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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소방관 Oct 16. 2020

엄마를 태우고 간 하얀 구급차

어린 내가 본 119아저씨들


콜록콜록



여지없이 엄마는 기침을 심하게 다. 어느 순간 시작된 기침은 더욱 심해졌고, 결국 엄마는 숨이 넘어갈 듯 자지러지며 쓰러졌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고통스러운 표정은 무섭기까지 했다. 어린 시절 엄마의 이런 모습은 나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엄마는 천식 환자였다. 그것도 중증이었다. 언제부터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릴 때부터였다. 외할머니 말로는 나를 낳고 나서 엄마가 천식을 앓기 시작했다고 한다. 엄마는 늘 거꾸로 된 기역 자 모양의 천식 호흡기를 가지고 다니며 기침의 조짐이 보인다 싶으면 호흡기를 입에 대고 크게 한번 들이마셨다. 엄마의 기관지는 보통 사람들보다 심하게 약했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기침과 가래를 달고 사셨다. 환절기에는 증상이 더욱 심해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갔다. 여름엔 집 안에 모기향도 피우지 못했다. 모기향에 피어오르는 연기가 엄마의 기관지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잘 때 이불을 펼 때도 조심해야 했다. 약간의 먼지바람만 일으켜도 독한 기침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겨울엔 늘 마스크나 목도리로 입과 코를 가리고 계셨다. 기침 증상은 특히 밤에 심했는데 누워서는 도저히 기침이 멈추지 않아 엄마는 늘 벽에 기대어 앉은 채로 잠이 드셨다. 아니 잠을 못 주무시고 밤새 기침을 하셨다. 엄마가 죽을 듯이 기침을 해댈 때마다 난 심장이 두근거렸다. 엄마가 정말로 죽을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피가 섞인 가래를 토할 때면 난 소스라치게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형이 나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 마루에서 함께 울었다. 형제의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엄마는 억지로 기침을 참는 듯했지만 이내 다시 고통스러운 기침은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천식에 좋다는 약을 구해 사방으로 다니셨다. 용하다는 한약방을 전전했고 대구의 큰 대학병원까지 엄마를 데리고 다니셨다. 그래봤자 그때뿐이고 차도는 없었다. 그나마 괜찮은 방법이라면 깨끗한 환경에서 편히 쉬시는 건데 시골 살림에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 앞에서 가게를 하셨던 아버지는 농사도 함께 지으셨는데 밭에 일하러 나가신 아버지가 없으면 가게 일은 엄마 몫이었다. 시골 동네 가게가 다 그렇듯 동네 아저씨들은 가게 안 마루에 앉아 막걸리나 소주를 마시며 담배를 피워댔다. 지금이야 실내 금연이지만 그 시절은 그렇지 않았다. 너도 나도 담배를 입에 물고 가게 안이 뿌옇게 될 때까지 연기를 뿜어댔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입을 가리고 눈을 찡그리며 기침을 참으셨다. 나는 가게 안에서 술을 마시는 동네 아저씨들이 미웠다.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것이 중요한 지도 몰랐던 나는 술을 안 팔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했다. 엄마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눈치였다. 그 마을에서 나고 자란 엄마는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다 마을 어른들이고 일가친지들이었으니 술을 마시던 담배를 피우던 관여할 수가 없었다.


가을 운동회를 하는 날이었다. 달리기도 잘했고 지기도 싫어했던 나는 운동회를 손꼽아 기다렸다. 내가 꼭 1등을 하고 싶은 종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엄마를 업고 달리는 종목이었다. 초등학교 마지막 운동회였던 6학년 가을운동회에 나는 반드시 엄마 업고 달리기에서 1등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가 문제였다. 가을에는 여지없이 천식이 심해져 집 밖으로 나서기가 어려웠다. 거기다가 운동회가 열리는 운동장은 온통 흙먼지가 날렸다. 엄마는 운동회에 나가자는 나의 부탁을 거절했다. 운동회 날 아침 나는 너무 화가 나고 억울해서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선생님은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점심시간 이후 엄마 업고 달리기를 한다면서 출전할 학생들은 그때까지 엄마를 데리고 나오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나를 달래며 그냥 달리기만 1등을 하라고 하신다. 속으로 부하가 치밀었다. 난 꼭 엄마를 업고 뛰고 싶었다.


오후 경기가 시작되었다. 엄마 업고 달리기에 출전할 학생들과 엄마들이 하나둘씩 달리기 출발선으로 갔다. 5학년과 6학년만 출전하는 종목이라 선수가 많지 않았다. 나는 학생들 무리에서 빠져 나무 그늘 아래 혼자 앉아 있었다. 다 꼴 보기 싫었다. 5학년 경기부터 시작되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나의 시선은 경기장으로 향했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때 아버지가 나를 찾으셨다. 멀리서 나를 부르는 아버지를 보고 벌떡 일어나 뛰어갔다. 나를 발견한 아버지는 얼른 경기 출발선에 가 있으라고 하셨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부리나케 달려 경기 출발선에 달려갔다. 다른 친구들과 엄마들이 뒤엉켜 있는 곳에 도착하자 선생님이 “엄마는?”라고 물으신다. 난 대답을 못했다. 어물거리며 서있는 나를 보며 선생님이 씩 웃으셨다. 저기 멀리서 엄마가 걸어오시고 있었다. 엄마는 가을 햇볕이 따가운데도 빨간 스웨터를 걸치시고 조심스럽게 운동장 옆을 지나 내 곁으로 다가오셨다. 그리고 내 뒤에 서시고 빨간 스웨터로 나를 감싸셨다. 난 세상을 다 가진 듯 신이 났다.


드디어 내 차례. 총 4명의 선수가 엄마를 업고 뛴다. 나는 출발 총소리와 함께 엄마를 들쳐 업고 내달렸다.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엄마가 내 등에서 들썩였다. 엄마는 비명을 지르셨다. 동네 아저씨들이 환호를 하셨다. 성큼성큼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렸다. 1등이었다. 결승선에서 기다리는 아버지는 나를 와락 안아 들으셨다. 엄마는 부끄러운지 등에서 내리자마자 총총걸음으로 다시 운동장을 빠져나가셨다. 난 왠지 모를 눈물이 났다. 기분은 좋았지만 우리 엄마는 내 생각보다 훨씬 가벼웠다.


그 해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올 때 아니나 다를까 엄마의 기침은 극에 달했다. 아버지는 어딜 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형도 학교에서 아직 오지 않았다. 집에 혼자 남은 나는 엄마의 기침이 심해지는 것이 겁이 났다. 그저 엄마의 등을 두드리며 괜찮냐고 묻기만 했다. 엄마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기침은 더 이상 기침소리가 아니라 절규에 가까웠다. 마른 기침을 견디지 못한 엄마의 목구멍에는 피가 났다. 엄마는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괴로워했다. 엄마의 기침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 동네 아줌마들이 몰려왔다. 초겨울 오후의 작은 시골마을에 비상이 걸렸다. 엄마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고 동네 아줌마들이 어쩔 줄 모르며 엄마 곁을 지켰다.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은 형이 원망스러웠다. 그때였다. 멀리서 ‘삐뽀 삐뽀’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하얀색 승합차 한 대가 집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두 명의 건장한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쑥색 군복을 입은 아저씨 둘이 승합차 뒷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흰색 천으로 덮여진 들것을 들고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아저씨들은 군화를 신고 있었다. 나는 동네 앞 파출소 방위 아저씨인 줄 알았다. 그때 동네 아줌마 한 명이 자기가 119에 신고했다고 외쳤다. 이러다 정수(형의 이름) 엄마가 죽을 거 같아 119에 전화를 했다고 말했다. 나는 의아했다. 119는 불을 끄는 소방관들이 일하는 곳이라 여태껏 알고 있었다. 거기에서 사람을 싣고 가는 하얀 봉고차가 왔다는 것이 신기했다. 어쨌든 쑥색 군복을 입은 아저씨들은 엄마를 능숙하게 들것에 실었다. 누군가 따라가야 한다고 해서 뒷집 홍숙이네 아주머니가 차에 같이 탔다. 울먹이는 난 동네 아줌마들 틈에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삐뽀소리를 울리며 멀어지는 하얀 승합차를 바라만 보았다. 저녁 무렵에야 아버지가 집에 오셨다. 소식을 전해 들은 아버지는 가까이 사시는 외할머니를 모시고 시내에 있는 병원으로 가셨다. 학교 갔다 돌아온 형과 난 저녁을 차려먹고 TV를 봤다. 좋아하는 만화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었지만 엄마 걱정에 눈물만 났다. 아버지는 밤늦게 들어오셨다.


“아빠. 엄마 괜찮아요?”

“그래. 구급차가 일찍 데려다줘서 괜찮다. 병원에 잘 있으니까 내일 형이랑 한번 가봐”


그제서야 안심이 된 나는 마음이 놓였지만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다음 날 형과 나는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동네 앞으로 나갔다. 형이 엄마 병이 빨리 낫게 해달라며 냇가에 동전을 던지면서 빌자고 했다. 형과 나는 다리 위에서 멀리 동전을 던졌다. 오백 원은 큰돈이었기 때문에 나는 백원만 던졌다. 형은 오백 원을 던졌다고 했다.


시내로 나와 병원으로 가는 도중 형이 ‘아트박스’라는 선물가게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난 여자애들이나 가는 이런 곳에 뭐 하러 가느냐고 물었지만 형은 말이 없었다. 형은 구석에 진열되어 있는 커다란 곰인형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너 돈 얼마 있어?”


난 주머니에서 5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형에게 건넸다. 형은 거기에 자기 돈을 더 보태어 계산을 했다.

형은 그제서야 엄마에게 줄 거라고 했다. 나는 내가 선물 받는 거처럼 기뻤다. 엄마가 언젠가 큰 곰인형을 갖고 싶다고 한 것이 기억이 났다. 형은 엄마의 그 말을 생각해놨다가 병문안 갈 때 사려고 한 것이다. 형이 너무 어른스러웠다. 나는 엄마가 곰인형을 받으며 좋아할 생각을 하며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엄마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다. 뭐 하러 샀느냐는 표정이다. 형은 아무 말이 없었고 난 뾰로통해졌다. 산소호흡기를 달고 누워있는 엄마는 수척했다. 그런 엄마가 곰인형을 껴안고 좋아할 줄 알았다. 그러지 않는 엄마가 야속했다. 오래 있지 못하고 형과 나는 병원을 나왔다. 집에 도착해서 아버지에게 형과 내가 곰인형을 사가서 엄마에게 주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인상을 찌푸리셨다.


“야 이놈들아. 천식 환자한테 털 날리는 인형을 안기면 우짜노?”


그제서야 엄마가 왜 그러셨는지 이해가 되었다. 형은 난감한 표정이다. 아버지는 그래도 두 아들이 기특하셨는지 괜찮다고 토닥여주셨다. 그날 이후 엄마가 곰인형을 안고 얼른 집으로 오기만을 기다렸다.


세월이 흘러 나는 119아저씨가 되었다. 소방관이 되고 나서 하얀 구급차를 타고 온 쑥색 군복의 아저씨들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막내 시절 구조대장님의 이야기를 통해서이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이던 80년대에는 내무부 소속의 소방조직은 군인과 같이 군복과 군화를 착용하고 근무를 했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그때 우리 집에 와서 엄마를 데리고 간 사람들이 구급 대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부산진 구조대에 근무할 때 서장님의 지시로 구조 대원인 나는 구급 대원 일일체험을 하기 위해 가야 119안전 센터에서 하루 동안 구급 대원들과 함께 근무를 했다. 그때 갔던 출동 중에 천식 환자가 있었다. 증세가 예전 나의 어머니와 꼭 같아서 남일 같지가 않았다. 가족이 없었던 그 환자를 들것에 싣고 구급차에 태운 다음 병원으로 이송했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가야 센터의 구급 대원들은 환자를 위해 다양한 처지를 했다. 고농도 산소를 주고, 혈압과 맥박을 체크했으며 다른 합병증은 없는지 확인하며 환자를 돌보았다. 병원으로 이송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구조 대원들은 사고 현장에서 피 흘리는 요 구조자를 구급 대원에게 인계할 때는 이송되는 구급차 안의 일까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구급대원의 모습을 직접 보게 되니 마음이 찡했다. 이때 내가 본 구급 대원들의 모습이 어릴 적 우리 엄마를 살리기 위해 집으로 달려온 쑥색 군복의 119아저씨들의 모습과 겹쳐져 보였다. 왠지 모를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얼마 전 고향집에 가보니 엄마의 곰인형이 그대로 있다. 오래되어 털이 빠지고 숨이 죽어 곰이 아니라 갓 태어난 고양이 새끼처럼 쪼그라든 곰인형을 엄마는 여전히 가지고 있다. 난생처음 두 아들에게 받은 선물이라고 지극히도 아낀다. 난 같이 산 것이라기보다 형이 사자고 해서 따라간 것뿐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냥 참았다. 그냥 형제가 준 선물로 알고 있는 것이 좋을 듯 해서다. 엄마의 천식은 이제 많이 괜찮아졌다. 어린 시절 그렇게 독하게 해대던 기침은 이제 많이 사그러 들었고 연세에 비해 오히려 건강하시기도 하다. 지독히도 엄마를 괴롭히던 천식이 어느샌가 사그라든 것이다. 나는 그 이유가 아마 하얀 구급차를 타고 온 쑥색 군복의 119아저씨들과 두 아들의 정성이 담긴 곰인형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분명 그날 구급차에 실려 간 이후 엄마의 증세가 완화되었다. 난 그렇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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