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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벽 Mar 05. 2023

도망

별이 머무는 언덕 1

1                              


라몬과 드보라는 밤새 양 떼를 데리고 이동했다. 그리고 동틀 무렵 마침내 도착한 초장에서 먼 친척 양치기를 만났다.


"이 양들을 맡길 테니 돈을 좀 빌려주게."

라몬은 쫓기는 마음을 숨기려고 애써 웃음 지었다.


"나한테 무슨 돈이 있겠나 만, 양들을 맡기려면 내게 먼저 삯을 주어야 할 거야."

라몬과 드보라의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절박함을 본 친척 양치기가 말했다.


"돌아오면 갑절로 돌려주겠네. 며칠, 그래 며칠이면 돼. 만약 수일 내로 돌아오지 않으면 양들은 모두 자네가 가지게. 대신 가진 돈이라도 좀 빌려주게."

라몬은 알 수 없는 믿음과 확신이 있었다. 수일 내로 돌아오게 되리라는.


양치기는 가진 전부라며 이십 데나리온을 라몬의 손에 쥐어주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사흘 말미를 주겠네. 그 안에 안 돌아오면 이 양들을 처분할 수밖에...."


"알겠네."

궁지에 몰린 라몬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오후에서야 마을로 내려온 라몬과 드보라는 순찰 중인 로마 병사들의 눈을 피해 집으로 들어갔다.

 

평소에도 로마 병사들이 보이면 덜컥 겁이 나서 피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들이 멀찍이 지나가는 것만 봐도 숨이 멎을 것 같아 몸을 숨기기 바빴.


집 안 어디에도 사무엘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집을 나와 마을을 뒤졌다. 사무엘이 갈만한 곳과 동네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다. 동네 어디에도 사무엘은 없었다.


 “친구들과 예루살렘으로 놀러 가는 걸 봤는데...... ”

길에서 만난 먼 친척이 전해주었다. 라몬과 드보라도 짐작하고 있었던 걸 확인해 준 것이었다.


라몬이 어렸을 때처럼 요즘 아이들도 밤길을 무서워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놀러 가곤 했다.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지만 예루살렘의 번잡한 길목을 돌아다니며 떠들고 웃는 게 아이들이었다. 어떤 아이들은 영웅심과 들뜬 마음으로 여행객들의 물건을 훔치기도 했다.


“자네 얼굴이 왜 그런가?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양은 어떻게 하고 내려왔지?”

라몬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물었다.

“별일 아니야. 급히 가볼 데가 있어서.....”

“얼굴이 초췌해 보여.”

먼 친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루 만에, 아니 불과 몇 시간 만에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 마음 아팠다. 하지만 어제 찾아와 주셨던 그분을 떠올리며 다 괜찮아질 거라고 마음을 다독였다. 그리고 아내 드보라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다시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놓지 않고 싶었다.




예루살렘 성전 앞은 장사꾼과 순례자들로 붐볐다.


얼마나 많은 양의 멱을 따는 건지.....  마치 큰 비라도 온 것처럼 성전 주위의 배수구를 따라 짐승의 피가 흘러내려가고 있었고 피비린내가 역겹게 올라왔다.


양들의 피비린내는 축제를 북돋우고 사람들을 한 껏 흥분시켰다. 유월절을 앞둔 니산월의 풍경이었다.

  

라몬은 드보라의 손을 잡고 성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곳은 오래전 그분, 소년이었던 그분을 만난 그 자리였다. 어쩐지 그곳에서 기다리면 사무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사꾼과 순례자들 틈바구니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오래전 만났던 그 소년의 앳된 모습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당시 아주 잠깐이긴 하지만 라몬도 성전 밖에서 양을 팔았었다.


하지만 소년을 만나던 당시엔 성전 상인이나 제사장에게 양을 팔고 있었다.


니산월엔 어린양의 값이 오르지만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은 해마다 끈질기게 어린양들의 값을 깎아내렸다.


라몬은 제사장들이 자신의 양을 가져다가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에게 팔도록 해 폭리를 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여행객들에게 팔아 남기는 차익이 적게는 열 배 많게는 스무 배가 넘을 때도 있었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야망이 큰 제사장에겐 야망의 크기만큼이나 많은 돈이 필요했다.


산헤드린에 진출하려는 그들은 많은 돈을 써서라도 대사제 가문과 인맥을 쌓았다. 거기다 로마와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사제들이 더 많은 돈을 요구하면 어린양은 물론 비둘기, 염소 등의 값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러나 정작 양치기들은 제값을 받지 못했다.      


어린 라몬은 제사장들의 탐욕스러운 장삿속에 대해 무심했고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되면서 자기의 양에 대한 가치를 생각하게 되었고 양들의 죽음이 너무 값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직접 양을 팔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가난하고 힘이 없는 라몬이 성전 안에서 양을 팔 수는 없었다. 성전 안에서 양을 팔려면 권력과 자릿새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성전 근처에서 장사를 시작했었다. 라몬은 더 나은 가격으로 양을 팔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성전 안에서보다는 훨씬 쌌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의 어린양을 잘 사가지는 않았다.


"이건 흠결이 있어서 제사에 쓸 수 없다는 걸. 안 됐지만 돈을 돌려주게."


어쩌다 라몬의 어린양을 사간 사람들도 곧 양을 들고 와서 항의하곤 했었다.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높은 자릿세를 낸 성전 상인들을 보호하고 자신들의 잇속을 차리려는 제사장들이 성전 바깥에서 파는 어린양들을 흠결을 이유로 받아주지 않는 것이었다.


라몬은 자신의 양이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분통 터졌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는 거밖에. 


그 후 라몬은 장사를 접고 어쩔 수없이 헐값에 제사장들이나 성전 상인들에게 어린양을 넘겨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날도 라몬은 자기 양을 장사꾼에게 넘기고 돌아서 나오던 중이었다.


라몬은 문득 한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어쩌면 갈색 머리의 소년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인지 몰랐다.   


“얘야, 혹시 부모를 잃어버렸니?”

라몬은 조심스럽게 소년 앞으로 다가서서 물었다. 왜 그렇게 물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강한 이끌림 때문이었는지 몰랐다. 라몬은 소년에게 무슨 말이든 해야만 했던 것 같았다.  


“.......”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을 뿐이었다.


“난 베들레헴 출신의 목자란다. 이젠 제법 많은 양을 가지고 있지.”

라몬은 소년과는 아무 상관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전, 아빠와 함께 갈릴리 나사렛에서 왔어요.”        

그리고 소년은 라몬의 몸에서 건초더미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냄새가 좋아요,라고 했던 것도 같았다.


“오늘 죽임을 당하는 양들도 어제까지만 해도 푸른 초장에서 꼴을 먹으며 평화롭게 지냈겠지요!”

소년은 그렇게 덧붙였다.


“그랬지.”

라몬은 소년을 보기가 미안했다.


“양들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는 거잖아요.”

소년이 말했다.


“그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지.”

라몬이 말했다.


“나도 언젠가는 양처럼 죽을 거예요.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소년이 말했다.


“넌, 죽지 않아. 양이 너를 대신해서 죽을 뿐이지.”

라몬은 소년의 목소리가 너무 진중해서 당황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

라몬의 설명에도 소년은 말이 없었다. 


“사실은 나도 어린양을 파는 것이 마음 아프단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해. 양치기가 양을 팔지 않으면 사람들은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거든.”

라몬은 소년의 눈에 어떤 깊은 슬픔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보았다.


"......."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요,라고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어쩐지 너에게 어린양을 한 마리 주고 싶구나. 그 양을 하나님께 드리면 기뻐할 거야.”

라몬이 말했다.


“전 제사 드릴 필요가 없어요. 아무 죄가 없거든요. 그러나 제가 어린양이 되어서 속죄의 제물로 바쳐져야 해요. ”

소년은 또다시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슬프고 고독한 인상을 강하게 남겼다.


“하하....... 넌 전설을 너무 많이 들었구나. 그건 오랜 옛날이야기지. 이젠 누구도 사람을 제물로 바치지는 않아.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내가 어떻게든 너를 도울게."

라몬은 소년의 슬픔과 외로움을 달래주고 싶었다.


"......."

소년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재밌는 이야기 한 가지 들려줄까."

라몬은 소년을 즐겁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내 양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단다. 멀리 있다가도 내가 이름을 부르면 달려오지. 간혹 맛있는 풀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혼자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는 양도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쫓아와. 양이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순종하는 것처럼 나도 양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다 기억하지.”

라몬은 말했다.


“양이 천 마리가 넘어도 기억할 수 있어요?”

소년이 조용히 웃음 지었다.


“아직 천 마리의 양을 가져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양을 사랑하면 양이 나를 따르고 나도 양들을 기억할 수 있을 거야. 숫자는 상관없지 않겠니?”

라몬은 양치기로서 자긍심을 느꼈다.


"아저씨는 좋은 양치가 분명하네요."

소년이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양을 팔러 오셨어요? 양들은 어떡하고  함께 오셨어요?. 양을 팔겠단 말씀은 안 하셨잖아요.

사무엘이 다가와서 소리쳤다. 반가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사무엘, 우린 널 찾으러 왔다. 어서 빨리 여기서 벗어나자.”

생각에서 깨어난 라몬이 사무엘의 팔목을 잡아끌며 말했다.


“아버지, 전 친구들을 기다려야 해요."

사무엘이 팔을 빼내려고 몸부림쳤다.


"사무엘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


“왜!”

사무엘은 드보라를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이럴 시간이 없어.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 지금은 어서 가자.”


"........"

드보라의 간절한 눈빛과 마주친 사무엘은 체념한 듯 앞장서 걸었다.




그들은 가파르고 메마른 산등성을 따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애굽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그러나 라몬과 그의 가족이 겨우 산등성이 하나를 넘기도 전에 로마군 추격대가 뒤따라왔다.


라몬은 투봉과 지팡이를 들고 마주 서서 로마 병사들을 기다렸다.


도망가느라 기진맥진한 뒤에 붙잡혀 죽느니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맞서 싸우는 것이 낫다고 라몬은 판단했다.


짐승도 달아나다 기운이 빠지면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해보고 먹잇감이 되고 만다.


작더라도 용감한 짐승은 달아나지 않고 맞서 싸운다. 그러다 보면 덩치 큰 짐승이 도리어 그 앙칼진 저항에 놀라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라몬은 양 떼와 함께 야생에서 자랐고 일생을 들짐승과 맞서며 살아왔다.


이제 나이 먹어 좀 둔해졌지만 아직은 대여섯 명 정도의 병사는 대적할 자신이 있었다.


“우리는 너를 죽이려고 온 게 아니다. 빌라도 총독께서 너를 보고 싶어 한다. 그러니 순순히 오라를 받으라.”

로마 병사들이 라몬과 그의 가족을 둘러싸자 수비대장이 소리쳤다.


“그럼 내 아내와 아들을 돌려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로마 병사들의 뼈를 내 투봉과 지팡이로 부러트려주겠다.”

라몬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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