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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벽 Nov 24. 2022

[장편소설] 매화나무 아래서, 그들은 울었다.

2. 남겨진 이들의 마음

초초와 나나, 두 사람만 이렇게 마주 앉아 있어 본 적은 처음이었다.     


- 우린 다행히 코로나에 걸리지 않고 잘 지내왔네요. 아직 끝난 건 아니지만.     


초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색해지지 않으려면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 그러게요. 백신을 맞았어도 걸리는 사람은 걸리던데, 우리는 운이 좋은 것 같아요.


나나는 웃었다.


- 4차는 맞았어요?


- 3차까진 맞았는데 4차는 안 맞고 차일피일 미루게 되네요. 얼핏 재유행이 시작됐다는 뉴스를 본 것도 같은데. 4차까지 맞고도 코로나 걸려서 고생하는 걸 보면 백신 맞는 게 무슨 의미일까 싶기도 해요. 3차까지 맞은 사람이 고생하는 건 그렇다 쳐도 4차까지 맞았는데 똑같이 고생하는 것 같더라고요. 백신이 효과가 있긴 한 건지 모르겠어요. 너무 급조된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나나도 어색해지지 않으려고 환한 얼굴로 초초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웃으로 만나 가깝게 지내며 종종 술도 마시고 여행도 함께 하며 벌써 햇수로 7년째 가족처럼 친구처럼 지냈는데도 단 둘이 남게 되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대화를 이어나가다 보니 금방 어색함이 사라지고 편안해졌다.      


- 그러게요. 우리도 4차 접종은 아직 안 했어요. 백신을 또 맞아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요. 정부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처음엔 몇십 명에도 온 나라가 긴장하고 몸을 사리는 것 같더니 지금은 수만 명이라도 크게 동요 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초초의 생각이었다.


- 나부터도 코로나보다 독감이 더 걱정돼요. 올해 독감은 예년보다 훨씬 독하다는데, 독감 백신은 맞으셨어요?     


나나가 질문을 던졌다. 마치 침묵이 두려워 말 잇기를 열심히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 예, 우리 부부는 맞았습니다. 나나도 맞았겠죠? 나나는 워낙 꼼꼼하고 잘 챙기시는 성격이니까.     


초초도 나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나의 질문이 반갑고 기쁘다. 질문의 의미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냥 대화를 이어나갈 수만 있다면 바랄 게 없었다.        


- 네, 맞았어요.     


나나도 활짝 웃었다.      


- 꼬꼬를 만난 건 행운이었던 거 같아요.


나나는 얼마 전 일어난 이태원 참사가 떠올랐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아픈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문득 꺼낸 말이었다.


그날 꼬꼬가 해외 출장 중이 아니었다면 아마 틀림없이 코로나 이전처럼 그들도 핼러윈 축제에 동참했었을 것이다.


꼬꼬는 지니, 나나는 재스민 공주로 얼마 남지 않은 삼십 대를 즐겨보려 했었다. 그것은 나나의 생각이었고 꼬꼬도 기꺼이  따라주었다.


낭만이라고는 모른 채 치열하게 공부와 일에 매달린 이십 대에 대한 보상 심리도 적잖이 작용한 선택이었다.


삼십 대에 들어서도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사느라 팍팍한 일상을 견뎌왔다.


덕분에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를 얻었지만 어느새 사십을 바라보게 되었다.


꼬꼬와 나나는 더 늦기 전에 핼러윈을 경험해보고 싶어 몇 해 전 이태원으로 나가 처음으로 가면을 쓰고 치장을 한 채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거리낌 없이 웃고 즐겼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는 일련의 과정들이 무척 행복했다.


꼬꼬와 나나의 축제에는 그런 의미가 있었다. 적대감이나 경계 심 없이 사람들과 어울려 기쁨과 낭만을 쌓아가는 것.


거리를 가득 메운-당시에도 좁은 골목에서 사람에 밀려 흘러가곤 했었다. 하지만 즐겁다 생각했지 위험하다는 생각은 못했다.- 주류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편이어서 조금 망설였지만 막상 나가보니 그건 편견에 지나지 않았다.


꼬꼬와 나나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이십 대엔 거의 이태원 쪽으로는 발도 들여놓지 않았었다. 하지만 몇 해전 핼러윈에서 그런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코로나 규제가 조금 느슨해지자 핼러윈에 참석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사우디 출장 중이던 꼬꼬의 귀국이 연기되는 바람에  나나 혼자 집에서 보내야 했다.


혼자라도 이태원에 가려고 했지만 꼬꼬가 내년에 함께 가는 게 어떻겠느냐, 꼭 가고 싶으면 누구든 함께 가라고 해서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나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다가 뉴스로 참사 소식을 접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함과 끔찍함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이 없다는 이기적 안도감이 복잡하게 얽혀서 흘러내리던 눈물.


어떻게 무너지거나 폭발하거나 하는 일 없이 도시 한복판의 골목에서 압사를 당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처음 속보를 접했을 때는 믿을 수 없었다. 테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을 수는 없는 거라고 두려움에 휩싸인 채로 중얼거렸다.   


- 나나에게도 첫사랑이 있었나요?


초초가 생뚱맞게 물었다.


- 첫사랑!


나나는 되살아난 슬픔을 떨쳐내려고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외치고 말았다.


- 아, 아닙니다.


초초는 자기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손사래를 쳤다.


- 꼬꼬를 만나지 않았다면 초초를 사랑했을지 모르죠.


나나는 활짝 웃었다.


- 영광인데요.


뜻밖의 대답에 초초는 수줍게 웃었다.


- 초초도 좋은 남자니까요. 전 감정적인 사랑보다 이성적 사랑을 윈했어요.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사랑 말이에요. 감정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배제하고 사람의 인품을 보고 사랑하기로 작정하는 거죠.


그 사람을 향한 감정은 너무 뜨겁거나 차갑지만 않으면 돼요. 상대방의 인품이나 성품이 훌륭하다면 사랑하기로 마음먹고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예요.


상대방의 능력이나 배움도 사랑을 키우는 요소가 되기는 하겠지만 전부는 아니죠. 아무튼 감정이 아니라 사랑하기로 마음먹고 사랑을 시작하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사랑도 노력하면 생겨나고 자라요. 나무나 꽃처럼 자라서 열매도 맺고 꽃도 펴요.


그런 의미에서 제 첫사랑은 꼬꼬예요.


감정적인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심지어 짐승도 사랑을 해요. 하지만 감정적인 사랑엔 유효기간이 있고, 이면에 질투라든지 시기심, 미움이 작동하면서 힘들어지잖아요. 이면의 감정들이 과하면 파괴적이게 되고요.


상대방을 공격하고 짓밟는 일도 서슴지 않는 게 사랑의 이면이에요. 전 그게 무서웠어요. 사랑은 좋지만 사랑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감정들 말이에요.  


사랑이 불행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랬겠지만 전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도 전에 뽑아버렸죠.


유전자 기술 덕분에 우리는 늙었다가 다시 젊음으로 되돌아올 수도 있고 그렇게 삼백 년 이상을 살게 될지도 모르는데, 사고로 죽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생물학적으로는 우리가 아주 오래 살게 될 게 거의 확실한 것 같아요. 초초도 알잖아요.


-........


초초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 감정적 사랑으로 함께 하긴 어렵다고 생각해요. 결국은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다 헤어지게 되겠죠.


그나마 좋은 결말일 경우 말이에요. 그래서 전 대안이 이성적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몇 백 년 이상 살게 되면 감정적 사랑으로는 안 될 거예요.


이성적 사랑이라야 긴 세월을 견딜 수 있지 않을까요?


헤어지고 또 만나고 또 알아가고 하는 게 반복된다면 저는 못 견딜 것 같아요.


사랑이 영원하길 저는 바라거든요.


일부일처제도 이성적인 사랑! 이성적인 제도 아닐까 싶어요.


복수의 결혼은 비난받잖아요. 간통죄가 없어졌지만 일부일처제는 여전히 법적으로 유효하고요.


모르죠. 언젠가는 일부일처제가 구태가 될지도..... 일부일처제를 주장하는 사람이 도리어 배척당하는 시대가 올 지 몰라요. 상상도 안 되지만.


초초의 첫사랑은! 비비?


- 아, 음. 제  첫사랑은...... 맨발의 댄서 이사도라 던컨입니다.


초초는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었다. 나나가 물으면 대답하려고 준비해둔 생각이었다.


- 사춘기 당시 전 카프카라든지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 존 치버, 헤밍웨이 등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많은 문학작품을 읽었고, 데미안 덕택에 독일에 관심이 생겼고 이사도라 던컨까지 읽고 알게 되었습니다.


- 사춘기 땐 주로 이웃집 소녀나 연예인을 짝사랑하는데, 초초는 이사도라 던컨을 사랑했군요. 좀 고상해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고상하기보다는 뭐랄까 굉장히 비현실적인 환상에 빠져 있었던 거네요. 그런데 초초의 사랑이 감정적인 사랑인가요, 아니면 이성적인 사랑인가요?


- 글쎄요.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그즈음 저는 꿈을 많이 꾸었습니다. 특히 데미안을 읽은 뒤로 저는 같은 꿈을 많이 꾸었는데 그 꿈에 늘 이사도라 던컨이 등장했었습니다. 저는 싱클레어였고요. 그래요. 싱클레어는 분명 저였습니다.


싱클레어는 아브락사스라 쓰고 던컨이라고 읽을 만큼 그녀의 아름다움에 빠져있었죠. 제가 그녀를 만난 곳은 언제나 노을이 붉게 물든 미라보 다리였습니다.


그녀와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따뜻한 슬픔에 잠겨 껴안곤 했습니다. 우리는 온통 노을빛에 물들어 있었죠.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도 그 꿈은 바래지 않고 그대로 제 마음속에 걸려 있어요. 아마 평생 그 자리에 변함없이 걸려 있을 거예요.


오래전 비비에게도 저의 첫사랑 이사도라 던컨에 대해 고백한 적이 있었어요. 내 마음에 걸려 있는 첫사랑의 그림에 대해서.


- 비비는 초초의 첫사랑에 질투할 사람이 아니죠.


 - 맞아요. 비비는 저에게 그 그림을 오래 간직하라고 했습니다. 아름답다고, 노을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환상이라며.


- 비비다운 말이네요.


나나는 웃었다.


- 저는 아까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꿈속에서 저와 이사도라 던컨을 바라보듯 지금의 나를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 말입니다.


나는 지금 나나를 바라볼 수 있고 그래서 나나의 웃음과 표정에 담긴 감정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데, 정작 나 자신은 바라볼 수가 없다는 생각요.


거울로 보아 왔던 내 모습을 떠올리려고 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한 꿈같더라고요.


기억이 또렷해서 내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고 해도 내가 지금 나나를 바라보는 것과는 다르겠죠. 지금 나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나를 보고 싶었습니다.


나나와 내가 마주 앉아 있는 이 장면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 바라보지 않아도 더 잘 알 수 있잖아요. 자기 자신이니까. 그것이 외모가 아니라 내면이라면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저도 내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 무척 답답하네요, 갑자기.


나나는 웃음을 웃었다.


- 자기의 내면이라고 해서 잘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얼굴에 나타난 것이 더 정확할 수 있죠. 얼굴에는 자기가 생각지도 못한 감정들이 드러나기도 하니까요. 자기가 자기를 전부 안다는 것은 착각 아닐까요?


- 그럼 지금 제 감정이 어떤 것 같아요? 초초가 바라보는 저에 대해 이야기해 보세요.


- 나나는 지금 웃고는 있지만 걱정하고 있어요.


- 제가 걱정하는 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거든요. 그렇지만 제 밑바닥에 감추어진 건데, 그게 느껴져요? 그게 내 얼굴에서 느껴진다고요? 여태 것 그것을 감추려고 웃었는데. 초초의 내면이 투영된 건 아니고요.


- 투영, 그럴 수도 있겠죠. 우린 지금 같은 처지니까요. 아내와 남편을 잃어버린.......


두 사람은 크게 웃어젖혔다. 마음속 불안을 떨쳐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꼬꼬와 비비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간 지 벌써 삼십 분 정도가 지났다. 시간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러려고 대화에 몰두했는데, 시간을 의식하자 불안이 서서히 두 사람의 마음을 옥죄기 시작했다.  


나나는 휴대전화기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녀는 여태 돌아오지 않는 꼬꼬나 비비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성급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딜 갔어?


나나는 마음속으로 물었다. 이웃집 여자였다가 친구가 된  비비에겐 지, 아니면 남편인 꼬꼬에겐 지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어딜 갔어?


어쩌면 나나 자신에게 던진 물음이었는지 몰랐다.


나나는 비비와 꼬꼬가 함께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우릴 두고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지?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아내와 남편을 남겨두고 남편과 아내가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도대체.


두 사람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런 생각을 하다니.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 그들이 돌아왔을 때 얼굴 붉히지 않으려면 동요하지 말아야 해.


어쩌면 남한강변을 걷고 있을지 몰라. 밤이라 강변을 걷기엔 좀 추울 텐데. 그런데 왜? 우리만 남겨 놓고 가버린 거지?


시간이 갈수록 내 마음에 슬픔이 고여와. 왜 나나는 슬퍼지는 걸까?  


나나는 초초가 술 마시는 걸 바라보며 애써 웃음 지었다. 걱정이 아니라 슬픔이 드러나면 수치스러울 것 같았다.


- 우리도 나갈까요?


비비의 남편 초초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한 때 이웃집 남자였지만 이젠 친구의 남편이 된, 아니 친구이기도 한 초초. 그의 얼굴엔 아직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 두 사람 너무 재밌는 모양인데 우리도 나가서 돌아다녀요. 그러다 보면 만날 수도 있잖아요. 아니 어쩌면 우리가 따라 나올 거라 생각하고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요.


초초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즐겁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 그러다 어긋나면 어떡해요. 우린 그냥 술이나 마셔요. 조금 있으면 올 거예요. 내 생각엔 우리가 여기서 기다려줄 거라 믿고 있을 것 같아요.


나나는 술 병을 들고 초초에게 내밀었다. 조금씩 자라는 슬픔을 감추려고 애써 웃음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알았어요. 나나 말이 맞아요. 그게 좋겠네요.


초초는 얼른 술을 마시고 잔을 내밀었다.


초초가 저렇게 서둘러 술을 마시는 건 처음이야. 그래 처음이야. 감추어지지 않는 초조감일까! 아니야. 초초는 약간 들떠 보여. 나나는 스쳐가는 생각들 때문에 잠시 잔을 든 채 바라보고 있었다.


 -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제가 나갔다 올게요. 나나 걱정하지 마세요.


초초는 두 사람이 강변 어디쯤 걷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자신의 아내  비비가 추울 거라는 생각 때문에 걱정이 되었지만 곁에 자상한 꼬꼬가 있어 마음이 놓였다.


- 꼬꼬랑 같이 가는 걸 봐서 그런지 난 별로 걱정은 안 돼요.


초초가  나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는 나나를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꼬꼬도 비비도 그러길 바랄 거라고 믿었다


- 맨 처음 현관 앞에서  비비를 만났을 때가  생각나요.


나나는 술을 따르고 나서 초초의 눈을 들여다봤다. 초초의 눈도 비비처럼 거짓 없이 맑고 착한 눈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 여자인 내가 봐도 예쁘고 단정했어요. 우리가 살던 옛날 그 아파트에서 처음 만났을 때 말이에요. 지금은 더 분위기 있는 여자가 되었지만.


- 나나도 그랬죠. 예쁘고 사랑스러웠죠. 지금은 그때에 비해 한층 성숙한 여인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소녀 티가 좀 났었죠.


- 그때만 해도 꽉 찬 이십 대였으니까요. 그래도 소녀 티는 좀.....  초초가 거짓말하는 건 처음 봐요.


- 거짓말 아니에요. 정말 사랑스러웠어요. 지금도 사랑스럽지만.




나나와 초초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 아마, 비비가 바람 쐬고 싶다고 그랬을 거예요. 나나가 알다시피 비비는 좀 감상적인데 가 있잖아요. 아마 비비처럼 똑똑한 여자가 감성적이지 않았다면 싫었을 거 같아요. 너무 냉소적으로 보여서.


초초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는 침묵을 툭 밀어냈다. 그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 꼬꼬가 그랬을 수도 있고요. 제가 냉소적으로 보이나요?


나나가 말했다.


- 아뇨. 전혀 아니죠. 나나도 똑똑한 미인이지만 친절하고 따뜻하죠.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렇게 가까워지지 못했을 걸요.


- 가만 보니 초초도 아부할 줄 아시네요.


-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죠. ㅎ ㅎ


초초의 웃음이 보이지 않는 나나의 슬픔이 묻어주었다. 나나의 얼굴에 나타나기 시작한 건 슬픔이었다. 초초는 그걸 보고 있었다.


- 꼬꼬가 옷을 벗어 비비의 어깨에 걸쳐줬겠죠? 그는 누구보다 좋은 남자니까.


초초는 나나의 슬픔이 커지는 게 싫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 그럼요. 틀림없이 그랬을 거예요. 초초라도  그럴걸요. 초초도 좋은 남자잖아요.


- 좋은 남자가 되려고 노력해왔지만 꼬꼬만큼은 아닙니다.


초초의 말에 나나는 활짝 웃어 보였다. 꼬꼬를 믿고 싶었다.


- 전화라도 해볼까요?


나나가 말했다. 전화를 하는 게 좋을지 어떨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초초의 의견을 묻고 싶었다.


- 꼬꼬든 비비든 먼저 전화했을 겁니다. 필요하다면 말이죠. 아마 두 사람은 우리도 즐거운 시간 보내길 바라고 있을 거예요.


초초가 말했다.


-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 둘이 나간 걸 아는데..... 전화하기가 싫었어요. 꼬꼬가 직장 동료인 여자와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있을 때도 저는 전화하지 않거든요. 묻지도 않고요. 그게 제가 보여주는 믿음이죠.


나나는 생각지도 않은 말을 하고 말았다.


- 꼬꼬도 비비도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믿어요.


초초는 나나의 눈이 젖어드는 걸 보고 마음이 아팠다. 의심하거나  화를 내면 안 되는데  나나의 슬픈 눈이 마치 성냥개비처럼 초초의 감정에 불을 댕겼다.


- 울지 마세요.


초초는 휴지를 집어 나나에게 건넸다. 다행히 감정은 불꽃이 되지 못하고 꺼져버렸다.

오랫동안 길러와 이젠 몸에 밴 자기 통제 능력이었다.


그러나 약간의 불편함은 남았다.




나나의 휴대전화기에서 메시지 수신음이 울렸다. 눈물을 훔치던 나나가 겸연쩍웃으며 초초를 바라봤다.


- 어서 열어 봐요.


말하는데 초초의 메시지 수신음도 울렸다. 초초는 순간이나마 일었던 자신의 감정이 부끄러웠다.


나나 그리고 초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우린 갑작스럽게 어떤 감정에 휩싸였어.


우리가 그토록 경계하고 염려하던 감정이.......


나나 그리고 초초.

알다시피 난 감정을 극복할 줄 알았어.

우리는 이성으로 감정을 다스릴 만큼 성숙하다고 믿어 왔고

그것이 우리 사랑의 원천이고 아름다움이고

영속성이라고 여겨왔는데......


그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산책을 하다가

우린 도리어 서로를 껴안고 말았어.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키스를 하고 만 뒤였어.

아직 우리 사이에 생긴 감정은 정리되지 않았고

그리고 우린 감정을 속일 수 없다고 판단했어.

우리에게 시간을 줘. 부탁이야.


지금 우리는 어쩌지 못하는 이 감정 때문에

너무 멀리 걸어왔어.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나나. 초초.


우린 여전히 두 사람을 사랑하고 있고

두 사람이 우리를 기다려주리라 믿고 있어.


우리도 며칠 시간이 지난 뒤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


너무 아름답고 격렬해서 이성을 마비시켜버리는

감정에 대해 우리는 언젠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잖아.


우리의 사랑이 다이아몬드라면

그것은 금일 거라고 나나가 말했었는데.


그런 감정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도......  


모든 것을 잃더라도......

아니 잃게 될 걸 알아도 멈출 수 없을지 모른다고.......


하지만 우린 돌아가려고 해.

아니 꼭 돌아가고 싶어.

우리 둘 다 그런 마음이야.


비비와 꼬꼬가.




두 사람은 동시에 어떤 충격을 받고 창밖을 내다봤다.


비비. 꼬꼬 우리가 함께 보냈던 제주 별장으로 가는 게 어때.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고 싶고......

그러나 편한 대로 해.

너무 힘들어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나나가 문자를 써서 초초에게 내밀었다.


- 나나와 초초라고 써야죠.


초초가 말하고 웃었다.


- 아, 그렇군요. 


'나나의 초조  나니와 초ㅈㆍㅡ 나낭ㆍㅡ  나난'  


나나는 오타가 나서 몇 번을 지우고 다시 쓰면서 웃다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어린아이처럼 낮은 목소리로 울고 있었다.


- 난 못 쓰겠어요. 초초가 써 주세요.


나나가 초초에게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 써서 보냈어요.


초초는 꼬꼬와 비비 때문이 아니라 나나의 울음소리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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