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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벽 Nov 03. 2022

[장편소설] 매화나무 옆에서, 그들은 울었다

1. 사케를 마시던 두 부부

도시에 있는 어느 나무 할 것 없이 잎마다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성급한 낙엽이 하나둘씩 소리 없이 지고 있었다.


맑고 푸른 하늘과 선선한 바람은 사람들의 가슴팍을 헤집고 들어와 외로움을 턱없이 키웠고, 사랑에 빠진 사람들조차 사뭇 쓸쓸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래서 삼십 대 후반이던 이들 두 부부 일행은, 서둘러 날짜를 잡고 장소를 정했다.  


조급하다 여겨질 만큼 가깝게 정한 약속 날이었다. 날은 더디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단풍은 더 짙어지고 길바닥에 나뒹구는 낙엽은 눈에 띄게 많아졌다.


특히 이들이 모임을 가졌던 남한강 근처 일식집엔 나이 많고 키 큰 나무들이 에워싸고 있어 가을이 더 깊어진 듯했다.


택시를 타고 여기까지 온 두 부부가 앞마당을 가로질러 일식집으로 걸어갈 때였다. 이들은 왠지 모르게 자신들마저 단풍이 들고 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풍이 저렇게 빽빽한데도 여유가 느껴지는데....... 어쩐지 압도당하고 있는 것 같군. 여유로운 압도라고 할까. 즐거운 압도라고 할까. 마지막이 아니라 절정에 오른 것이 아닐까 싶어.   


이들 중 누군가 말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나무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는 일 년에 두세 번 정도 막연한 핑계를 만들어 부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져왔다. 그렇지만 양쪽 부부 다 갑자기 보고 싶다고 만남을 가질 수 없는 처지였다.      


한 달, 어쩌면 그 이전부터 가족 모임, 친인척 애경사, 동인 모임, 동창회, 명절 등등을 다 피해서 날짜와 장소를 잡고 어렵게 가진 모임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만나야 할 다른 이유나 목적은 없었다. 더 추워지기 전에 얼굴 한번 보자, 는 핑계로 만났을 뿐 그들 사이에 어떤 소소한 이해관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일정 뒤에 찾아오는 덧없음과 바쁘고 빽빽한 일상 속에서도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외로움 혹은 허전함이 이들 부부의 만남을 독촉하고 이어오게 만든 건 분명했다.




모처럼 만난 이들 두 부부는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갖가지 생선회를 안주 삼아 사케를 두 병째 비우는 중이었다.      


가벼운 취기가 흥을 돋우고 있어서 목청도 약간 높았고 웃음소리도 간간이 터져 나왔다. 누가 봐도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하는 흥겨운 모임이었다.      


칸막이로 둘러싼 독립된 공간에 두 부부가 나란히 앉아서 남자는 남자를 여자는 여자를 마주 보고 술잔을 주고받았다. 그들 중 누군가 말을 하고 있으면 나머지 세 명은 귀를 기울였다.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말하고 있는 사람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웃음 짓거나 감탄사를 연발했다. 하지만 남자들끼리 대화에 열을 올리는 순간도 있었고 여자들끼리도 그랬다.      


대화 도중 상대방 남자와 상대방 여자가 서로 교차해서 눈빛을 주고받거나 동의를 구하거나 고개를 끄덕여 동조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감정 소모가 일어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오랜 만남을 지속해 왔지만 두 부부 중 어느 누구도 상대방에게 연정을 품거나 하다못해 헤픈 눈웃음조차 흘린 적이 없었다. 반대로 미워한 적도 불만이나 불평을 품은 일 또한 없었다.


어쩌면 그 때문에 수년간 갈등이나 오해 없이 만남을 이어올 수 있었던 건지 모른다.


'가을 공기처럼 사람의 관계도 너무 뜨겁거나 차갑지 않아야 숨쉬기 편안하고 오래 유지된다.'


'뜨겁거나 차가운 침대는 불편해서 사람을 끊임없이 뒤척이게  하고 끝내는 견딜 수 없게 한다.'


'적당한 온도는 사람에게 휴식과도 같아서 오래 머물게 하고 그립게 한다.'


따위의 지론이  이들 두 부부 사이에서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런 존재라고 믿었고 영영 그런  존재로 살고자 했다.


적당한 온기를 지닌 관계이기를.




두 부부는 번듯한 직장인이거나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고 삼십 대 후반의 나이에 대출 없이 아파트 한 채는 장만할 만큼 경제적 자유도 어느 정도 갖춘 사람들이었다.      


양쪽 부부 다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어쩌면 부부 사이에 갈등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도 그들은 일찌감치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직업을 내려놓거나 직장을 그만둘 만큼 자녀에 대한 애착이 없다는 것도 그들은 거짓 없이 솔직하게 인정했다.    

  

'오직 우리들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그들이 종종 잔을 부딪치며 내뱉은 이 말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찌 보면 좀 이기적이고 냉정한 면모가 드러나 보인다고 여겼는지 이들 부부는 자신들의 그런 신념은 시대적인 것일 뿐이라고 둘러댔다.




약 칠팔 년 전쯤 두 부부는 결혼 중매 회사를 통해 만났다. 그리고 이삼 년쯤 교제를 하다가 우연히 같은 해 결혼했다.      


그리고 또 우연히 같은 아파트 같은 동 같은 층에 나란히 살면서 여자들끼리 먼저 인사를 나누었고 여자들끼리 왕래하며 친해졌다.      


여자들은 나이가 두 살 정도 차이 났다.


 여자는 언니 동생 하며 지냈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고 함께 차를 마시며 한 2년 사이 친구나 다름없이 가까워졌다.    


오늘날 아파트에서는 보기 드문 친교였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데 시간이 중요한 건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은 필요하고 2년이면 정말 믿을 수 있는 친구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두 여자는 판단했다.

  

그래서 각각 다른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뒤에도 연락을 주고받고 만나야 한다고 믿었다. 심지어 그 정도는 인간이 지녀야  하는 품격이라고 여겼다.


때문에 이사 후에도 줄곧 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바쁜 일상 속에서도 언제 만나야 할지 고심했고 만남을 이어왔다.




이사 전까지만 해도 남자들끼리는 현관 앞에서나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인사 정도 나누는 사이였다.      


아내들끼리 친하게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들도 엘리베이터나 현관 앞에서 우연히 만나면 환하게 웃으며 안부를 묻기도 하고 날씨에 관해 대화를 주고받으며 호감을 보였다.


하지만 따로 만나 술자리를 가지거나 부부가 함께 모여 식사를 하지는 않았다.           


이사한 뒤로도 여자들끼리만 전화로 서로 안부를 물어오다 헤어진 지 일 년이 훌쩍 지난 뒤에 비로소 부부 동반 첫 모임을 가진 게 시작이었고 오육 년째 이어왔다

     



결혼 중매회사를 통해 만난 이 고상한 두 부부가 사랑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결혼 중매회사를 통해 만났다고 해서 사랑 없이 혼인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떻게든 만남이 있어야 사랑이든 미움이든 싹틀 수 있으니까 상업적인 결혼 중매회사나름 긍정적 측면이 있다. 


더 많은 만남과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러니까 서로가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는 조건 만남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조건만 맞다고 무작정 결혼이 성사되는 건 아니겠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조건이 확실히 좋으면 없는 사랑도 생기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 부부의 사랑도 그렇게 탄생되었을지 몰라,라  이들 스스로 말할 만큼 쌍방이 바라던 조건을 다 갖춘 상대였다.


직장. 직업. 재산. 단출한 가족 관계. 준수한 외모. 신체조건. 성품. 등등.


까다롭다고 할 수 있는 조건들이었지만 갖춘 사람들 입장에서는 평범이고 일상일 뿐인 바람이었고 다행히 바라던 대로 되었다. 이들 부부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처럼 운이 좋았다.



 

결혼 이후에도 이들 부부는 남편과 아내로서 성심성의껏 역할을 다했고 양보하고 배려해왔다.  


사랑에 눈이 멀어 결혼한다고 해도 성격 차이에서 오는 갈등은 피해 갈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약간의 취향과 성격 차이조차 사랑이 아니라 배려와 양보로 슬기롭게 극복했다.   


덕택에 뜻밖의 습성이나 이기심에서 오는 실망과 충돌도 이들 사이엔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엔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차츰 익숙해졌고 이들 부부는 점차 자신들의 결혼을 이상적이라 믿었다.

 

때로는 자신들의 사랑이야말로 지적이고 모범적이라 확신했고 행복을 의심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부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며 자신들의 높은 수준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들 부부 사이에 불만은 거의 없었다.  


혹시 어쩔 수 없는 불만이나 불평이 생기더라도 이해와 아량으로 덮어버렸다.

 

드물지만 너무 고요하고 잔잔한 일상으로 인해 무료함이 밀려오면 자신들이 불행한 건 아닌가 싶은 회의에 빠진 적은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행복에 겨운 나머지 자신들의 감성이 사치를 부리는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감성적 사랑보다는 이성적 관계에 집착했고 그것이 훨씬 아름답고 풍요로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사실 누가 봐도 이들 부부는 이상적으로 보였다.      


설령 사랑이 없다고 해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서로를 배려했고 서로에게 의지하고 바라기보다는 솔선수범함으로써 상대를 행복하게 해 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틈만 나면 서로를 칭찬했고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당신을 만난 건 행운이야.      


이들은 말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게 믿었다.


이들 부부야말로 한충 성숙된, 이상적인 사랑을 만들어가고 있었던 건지 모른다.


적어도 시월의 모임이 있기 전까지는.......

                      



이들 부부 중 한 명의 여자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 중이었고 모두들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어선 여자도 활짝 웃고 있었다.


여자는 의자 옆으로 걸음을 내딛다 어쩐지 비틀하더니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어깨를 짚으며 자리에서 벗어나 걸어 나갔다.


또각또각  구두 발자국 소리를 허공에 새기며.


여자가 모습을 감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방 남자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어깨에 남겨진 여자의 체온과 무게를 무슨 화상처럼 느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남은 두 사람은 어색함을 모면하려고 서둘러 남은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안주도 먹지 않은 채 서로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우리끼리 건배해요.


여자가 말했다.


우리만의 행복을 위하여


부부가 아닌 두 남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잔을 부딪혔다.


남자가 잔을 비우고 나서 사케  한 병을 더 시켰다.


오늘처럼 부부가 따로따로 움직이는 일은 여태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남편이 따라가거나 아내가 따라갔다. 그도 아니면 일종의 관행 혹은 예의처럼 여자가 나가면 여자가, 남자가 나가면 남자가, 뒤따라나갔다.






다행히 테이블에 남아 있던 남녀는 금방 어색함을 극복하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아, 저기 두 사람이.......


여자가 창밖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다 말고 맞은편 남자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금방 오겠죠.


남자는 힐끗 창밖을 내다 보고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마주 앉은 여자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맴돌았다.      


남은 이들의 웃음엔 자신의 남편, 그리고 자신의 아내에 대한 한결같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들에게 사랑은 믿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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