 난다.
약간 신맛이 나는 김치인데 시원하고 아삭아삭 씹히는 게 두부와 잘 어울린다. 그러나 두어 번 먹고 나니까 더 이상 식욕이 나지 않는다.
- 보아하니 여 사람 같지는 않은데, 말쑥하게 채려 입고 어딜 가는 길이래요.
할머니는 일하다 말고 서서 묻는다.
- 그냥, 답답해서 나왔다가 아는 사람이 이 근처 어디에서 캠핑을 한다고 해서 찾아 가는 길인데 영 못 찾겠네요.
- 무슨 캠뿌장인지도 모르고?
- 예.
- 그래서는 몬 찾지.
- ........
- 왜, 더 잡숫잖고?
- 잘 먹었습니다.
나오니까 다시 짐승 뱃속이다. 금방이라도 익사할 것 같은, 세상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두께의 장벽이다. 앞을 막고 있는 저것은.
인터넷으로 검색한 마지막 야영장을 향해 달릴 때다.
월인은 콘솔 박스를 열어 권총을 확인한다. 그리고 만약 찾는다면 누구부터 쏴야하는지 생각한다. 부지불식간에 찾아든 상념이다.
먼저 김현수를 쏜다. 그리고 천강을 쏜다. 세 개의 총알 중 두 개의 총알을 쓰고 이제 한 개만 남는다. 마지막 총알은 자신을 죽이는 데 써야 한다. 총구를 자신의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아직 총알을 장전하기 전이지만 섬뜩한 느낌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간다.
월인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상념에서 깨어난다.
김현수는 죽일 필요가 없다. 죽어야 할 사람은 천강과 나, 둘 뿐이다. 김현수를 데리고 갈 이유가 없다. 천강과 내가 가야 할 길이다.
월인은 그런 생각을 하며 다리로 접어든다. 이제 정선에 있는 오토캠핑장으로서는 마지막인 셈이다. 그 다음엔 또 어디로 가야 할지.
문득 왼쪽을 바라보니까 다리 아래 저 멀리 불빛이 보인다. 야영객이 켜놓은 가스등이다. 두어 번 후진과 전진을 반복해서 차를 돌린다.
가까이 다가가면서 자세히 보니까 캠핑카가 세워져 있다. 그늘막에 가려 사람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가까워지니까 무슨 악기 소리가 들린다. 기타 소리 같다. 아니 기타 소리가 분명하다.
멀찌감치 차를 세우고 권총을 꺼내 총알을 장전한다. 처음엔 두 발만 장전했다가 실수를 대비해 다시 나머지 한 발을 약실에 끼워 넣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캠핑카로 접근한다.
지금껏 찾아 헤맨 천강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인다. 그러나 그늘막 아래 앉아 있는 두 사람은 천강과 김현수다.
가스등 불빛아래 비치는 천강의 얼굴은 미대륙 횡단 여행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천진난만하고 설렘으로 가득하다. 꽃그늘은 걷히고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진즉에 기억이 돌아온 건지 모른다.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랬다면 옆에 있는 김현수를 잊었을 테지. 기억이 돌아오면 기억 상실 이후의 일들은 다 잊는다지 않는가.
천강과 함께 떠나리라. 떠나리라. 떠나리라. 월인은 주문처럼 외우다 문득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어 본다.
오랫동안 꽃그늘 아래서 견뎌온 사람은 자신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아파서 어쩔 줄 몰라 했던 시간들이 천둥번개처럼 정수리에 내리꽂힌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눈물.
기타 연주가 끝나고 김현수가 천강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그러자 천강은 기다렸다는 듯 김현수의 목을 감싸 안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입술을 부비며 뜨겁게 입 맞추고 있다.
월인은 입술을 깨물고 소매 깃으로 아무렇게나 눈물을 훔친다. 그리고 권총을 꺼내 든다. 가늘게 떨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월인은 결심한 듯 한걸음 내딛는다.
그 순간이다. 환청처럼 해주의 음성이 들린다. 아빠, 엄마를 죽이지 마세요.
월인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마을 하늘에서 봤던 별들이 여기에도 있다. 아니 그 보다 훨씬 많다. 먼지처럼 흩날리는 별들이다.
아빠, 엄마를 죽이지 마세요. 또 다시 들려오는 해주의 음성이다.
죽이지 않고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수가 있지! 나는 도대체 누구를 죽이려는 것일까?
천강! 나는 천강을 죽일 수 없어. 아니, 죽이지 못할 거야. 내가 죽이려는 사람은 저 남자야. 저 남자뿐이야. 그러나 저 남자를 죽이고 나면 천강이 돌아올까. 돌아온다고 해도 나는 천강을 감옥에서 맞이하게 되겠지. 그래도 저 남자를 죽일까.
천강이 몹시 슬퍼할 거야. 나를 원망하다가 죽을지도 모르지. 해결 방법은 단 하나, 나를 죽이는 것뿐이구나.
저 남자가 천강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월인은 누구를 죽일 것인지, 아니면 누구를 살릴 것인지는 결정하지 못한 채 권총을 호주머니에 넣는다.
월인이 캠핑카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도 두 사람은 알아채지 못한 채 부둥켜안고 있다. 월인은 조심스럽게 차를 두어 번 두드리고 헛기침을 한다.
그제야 두 사람은 놀라서 떨어진다. 김현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의자에서 일어서다가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천강은 태연하다.
- 천강 씨, 지금은 내 옆에 앉아주면 고맙겠습니다. 당신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아니 인정할 수 없겠지만, 다시 말하면 기억에 없겠지만 지금은 내가 당신의 남편입니다.
이런 말 당신의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는 안 하겠다고 당신과 약속했지만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군요.
천강은 순순히 월인의 옆에 앉는다. 그러나 의자를 당겨 거리를 두는 것을 잊지 않는다.
- 김현수 씨도 서 있지 말고 앉으세요.
김현수도 말없이 의자에 앉는다.
- 먼저 김현수 씨에게 묻겠습니다. 천강 씨를 사랑합니까? 아니 이건 바보 같은 질문이군요. 당연히 사랑하겠죠. 그렇죠? 대답해보세요.
김현수는 예, 천강 씨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라고 짧게 대답한다.
-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무슨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하죠? 이 방법밖에는 없었습니까?
- 잘못했습니다.
- 그럼 여기서 물러나겠습니까? 아니면 유부녀 납치, 강간죄로 처벌을 받겠습니까? 천강 씨가 질병 중인 건 아시죠?
월인은 김현수의 죄를 될 수 있으면 부풀리고 싶지만 그 이상 가져다 붙일 게 없다.
- 죄송하지만, 죗값을 치르고서 천강 씨와 결혼하겠습니다.
- 천강 씨도 이 남자와 결혼할 건가요?
천강은 고개를 끄덕인다.
- 그럼 됐습니다. 이젠 집으로 갑시다.
- 아저씨, 저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부탁할게요.
- 천강 씨를 이런 식으로 보낼 순 없습니다. 천강 씨, 당신은 내 아내입니다. 당신의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고 해도 나는 당신의 남편입니다. 당신은 기억뿐만 아니라 마음속에도 내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내겐 얼마나 큰 고통인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당신의 상실만큼은 아닐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제 당신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는 안 됩니다. 적법하게, 기왕이면 웨딩드레스를 입혀 보내고 싶습니다.
내가 당신을 보내는 방식이니 그것마저 안 된다고 거절하지는 마세요.
월인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한다. 그리고 어쩌면 아무런 사고 없이 천강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시간을 벌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지금 당장 김현수 씨 당신을 수사 당국에서 체포해 가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 .......
침묵이 흐른다. 아니 물소리만 들린다. 아니 풀벌레 소리도.......
- 천강 씨, 지금은 나와 함께 집으로 갑시다. 가서 나하고 이혼하고 그리고 이 남자와 결혼하십시오. 그것이 남편으로서 내가 천강 씨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인 것 같습니다.
- 현수씨, 아저씨는 약속을 지키는 분이세요. 아저씨의 말대로 이혼을 하고 나서 다시 현수씨에게 연락할게요. 그때 우리 결혼해요.
천강은 월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김현수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김현수의 볼에 자신의 볼을 대고 가볍게 부빈다.
천강은 앞장서서 승용차로 향한다.
- 어쩌자고 그러는 거니? 엄마한테 이사 가지 않기로 해놓고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배신해. 이럴 거면 차라리 이사를 가지.
집에 들어서자 장모는 천강을 보며 자기 가슴을 찢는 시늉을 한다. 그러나 맥 빠진 목소리다.
- 어머니, 저 아저씨하고 이혼하고 그 남자랑 결혼할 거예요.
천강은 마치 새로운 해결 방법을 알아낸 것처럼 대견하다. 영문을 모르는 장모는 월인을 쳐다본다. 월인의 해명을 강요하는 눈빛이다.
월인은 하는 수 없이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천강과 이혼하고 김현수라는 남자와 결혼시킬 거라는 월인의 설명을 들은 장모는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한다.
- 그럼 해주는 어떡하려고 그러는가? 다시 고아원으로 돌려보낼 셈인가!
장모는 월인이 못마땅해서 화를 삭일 수가 없다.
- 어머니, 해주는 제가 데려 갈 거예요.
천강이 나서보지만, 장모는 들은 척도 않는다.
- 이혼하려면 왜 데리고 왔는가!
장모는 천강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월인에게만 닦달이다.
- 죽든 살든 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지. 그리고 엄연히 남편인데 남편이 자기 아내를 결혼시킨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말이네. 세상에 그런 말은 내 평생 들어본 적도 없지만 들어보지도 못할 말이네. 자네가 은진이 아버진가 남편인가. 대답 좀 해보게.
- 아저씨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러세요.
다시 천강이 나서보지만, 장모는 여전히 천강을 상대도 하지 않는다.
- 나는 은진이보다 자네가 더 원망스럽네. 자네 아내인데 어찌 이렇게 남의 일 처리하듯 하는지.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이제 그만 보내고 싶은 게 솔직한 자네 심정인가?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해 보게. 해주 문제도 마찬가지네. 은진이가 좋다고만 해서 될 일인가.
나는 자네를 그렇게 안 봤네. 자네가 은진이를 지켜주지 못하면 누가 지킬 수 있는가. 그 기타 선생인가 뭣인가 하는 작자하고 사는 꼴을 두고 볼 거냔 말일세.
자네는 사람만 좋지, 도통 자기 사람을 지킬 줄 모르는 맹추가 아닌가.
자네가 정말로 은진이를 위하고 해주를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은진이를 방에 가두고 열쇠라도 채우게. 왜! 못하겠는가? 자네가 못하겠으면 내가라도 하겠네.
그러고는 방으로 들어가려다 돌아선다.
- 내가 전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장이 꼭대기집 재욱이라는 사람 면횐가 접견을 갔는데 자네가 장동혁 검사라는 걸 알고는 나와서 자네부터 죽이겠다고 벼른다네. 그 미친놈이 왜 그러는지 자네가 말 좀 해보게. 자네가 그놈을 억울한 옥살이라도 시킨겐가?
- 숙희 씨한테 들었습니다.
- 그놈 입으로는 자네가 자기를 억울하게 처넣었다고 그런다던데. 내가 그런 소리를 듣고 얼마나 분하던지, 이장한테 욕을 퍼부었네. 어디 감히 누구를 죽이니 살리니 헛소리를 하고 지랄들이냐고.
그런데 지금 보니까 자네가 사람 여럿 잡을 위인이네.
왜 말이 없나. 무슨 생각이 있으면 있다고 말 좀 해보게. 우리 은진이를 살려낼 무슨 비책이라도 있는 거면 말 좀 해주게. 자네 장모가 복장이 터져 죽을 지경일세.
자넨 가만 보니 죽기로 작정한 사람 같네. 그런 건가?
장모는 가슴을 치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장모의 말을 곧이들은 천강은 겁을 집어먹고 자기 방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한다.
- 그럴 리 없지만 만약 어머니가 문을 잠그면 내가 열어줄게요.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쉬어요. 내일부턴 바쁘잖아요. 이혼도 해야 하고, 결혼 준비도 해야 하고.
그제야 천강은 기쁜 얼굴로 일어난다.
- 어머니가 문 잠그면 꼭 열어주셔야 돼요. 만약 문을 잠그면 죽어버릴 거예요.
천강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몇 번이나 다짐을 받고 나서야 방으로 들어간다.
월인은 천강이 사라진 방문을 바라보고 서 있다. 장모의 말대로 지금이라도 천강의 방문에 못질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