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사티 짐노페디 1번
10월부터 니트를 꺼내 입을 정도로 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게 12월은 완전 무장의 계절. 바람에게 일말의 공간도 내어주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비장하게 밖으로 나섰다. 괜한 자존심 부리듯, 불지도 않는 바람과 싸우며 옷깃을 여미던 내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 "아늑해 보여! 포근하겠다." 길 모퉁이에 있는 연노랑 빛의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고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풀렸다. 이 추운 겨울에 포근함을, 따뜻함을 느끼다니. 생각해 보니 '따뜻함, 포근함'이 잘 어울리는 계절은 겨울인 것 같다. 영하를 밑도는 이 날씨에 아이러니하게도. 반대로 '시원함, 청량함'과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은 만물을 녹일 듯한 더위의 한여름. 따뜻한 겨울과 시원한 여름. 길 한복판에서 계절의 역설을 깨달았다.
계절의 역설이 전해준 교훈은 비단 사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깊은 절망의 골짜기에 빠져 슬픔에 허우적댈 때 가장 희망찰 수 있다. 완만한 산등성이보다 깊은 협곡에서 폭포의 세찬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듯이, 좌절의 끝에서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오히려 뚜렷이 볼 수 있다. 같은 6등성의 별이라도 환한 곳보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더 밝게 빛나는 것처럼.
이 글과 어울리는 곡으로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1번’이 떠올랐다. ‘짐노페디’는 그리스어로 ‘벌거벗은 소년들’이라는 뜻인데 이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던진, 즉 전통적인 형식과 불필요한 장식을 던져버린 간결하고 단순한 음악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곡의 작곡가 에릭 사티는 프랑스 신고전주의 음악의 선구자로서 ‘가구음악’을 창시한 사람이다. ‘가구음악’이란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없는 배경 음악으로 집 안의 가구처럼 필요하기는 하지만 특별한 집중을 요구하지 않는 음악을 말한다.
음악만 들으면 사티는 굉장히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독특한’, ‘이단아’라는 단어 없이는 설명이 어려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또한 자기 전 듣기 좋은 편안한 음악으로 종종 추천되는 이 곡에는 사실 ‘느리고 비통하게 연주’하라는 뜻밖의 지시가 적혀 있다. 약 150년 전 작곡가의 비통함을 통해 현대 사람들은 잔잔한 위로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삶과 음악에서 또 한 번 계절의 역설이 준 교훈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