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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소방관 Oct 18. 2020

소방관의 아내

타인의 삶을 구하기 위해 사는 119구조대원의 아내 이야기


 아내는 나보다 6살 어리다. 오랜 군 생활을 뒤로하고 전역한 다음 해인 28살 즈음 아내를 만났다. 전역 후 처음 가진 직장에서 만난 사이였던 아내와 나는 사내커플이었다. 물론 회사 사람들 몰래 만나는 사이였다. 그 시절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의 아내는 나의 첫인상이 매우 좋지 않았음을 지금도 말한다. 나 역시 부인하지 않는다. 오랜 군 생활로 인하여 나의 말투나 표정,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여전히 군인처럼 그랬을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자라고는 한 번도 제대로 만나본 적 없는 나이 많은 남자를 구제(?) 해준  아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 지 모른다. 고향 친구나 선, 후배들과의 술자리가 있으면 언제나 아내를 데리고 나갔다. 나를 아는 사람들 모두 무슨 조화냐며 놀라워했다. 내가 여자를 만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거니와 나이가 6살이나 어린 여자를 사귄다니 다들 도둑놈이라며 한 마디씩 했다. 나는 그 조차도 즐거웠다. 아내는 내게 축복이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소방관이 된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어렵고 힘든 결정이었고, 아내에게 말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아내는 두말없이 나를 지지해 줬다. 오히려 할 거면 제대로 하라며 자기가 도와준다고까지 말했다. 고마웠다. 소방관 합격 때까지 떨어져 있어야 함을 알면서도 아쉬움을 감춘 채 나를 응원했다. 나는 서울로 시험공부를 하러 올라가며 아내에게 금방 합격할 거라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그 후 4번이나 낙방했다. 1년 8개월이나 걸려 끝내 합격했다. 아내는 그런 나를 끝까지 기다려줬다. 한번 한번 좌절할 때마다 내 옆을 지켰고, 내가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줬다. 그뿐만 아니라 모은 돈을 공부하는데 보태라며 나에게 보내주었다. 그 돈은 학원비나 교재비로 썼는데 어쩌면 아내가 나를 공부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나이는 어렸지만 생각은 나보다 어른스러웠음을 안 것도 그때였다.



소방관 시험을 준비하는 시절에 나는 아내의 집에 인사를 드렸다. 갖춰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일푼 백수가 참으로 뻔뻔하게도 장래의 장인, 장모를 뵈러 간 것이다. 아내의 부모님은 보잘것없는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푸짐한 밥상을 차려주셨는데 그때 그 밥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정신없이 먹어치운 기억이 난다. 그런 내 모습을 아내의 부모님은 좋아하셨다고 한다. 비록 직업도 없고 가진 거 없는 놈이지만 수북이 쌓인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시원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모습이 싫지는 않으셨는 모양이다. 나는 사실 합격을 하고 인사를 드리려 했지만 아내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자기가 좋으면 다 좋아하신다며 나를 굳이 자기의 부모 앞에 불러 세운 것이다. 어쨌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더 동기부여를 받아 공부를 했다. 부모님께 인사드릴 정도면 이제 내가 책임질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소방관이 되고 부산에 터를 잡게 되었다. 나는 기다릴 것도 없이 아내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멋진 프러포즈가 될까 고민하다가 도저히 내 입으로 하기가 쑥스러워 다른 사람을 입을 빌렸다. 뮤지컬 공연에 프러포즈 이벤트가 있었는데 거기에 사연을 보내 당첨이 되었다. 공연장 맨 앞자리에 좌석을 배정받고 공연 도중 배우가 아내에게 나의 편지를 대신 읽어주는 포맷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도 글 쓰는 게 말하는 거보다 편했던 것 같다. 어쨌든 함께 관람하는 사람들의 박수도 받을 수 있고, 나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이보다 더 편한 프러포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난 배우가 읽어가는 내 편지가 너무나 쑥스러워 그날 뭐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냥 남들 다 하는 프러포즈를 그럭저럭 해냈다는 생각뿐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아내는 부산이라는 큰 도시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오로지 나만 보고 내려왔다. 그런 아내가 안쓰럽기도 하고 고마웠다. 그렇게 결혼 생활은 모든 것이 순탄할 거 같았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출동이 많은 구조대 일을 하고 퇴근해 돌아와 쉬는 날이면 나는 집에서 뒹굴거나 나가서 술을 마시는 일이 일상이었다. 아내는 뒷전이었거나 아니면 술자리에 데리고 나갔다. 일을 하는 아내는 스스로도 피곤한데 내 뒤치다꺼리에 지쳐갔다. 내가 술자리에 갔다가 늦게 들어오는 날에는 늘 다툼이 일어났다. 나만 보고 먼 도시까지 시집온 아내는 쉬는 날에 무조건 나가 노느라 정신없는 나를 원망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남편이 사회생활하는 것에 여자가 간섭이 심하다고만 여겼다. 그러다가 아내는 아이를 임신했다. 나는 뛸 듯이 기뻤지만 그때뿐이었다. 태교가 뭔지도 관심이 없었던 나는 어차피 아이를 낳는 것은 여자이니 알아서 할 거라 여겼다. 그렇게 딸아이가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난 날, 딸아이를 한번 안아본 후 아내를 입원실에 놔두고 난 또 술을 마시러 나갔다. 



육아는 오롯이 아내의 몫이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아이의 기저귀를 갈 거나 목욕을 시켜준 기억이 없다. 집안 청소나 가끔 할 정도지 굳이 내가 손을 대지 않아도 아내가 알아서 하겠지라고 여겼다. 아내는 하기 싫어하는 나에게 아예 시키지도 않았을뿐더러 나 스스로도 남자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내가 끙끙대며 아이를 돌볼 때 늘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보거나 아예 집 밖에서 술을 마시러 나갔다. 이런 내가 아내는 얼마나 미웠을까? 그러다가 아내는 이내 참지 못하고 폭발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목숨 내놓고 힘든 일 하는 남편 보고 하찮은 집안일을 왜 시키냐며 오히려 당당했다. 곧 죽어도 나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는 성격에 아내의 타박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나는 지금도 이때의 이야기를 하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진다. 아내는 꺼내지는 않지만 아마 평생의 한처럼 가슴에 남을 것이 자명하다. 



아이를 키우는 것을 난 지켜보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내는 육아에 있어서는 특별했다. 임신 초기 입덧이 심해 다니던 좋은 직장을 일찍 그만두었다.  그때부터 아이가 유치원을 들어가는 때까지 엄마로서의 모습에 올인하며 아이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아내는 돈을 버는 것보다 아이를 엄마 품에서 가급적 오래 키우기를 원했다. 직장을 다니지 않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누구의 손에 아이를 맡기지 않았다. 나는 아내의 그런 속도 모르고 그냥 어린이집에 맡기고 나가서 일을 하라고 했다. 갈수록 태산이었고 점입가경이었던 나의 과거다.



여느 엄마들이 그렇듯 아이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특이한 것은 아이에게 책을 참 많이도 읽어주었다. 태교 때부터 매일 책을 읽어주더니 갓 태어난 아기 곁에 늘 책이 있었다. 아이가 기어 다닐 때쯤부터는 손 닿는 곳마다 책을 두었다. 나는 무슨 아이가 읽지도 못하는 책을 그리도 많이 사느냐 심통을 부렸지만 아내는 책에 대한 자기만의 육아법을 고집했다. 아이가 걸음마를 할 무렵이었다. 난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아이가 글을 읽는 것이었다.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30개월쯤으로 기억하는데 평소 아내가 자주 읽어주는 책을 아이가 펼쳐들더니 읽어나가는 것이었다. 발음은 어눌했지만 분명히 활자를 읽었다. 그 이후 책을 읽어나가는 속도는 더 빨랐다. 아이는 집안에 있는 책이란 책은 닥치는 대로 읽었다. 아내는 늘 새로운 책을 사느라 정신이 없었다. 유치원이나 학교에 가서야 글을 떼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는 나는 아내의 책 육아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아이가 어느덧 커져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가 유치원에 가던 때, 나는 아내의 모습을 또다시 보게 된다. 육아에만 전념했던 아내는 이제 자기를 위한 일에 눈을 돌리게 된다. 뜬금없이 공예 수업을 받기 시작하더니 서울이나 인천 같은 먼 곳까지 공예 강사 자격을 따기 위해 하루 이틀 다녀오기도 했다. 난 괜한 일 한다 싶었지만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워낙 깊은 생각을 하는 아내이기에 내가 간섭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 여겼다. 그렇게 한두해쯤 열심히 공예를 배우더니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시기에 아내는 초등학교 방과 후 교사로 활동하게 된다. 아내는 그간 배운 것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단숨에 자신의 공예 과목을 여러 학교에서 인기 수강과목으로 만들어 낸다. 아내에게 공예를 배운 아이들은 늘 만족해하며 재수강을 했다. 엄마들의 칭찬도 자자했다. 거기에는 아내의 노력이 얼마나 담겨있는지 나는 안다. 아이들에게 가르칠 공예작품을 새벽 늦게까지 만들어가며 연습한다. 아이들이 만들기에 힘들지는 않을까 재료 하나하나까지 고르고 또 고른다. 이런 아내의 노력이 방과 후 교사로서 크게 빛을 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16년 전. 나는 앳된 모습의 어린 여자를 만났다. 나이 많은 아저씨인 나를 볼 때면 늘 수줍어 고개를 잘 들지도 못했던 그녀. 미래가 불투명한 나를 뒷바라지하며 기다려준 아내는 결혼하면 행복하게 해주겠다던 나의 말에 속아(?) 그렇게 나를 따라 생면부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 부산에서 12년째 살고 있다. 가정에는 무관심하고 일에 미치고, 술에 빠진 남편 덕에 몇 번이고 속이 시커멓게 타 들어갔을 아내. 삶이 고되어 눈물로 밤을 지새운 날을 셀 수나 있을까? 이 글을 쓰는 내내 아내에게 못할 짓 많이 한 나 자신을 자책한다. 자기밖에 모르는 남편을 건사하느라 자기 몸을 돌보지 못한 탓에 요즘은 여기저기 아프다는 아내. 타인을 구하기 위한 직업을 가진 내가 세상에서 가장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지 못한 못난 남자이었음을 지금 고백한다. 소방관의 아내로서 혼자서 그리고 아이와 함게 견뎌냈던 수많은 밤을 생각하면 아내의 삶이 경외롭다. 그리고 타인을 구하는 일에 나의 사람 곁에 있어주지 못함이 못내 죄스럽고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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