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되어 아버지를 기억하며
어릴 적 우리 집은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했다. 사실 말이 가게지 온 동네가 농사짓는 경상도 어느 시골 마을의 이것저것 다 파는 잡화점 같은 곳이었다. 학교 바로 앞에 위치해서 학용품을 팔았고, 과자 부스러기부터 '쭈쭈바', '하드'라고 불렸던 아이스크림도 가득했다. 간장, 고추장, 소금, 설탕 같은 식료품은 동네 아줌마들의 인기 품목이었다. 구멍가게에 담배도 당연했다. 청자, 백자, 88 등 그 시절 인기 담배는 없어서 못 팔았다.
특히 논농사, 밭농사가 주요 생계였던 시골 마을에 막걸리는 동네 일꾼들에게는 어쩌면 밥보다 중요한 먹거리였다. 당연히 사시사철 이놈의 막걸리는 창고에 늘 쌓여 있었는데 가져다 놓기가 무섭게 팔려 나갔다. 여름철 모내기 철이나 가을 추수 기간에는 이곳저곳 논, 밭으로 배달까지 다녔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인 나와 형이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누구네 논으로, 누구네 밭으로, 논두렁 사이사이 흙구덩이에 발 빠져가며 까만 봉지에 담아진 플라스틱 막걸리병을 열심히도 들고 날랐다.
아버지는 막걸리를 2~3km 정도 떨어진 술 도가(都家)에서 받아오셨다. 면 소재지인 그 동네까지는 멀지는 않은 거리였는데 늘 아버진 커다란 짐 자전거를 손수 몰고 가셔서 20병 남짓 들이 막걸리 상자를 서너 개 싣고 오시곤 했다. 그때 몰고 간 짐 자전거는 어린 내가 보기엔 엄청나게 큰 이동 수단이었다.
초등학교를 갓 입학했던 그해 여름쯤…. 아버지가 술 도가에 막걸리 받으러 가신다기에 뭣도 모르고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샌님 같은 형보다 까불거리는 둘째 아들이 싫지는 않으셨는지 시골길치곤 꽤 먼 거리를 아버지는 자전거 짐칸에 나를 태우고 힘차게 페달을 밟으셨다.
포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작로 길을 달리는 자전거의 속도는 나에게 너무 빠르게 느껴졌다. 새까맣게 포장된 아스팔트 길을 아버지는 사정없이 내달리셨다.
“아빠, 무서워요…!”
혹여나 떨어질까 봐 뒷자리 짐칸 프레임을 손으로 꽉 쥐고 큰 소리로 말했다
"거, 사내새끼가…."
뭐라고 타박을 하셨던 거 같은데 저런 말씀이셨던 같다. 그래도 걱정은 되셨는지 속도는 좀 늦춰주셨다. 그러다 이내 다시 빨라졌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얼른 막걸리를 받아 와서 팔아야 하는 장사꾼 아비의 속도 모르고 천천히 좀 가라고 징징대는 아들내미가 걸리적거릴 만도 하셨을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아버지가 귀찮음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졸졸 따라다니던 자전거 길이 나는 너무 즐거웠기 때문이다. 처음에야 빠른 속도가 겁도 났지만, 차차 적응되니 놀이기구 타는 그것처럼 즐거웠다.
신작로 주변의 풍경도 볼만했다. 저기 멀리 동네 아저씨들 일하는 모습도 보이고, 산 아래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도 보였다. 어디 그뿐이랴. 막걸리 만들어내는 술 도가 풍경은 농사짓는 일차 산업만 보던 시골 촌구석 아이에게 처음 보는 3차 제조 산업의 현장이었다. 아버지는 본의 아니게 나에게 산업현장 견학을 시켜 준 셈이다. 서너 명의 아저씨들이 누룩을 열심히 나르는 모습부터 이상한 기계에서 하얀 플라스틱병으로 막걸리를 콸콸 부어내는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지는 그렇게 네댓 상자를 짐칸에 실으시고 왔던 길을 다시 달리셨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는 짐칸이 아니라 아버지 앞쪽, 그러니까 자전거 프레임에 엉덩이만 살짝 걸쳐서 자전거 운전대를 붙들고 왔다. 그곳은 뒷자리와 다르게 운전자 시점에서 앞을 보고 달릴 수 있어 그 전율이 뒷자리와 다르게 더욱 짜릿했다.
돌아올 때 아버지는 거친 숨을 내쉬셨다. 당연한 것이 올 때의 빈 자전거보다 막걸리를 싣고 오는 길이 곱절은 힘드셨을 테니 말이다. 난 그것도 모르고 속도가 줄어드는 것이 내심 아쉬웠던 것 같았다.
“아빠! 좀 빨리요!!”
아버지의 땀이 턱 아래로 흘러 내 머리로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더 빨리 가자고 졸라댔다. 처음 탈 때 무섭다고 징징대던 녀석이 이제 빨리 가자고 재촉이다. 그러면 아버지는 두 말없이 속도를 더 내셨는데 이내 속도는 조금씩 다시 줄어들었다.
한 학년 더 올라간 다음 해, 아버지는 더는 자전거로 술 도가를 가지 않으셨다. 한 동네 사시는 외삼촌께서 경운기로 도와주시기도 했고, 술 도가 사장 아저씨가 자신의 용달차로 배달을 해주시기도 했다. 짐 자전거의 가장 큰 임무가 사라진 것이다. 그 일 말고도 여기저기 다니시면 자전거를 타긴 하셨지만 분명 짐 자전거 본연의 역할은 '막걸리 운반'이었다. 나 역시 내심 아쉬웠다. 하지만 자전거 타고 싶다고 아버지 일거리를 더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 후 짐 자전거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내 기억에는 없다.
몇 해 전 은퇴를 하시고 집에 쉬시는 아버지에게 자전거 운동 기구를 보내드렸다. 하루가 다르게 여위어지는 아버지 다리가 안타까워 집에 계시면서 굴려 보시라고 큰 방 한구석에 들였다. 그 이후 무거운 막걸리 상자에 어린 아들놈까지 태우고 달리시던 예전의 아버지 모습은 기억 속에만 남고, 방 안에서 UFC(아버지의 최애 TV 프로그램이다) 경기를 보시며 자전거 운동 기구의 페달을 유유히 밟는 아버지의 모습이 이제 더 친숙하다.
자전거 운동 기구가 아니더라도 여전히 아버지는 건강하시다. 해드린 거 없는 못난 아들놈 처지에서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아주 많이 감사하다. 그래도 짐 자전거 힘차게 굴리시던 아버지의 굵은 장딴지가 더 그립다. 어릴 적 땡볕의 아스팔트를 신나게 달리던 그 자전거가 더 그립다. 아버지의 땀에 젖은 등허리도…. 누룩 냄새 진하게 풍기던 술도가도….
금세 생겼다가 어느새 사라지는 것들이 많은 세상이다. 적응이라는 이름으로 후다닥 따라가지 못하면 뒤처지는 세상이다. 전화 한 통이면 집 앞에 막걸리를 가져다 놓는 세상이다. 그러한 들, 희한하게도 지난날의 그리움이 요즘 부쩍 더하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 아버지를 생각하니, 인생의 절반쯤을 살고 이제야 한숨 쉬며 왔던 길 뒤돌아보는 나 자신을 보고 있노라니 말이다. 새러 올 날이 왠지 두렵고 가고 없는 날이 그리운 것이 이맘때부터인가 싶다.
아버지한테 전화나 드려야겠다. 자전거 운동 열심히 하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