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때에, 가깝게 지내던 다른 유학생 한 명이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몇 살 아래이고 전공도 서로 달라, 나는 공학, 그이는 신문방송학. 그래도, 서로 한국 사람이고 또한 동향이라는 연유로 해서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이 친구는 경북 문경에 노모 한 분만 계셨는데, 밭떼기 겨우 몇 마지기 가지고 어렵게 사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자기 마누라를 미국에 데리고 올 형편이 되지 못하여 문경에서 시어머니 모시게 하고 자기 혼자만 와서 공부하고 있었다. 공부는 잘하는지 못하는지 내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친구 주머니 형편은 한 학기 한 학기를 그저 살얼음 딛듯이 넘어가는 극빈의 유학생이었다. 미국은 대학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장학금을 받게 되면 생활비에다 추가로등록금까지 면제받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생활비 등록금 모두 자기가 해결해야 하는 몫이기 때문에 유학생들은 장학금을 받기 위하여 그저 목을 매다시피 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더욱이나 “후방지원”이라고는 전혀 바랄 수 없었으니, 학기마다 생활 자체가 곡예와 같은 것이었다.
이 친구는 그래도 기죽는 형이 아니라서, 가끔 한국 학생들끼리 모일 때면 자기 전공에 걸맞게 “풍”을 얼마나 세게 토하는지 좌중은 그저 입 벌리고 멍하게 귀만 기울이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공부는 게을리하지 않아서, 이 친구 짧은 기간에 연구를 마치게 되었고, 대충 6개월 후에는 학위논문을 제출할 수 있게끔 되었을 때였다. 장가간 남자라면 마누라 호강시키고 싶은 마음 한 번쯤 가져보지 않은 사람 없겠지만, 이 친구 특히 그럴 것이, 서울서 유수한 대학까지 나온 마누라를 구름도 쉬어 넘는다는 문경 골짜기에다 귀양 보내어 한두 해도 아니게 김매기 시켰으니 한국 돌아가기 전에 마누라 불러 미국 구경이라도 한번 시켜주고 싶었으리라. 그 당시, 홀트양자회인가 어디선가 어린아이를 미국으로 입양시켜 보내는데 이런 아이 한 명 맡아서 비행기에서 우유 먹이고 기저귀 갈고 하며 “아기 돌봄이”을 해 주면 비행기 비용을 거의 내지 않고 미국 올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어떻게 어떻게 주선하여 이 방법으로 부인을 미국으로 모셔 오게 되었다. 마누라 온 후에도 “풍”이 새기는 했지만, 날카롭게 세우던 가시가 좀 누그러진 변화는 있었다. 하루라도 공부를 빨리 마치는 것이 경제의 질곡에서 헤어나는 지름길임을 익히 아는 이 친구, 혼신의 힘으로 마지막 핏치를 가해 논문 제출에 성공하였다. 이제 고국으로 금의환향할 일만 남았는데, 오호라 이 친구 큰일이 두 가지가 생겨버렸다.
그동안 고국의 여러 곳에 직장 문제를 알아보았는데, “운때”가 맞지 않았는지 오라는 곳이 없었다. 돌아가서 먹고 살 일은 둘째 치고 남편 박사 되면 비단 방석에 앉는 줄로만 아는 마누라 보기가 말이 아니었다. 사실 유학생들은 공부하는 동안에는 박사만 되면 오라는 곳이 줄을 설 것이라는 무지개 같은 생각을 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 결국은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깊은 허탈감에 빠지게 된다. 박사들이 사는 세상도 세상이기에 거기에도 생존경쟁이 있고 적자생존의 이치가 엄연히 적용되는 것이다. 더욱이 경제적인 면만 볼라치면 별로 수지맞지 않는 장사가 공부해서 먹고사는 직업이라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 친구 둘째 문제는, 돌아가는 비행기 삯이 부인 것까지 해서 몇백 불이 모자라는 것이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여행사에 가서 애걸하다시피 하여 깎은 결과가 그리했다. 미국아이 한국으로 입양 가는 일도 없을 테니 “아기 돌봄이”도 안되고. 이 친구 염치 불고하고 동향 선배 유학생에게 부탁해 보기로 했다. 담보라고는 “직장도 못 잡은 신용”밖에는 없지만 그래도 부인 대동하고 그 유학생을 찾아갔는데, 모진 세상 어수룩하게 살아가는 이 유학생부부는 여윳돈이 쪼금 있는 터라, 사정을 듣고는 쾌히 승낙하고, 좀 더 필요하면 더 도와주겠다고 했겠다. 이 친구 어물쩍거리다가 옆에 있는 마누라를 돌아다보니, 부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시어머니 선물이라도 하나 마련하게 조금이라도 더…”
이렇게 해서 귀국하게 된 이 친구, 처음에는 이 대학, 저 대학, 구걸 강사 신세로 고생한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그리 오래지 않아 신문으로 방송으로 예의 그 날카로운 “풍”을 터뜨리며 “바로 가는 사회”를 구현하기 위하여 살아가는 저명 교수가 되었다.
나는 지금 이 시각 오래된 나의 지난 일 한 토막을 회상하면서, 지금 나의 주변에 있는 우리 한국 학생들을 바라보며 한 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조금은 배가 고파야 정신이 맑아진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