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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면 Oct 13. 2024

21. 바람에게 바라기를

2023/01/28


49제를 치르던 날은 하늘이 아주 파랬다. 풍성히 차려진 제사상 위에 가져간 영정 사진을 올리고 절했다. 아빠와 둘뿐이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편했다. 찬통이나 비닐 같은 걸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준비된 음식을 가져올 수는 없었다. 빈손으로 나서려는 우리를 직원분이 급히 잡으며 비닐을 건넸다. 다른 건 그냥 두더라도 비싼 과일이나마 가져가라고 하셨다.

추모 공원 매점에서 유골함 밑에 까는 잔디 모형과 작은 꽃병 장식을 사서 넣었다. 무릎보다 한참 아래인 위치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음번에 올 땐 꼭 사진을 가져오리라 다짐했다. 사진. 그날 자취방으로 돌아와 새 앨범을 사서 끼워 넣었던 엄마의 사진을 다시 죽 돌아보았다. 내가 전혀 모르는 엄마의 모습이 가득했다. 칼단발에 깻잎 머리를 하고 교복을 입은 중학생 엄마. 과감한 비키니를 입고 자신 있게 미소 짓는 엄마. 은색 양복에 더벅머리 남자와 기찻길을 걷는 엄마. 그리고 흰 블라우스에 갈색 재킷을 입은, 영화배우 같은 엄마. 이 사진이다. 속 썩이는 나도 없고, 아빠도 없던 시절. 아마도 눈부시게 행복했을 순간. 조막만 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해 인기가 많았을 젊디젊고 곱디고운 엄마. 누구라도 한눈에 반할 것 같은 사진을 보고 억울해졌다. 왜 이런 모습이 있었다고 자랑하지 않았을까. 문득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생전 엄마는 피부병으로 고생했다. 배에는 제왕절개한 수술 자국이 발간 줄로 선명히 남아 있었다. 어렸을 적 비닐장갑을 끼고 약을 발라 주며 왜 이러느냐 물었을 때 엄마는 원망이 담긴 눈과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너를 낳고 이렇게 되었지.”

내가 그랬구나. 나 때문에……. 상처인 줄도 몰랐던 상처가 깊이깊이 죄의식을 키워 나갔다. 목욕탕에서 다른 아줌마들이 옮는 병 아니냐며 대놓고 면박을 준 뒤로 근처에도 가지 않던 엄마. 사진을 본 순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딸에게 모진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심정을.

나는 새롭게 바랐다. 내세라는 게 꼭 있기를. 엄마가 나로, 내가 엄마로 한 번쯤 태어나 같은 삶을 살아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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