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에 사다 심은 회양목이 이제 제법 컸다. 집 앞뒤로 이 곳 저 곳 줄 세워 심은 것이 수백 그루는 족히 되는데, 하나하나 둥글게 키우려니 손길이 자주 간다. 쓰던 전지가위가 쉬 망가져서 새로 하나 샀는데, 이번엔 오래 쓸 양으로 좋은 놈으로 하나 골랐다. 품질이라는 것이 언뜻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서 이름 난 생산지를 보고 좀 비싸지만 믿고 샀다.
대학 2학년 때이던가, 성북동에서 가정교사를 할 때이다. 그날 2층에서 잠시 쉬는 참인데, 내려다보이는 아래층 거실에서 주인 아주머니께서 친구분들과 잡담이 한창이다. 드문드문 들리는 것이 가정교사 이야기인가 본데, 아주머니 말씀하시기를, “그래도 거기 대학 학생이 낫지, 좀 비싸더라도...” 옳거니, 내가 거기 대학 학생이라서 나의 품질이 인정되는가 보다.
달포 전에 사다 심은 사과나무, 석류나무, 무화과나무가 뿌리를 잘 내려야 할 텐데. 아직도 싹이 날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이놈들이 열매를 맺으려면 몇 해나 더 기다려야 할까? 감나무도 한 그루 심으려다 잘못하면 박쥐가 꿰인다고 해서 그만두었다.
우리는 학교 뒤 돌산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여느 때처럼 산기슭 주막집 앞마당 평상에 걸터앉는다. 늦가을인가? 잎이 지고 없는 가지에 빨간 감만 주렁주렁 달려 있다. 높고 푸른 하늘을 붉은 감이 가을바람을 타고 가지 채 휘젓고 있다. 우리는 고향이 같기에 고향 친구이고, 마음이 맞기에 친한 친구이고, 술을 좋아하기에 술친구이다. 열매를 맺기에는 아직 품새가 낮더라도, 우리들의 젊은 생각은 훨훨 날아서 다니는데 땅에 붙은 두 다리로는 될 일이 아니라서 우리는 술을 타고 날아다닌다. 가난해서 정의로운 우리는, 올라가는 사글세를 감당치 못해 기어이 양철지붕 밑으로 이사를 해야 하는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가진 자를 안주 삼아 잘게 씹으면서 술을 마신다.
우리 집 뒷마당과 옆집 뒷마당은 담이 없다. 어디까지가 우리 땅인지도 분명치 않다. 옆집은 자기 집 뒷마당을 손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르신 내외가 연세 탓인가 힘이 부치시는지 지난 수십 년간 그냥 내버려 두어 아예 야생의 숲이 되어 버렸다. 넝쿨은 나무를 타고 위로 올라가고, 나무는 숨이 막혀 더 위로 키를 키우고. 넝쿨은 뒤쫓아 감고 올라가고. 품이 좀 넉넉한 놈은 바람을 타고 훌쩍 옆 나무로 건너 타기도 하고. 올라가고, 잡아채고, 둘러씌우고… 여기는 온통 재주껏 살아가는 세상이다. 몇백 평은 넘어 보이는 땅이 온통 엉키어서 꽉 차버렸다. 여기에 무슨 질서가 있는가? 보이지 않는 손이라도 있는가? 내 눈에는 그냥 온통 센 놈이 지존으로 행세하는 폭력의 세상이요, 살겠다고 외쳐대는 아우성이다.
막걸리가 뱃속에서 열기를 올릴 때쯤 되면 우리는 모두 엘리트가 된다. 사회의 계층과 구조를 종으로 횡으로 갈라서 우리들이 세운 새로운 순서와 질서에 따라 짜맞추기를 한다. 천박한 자가 더 위로 올라가는 모순의 사다리를 우리는 통째 놓고 수술한다. 하늘까지 오를 귀한 “능력”이 넝쿨같이 얍삽한 “기회”에 휘감기는 것에 격분하며 가뿐히 자르는 전지가위를 들이댄다. 그것은 우리의 당연한 임무이고 지고한 권리이다. 엘리트이니까.
옆집 정글에는 별것이 다 산다. 크고 작은 도마뱀은 종류가 다양하고, 야생 칠면조는 높은 나무 위에다 아예 저녁 잠자리를 틀고 잔다. 모양은 뽀얗게 귀티 나는 것이 목청은 뚝배기 깨어지는 소리를 하는 유황머리 앵무새(cockatoo), 새벽마다 교회당 종소리보다 더 우렁차게 잠을 깨우는 호주물총새(kookaburra), 초록과 빨강이 수 놓듯이 아름다운 진홍잉꼬(lorikeet), 부리가 노란 목청이 좋은 이름 모를 회색 옷 입은 작은 새, 여기는 정글이다.
엘리트는 어느 날 갑자기 거인국에 떨어진다. 하늘조차 보기 힘든 정글 속이다. 세월이 흐르고, 학의 모가지처럼 고고하던 엘리트는 차츰 숲 속에 잠긴 한 그루 키 작은 나무가 된다. 막걸리로 재단하던 그 계급의 사다리에 이제는 원숭이 꼬리처럼 휘감고 달려 있는 나의 모습을 너에게서 본다. 너의 모습을 나에게서 본다. 거인국에서 결국 소인이 된 나는, 그리고 너는, 작은 책상 하나 끼고 앉는다. 마음이 허전할 때 문득 엘리트의 꿈을 가만히 꺼내어 본다. 기어이 거인이 되리라. 꼬리에 힘을 튼튼히 올리리라. 지금은 미약하나 저 사다리를 높이높이 휘감고 오르리라. 거인이 되어 하늘을 보리라.
몇 년 전 다 정리하고 이곳으로 왔을 때, 우리 집 뒷마당도 기실 옆집 것과 오십보백보였다. 자식 놈들이 다들 제 살기 바빠 뒷마당 출입 끊은 지가 이십 년은 되었으니. 내가 “정원개발 5개년계획”을 세우고 5년이 지난 지금 우리 집 뒷마당은 꽤 근사하다. 흐르는 도랑에 축대를 세우고, 비탈진 땅을 깎아 평탄하게 고른 다음 두툼한 나무로 긴 의자를 만들어 크게 빙 둘러 여러 개 앉히고, 이런저런 화초랑 묘목이랑 구분 지어 가꾸어서, 보기가 편안하다. 뒷집과의 콘크리트 옹벽이 위로는 내 손든 키만큼 높고 옆으로는 수십 발이나 긴데, 얼마 전에 여길 화폭 삼아 자작나무 숲을 빽빽하게 일구었다, 행여 솔거의 새가 머리라도 부딪칠까 저어된다.
비록 길은 다르지만, 나는, 그리고 너는, 세상 구석 구석으로 구도의 길을 떠난다. 세상을 풍요롭게 할 지식을 구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할 지혜를 찾는다. 그렇게 참 바빴다. 그제서야, 불어난 몸집으로 얼굴을 내민다. 하늘을 본다. 내가 먼저, 네가 먼저. 세상이 나를 본다, 세상이 너를 본다. 같은 하늘 아래 있다. 같이 산다. 내가 맡은, 네가 맡은 세상을 가꾸어 간다. 도랑이 있으면 축대를 쌓고, 비탈이 지면 평탄케 하고, 풍경이 삭막하면 이쪽은 빨강 화초로, 저쪽은 노랑으로 누빈다. 내가 있어, 네가 있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요로워진다. 아름다워진다. 그래서 좋다. 이제 거인이 되었는가? 우거져 가렸던 하늘길을 열었는가?
지난날, 거인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살아야 하는 당위인 줄로 알았다. 호떡집 불 난 듯 살았다. 그때는 눈부시도록 찬란한 빛(光耀)이어야 했다. 그때는 통 크게 쓸어 담는 마음(和流)이어야 했다.
이제는, 날이 맑은 날, 하늘과 맞닿아 깨끗하게 뻗어 있는 수평선을 보면서 가끔 생각한다, “저기 저 수평선이 세상 모든 이의 삶의 투영이라면 내가 살아온 삶의 흔적이 저기 저 수평선 어디 매쯤 보태어져 있을까?” 조금은 조감하는 위치에 설 수 있는 나이가 된 나는 또 생각한다. “세상의 수많은 이들은 저렇게 흔적을 남기고 결국 어디로 갈까? 위로 갈까? 높은 하늘로? 아니면 아래로? 깊은 물 속으로?” 답을 알기에는 나의 조감하는 위치가 아직은 너무 낮은가?
이제는, 그래도 “왜 사냐건 웃지요.” 하던 말을 조금씩 알아 가는 연륜이 되니,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와도 삶을 놓고 이야기하는 여유가 생겨 좋다.
이제는, “빛이로되 번쩍이지 아니하고(光而不耀), 어울리되 휩쓸리지 아니하는(和而不流)” 그런 삶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