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
3개월 전 수업 시간에 있던 일이다. 서양 음악사를 대표하는 작곡가 8명과 그들의 음악을 듣고 맞히는 것이 수행평가였고 평가 범위에는 내가 사랑하는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도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작곡가와 관련된 다양한 일화들을 소개했고, 라흐마니노프를 소개할 땐 내 애정을 담아 아래와 같이 말했다.
“너희는 누군가가 너무나도 좋아서 짜증 나고 화난 적이 있니?”
“아니요, 좋은데 왜 짜증이 나요?”
“선생님은 그래, 이 사람, 라흐마니노프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너무 좋아서 짜증이 나고 ‘난 왜 이 사람처럼 곡을 쓰지 못할까’라는 생각에 우울하고 자괴감 느끼고 너무 좋아서 화가 나.”
이런 내 설명에 “쌤 인성 왜 그래요ㅋㅋ”라는 아이도 있었고, 어떻게든 공감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도 있었다. 며칠 후 수행평가 당일. 내가 교실에 들어가기 전, 아이들은 기특하게도 서로 문제를 내주며 열심히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내 귀에 꽂힌 말. “이거.. 그.. 음악쌤 빡치게 한 사람!” 맞다. 그때 들린 음악은 라흐마니노프의 곡이었다. 라흐마니노프를 향한 나의 마음이 아이들의 언어로는 이렇게 표현되는구나.
‘한국인이 사랑하는 클래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에는 그가 겪었던 좌절과 고뇌, 이를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사투가 담겨 있다. 이 곡을 발표하기 전 초연했던 교향곡 1번이 참담히 실패하여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절망의 끝에서 한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고 이때부터 ‘자기 암시 요법’을 접하게 된다. 자기 암시 요법이란 환자에게 가벼운 최면을 걸고 귓가에 필요한 말을 반복하는 것인데, 라흐마니노프의 경우에는 “당신은 새로운 협주곡을 씁니다. 그 협주곡은 성공을 거둡니다.”를 읊조리는 식이었다. 이에 자신감을 되찾은 라흐마니노프는 새로운 대작에 도전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두는데, 바로 이 곡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라흐마니노프 작품의 성공과 실패, 더 나아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에 영향을 미친 건 별다른 게 아니라 ‘된다, 할 수 있다, 성공한다’는 자기 암시였던 것이다. 물론 기본적 소질과 실력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이런 대가와 나의 음악적 역량을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임을 잘 알지만 그래도 그를 통해 희망을 얻는다. 예전엔 너무 좋아서 ‘빡치기만’ 했던 마음이 이제는 음악에 대해 더 연구하고 싶은 열의로, 열정으로 바뀌고 있다. “음악쌤을 빡치게 한 사람” 덕분에 당분간은 계속 “음악쌤”의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