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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 e a dan Apr 21. 2023

조금 더 들어, 조금 더 해 봐

바흐 시칠리아노 BWV 1031

  고등학생이 해볼 법한 반항이 뭐가 있을까. 땡땡이, 흡연, 가출? 15년 전, 고등학생 s_e_a_dan(씨단)이 할 수 있던 반항은 피아노 입시곡 연습할 시간에 내 취향의 곡을 쳐보는 정도였다. 화끈함이라곤 없었다.





  저음역에서 어디론가 달려가듯 시작하는 8분음표 위에 음이 하나둘 쌓이고, 점점 음역을 넓히며 양팔이 120도 정도 벌어졌을 때 “쾅!” 찍어주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작곡과든 피아노과든 입시를 준비해 본 사람이라면 어떤 곡인지 알 것이다. 내 피아노 입시곡은 밝고 진취적인 느낌의 곡이었다. 활자로만 봐도 나와 잘 안 어울린다.





  입시생에게 입시곡 외의 곡을 치는 것만 한 사치가 없다. 다른 곡을 치는 순간 30분은 순삭이며 이는 실기 준비든 수능 준비든 남들보다 뒤처질 수 있다는 뜻이다. 악의 유혹은 바흐의 시칠리아노(BWV 1031)로 시작됐다. 장조가 아닌 단조, 빠르지 않고 느리고 간결한 곡. 도입부 4마디가 지나면 아련하면서도 숭고한, 비통함도 느껴지는 선율이 펼쳐진다. 시련이라곤 겪어보지 않았던 10대 아이에게 왜 이렇게 매력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좋았다. 그때만큼은 시험, 평가, 부모님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책임감 등 아무런 걱정 없이 그냥 좋았다. 역시 멜랑꼴리함은 어렸을 때의 나와도 떼어놓을 수 없었나.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이 곡을 들었다. 각 잡고 들은 건 오랜만이었는데 역시나 좋았다. 그러나 15년 전 그때와 다른 부분이 마음에 맴돈다. 고등학생 땐 수험생으로 복귀하느라 앞에 몇 마디만 연주하여 단조 부분만 반복해서 들었다. 4마디 뒤에는 같은 선율이 장조(나란한 조)로 제시된다. 그때 아주 조금만 더 연주했더라면 희망적인 장조 선율을 만날 수 있었을 거다. 바로크 시대에 나란한 조로 모티브를 제시하는 건 아주 자주 쓰이던 작곡법이다. 음악과 친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비유하자면 단조에서 제시된 선율이 나란한 조인 장조(밝은 분위기)로 반복되어 제시되는 것은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고 꼭 들렀다 가는 느낌이랄까. 단조 선율 뒤에 장조로 선율이 제시될 것을 그때도 알고 있었을 텐데. 조금만 더 들을걸. 조금만 더 연주해 볼걸.





  250년 전 바흐가 나에게만 속삭이는 것 같다. “조금 더 들어, 조금 더 해봐, 조금 더 가봐! 예상치 못한 찬란함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역시 음악의 아버지답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바흐님!










  시칠리아노란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의 농민에게서 유래한 춤곡입니다. 바로크 시대에 시작된 이 장르는 8분의 6박자, 8분의 12박자가 많으며 펼친화음으로 반주됩니다. 점 리듬 선율이 특징적이며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를 풍깁니다. 악보를 읽으실 수 있는 분들은 아래 악보를 참고하며 시칠리아노의 특징을 느끼며 감상하면 더 좋을 것입니다.


(왼) 펼친 화음 / (우) 점 리듬 선율










시간이 없다면 18초~32초 & 54초~ 1분 9초 이 두 부분만 비교해서라도 들어보세요.

여러분의 소중한 약 30초가 아깝지 않을 겁니다.


https://youtu.be/wmRtH0TYkw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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