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탱커선을 타게 될 줄이야, 첫 탱커선 승선기.

7개월간의 3등 항해사 생활을 마무리하고 2개월간의 꿀 같은 휴가를 보낸다.

항해사의 휴가는 정말 달콤하다. 배 위에서 바라보던 세계와 땅위에서 바라보는 세계가 이렇게 다를까 싶을 정도다. 배를 내리기 전에 하고 싶었던 일, 먹고 싶은 음식, 만날 사람들을 빼곡하게 메모를 해두고, 땅을 밟자 마자 내가 적어 놓은 것들을 실천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항해사들은 승선기간에 비례하여 휴가기간이 정해진다.

회사마다 휴가 기간이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1개월을 승선하면 8일의 휴가가 주어진다. 나는 7개월을 승선했기 때문에 약 2달의 휴가 기간이 주어졌다. 2달이라는 시간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다음 선박은 어떤 선박을 타게 될까 노심초사하며 회사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찰나에, 회사로부터 전화 한통이 걸려온다. 선박 승선 배정을 담당하는 인사팀 과장님이셨다.

“재형아 너 탱커선 한 번 타볼래?”


나는 탱커선에 승선하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고민의 여지도 없이 탱커선에는 관심이 없고, 계속 벌크선에 승선하고 싶다고 말했다.

1시간 후 과장님이 다시 전화를 하셨다.


“ 재형아 탱커선 타보자. 너한테 좋은 경험일꺼야, 한 번 타보고 정 아니다 싶으면 다시 벌크선으로 배정해줄께.”


병역의무 기간 중의 신참 3등 항해사는 을 중의 을이다.

나에게 더 이상 선택의 옵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자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다시 말씀 드리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탱커(TANKER)선은 석유 및 석유화학제품선을 운반하는 선박으로, 유조선을 영어로 TANKER라고 부른다.

탱커선의 특징은 취급하는 화물이 위험화물인 석유이기 때문에, 내가 승선하였던 벌크선에 비하여 선박을 관리 운항하는 데 있어 훨씬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탱커선은 선박에 설치되어 있는 파이프와 펌프를 통하여 육상으로부터 석유를 배에 싣고, 선적한 석유를 선박의 펌프와 파이프를 통하여 육상으로 보내줘야 한다.

벌크선은 선박이 항구에 도착하면 터미널에서 크레인이나 기계를 통하여 배에 화물을 실어주지만, 탱커선은 선박의 일등항해사가 주체가 되어 선박의 펌프와 파이프를 가동하여 화물을 싣고 퍼줘야 한다. 화물 작업을 선박이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선적항이냐 양하항에 도착하면 일등항해사는 화물 작업이 끝날 때까지 밤을 새워가며 모든 작업을 감독 지휘해야 한다.

또한 고가의 위험화물인 석유화물을 싣기 때문에, 석유 메이저 회사들이 실시하는 까다로운 검사(SIRE)를 통과해야만 짐을 실을 수 있다. 이 검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화물을 싣지 못하기 때문에 탱커선의 선원들은 SIRE검사를 통과하기 위하여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 석유 메이저 회사들의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선박의 중요 기기들도 철저하게 관리되어야 하고, 서류 작업도 철저히 해야 하기 때문에 탱커선은 다른 선박들에 비하여 업무량도 많은 편이다.


무엇보다 내가 벌크선을 승선하였던 가장 큰 이유가 세계 방방곡곡의 항구들을 기항할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 탱커선은 한 번 승선을 하면 배를 내릴 때까지 땅을 못 밟는 경우가 많다.

특히 초대형 탱커선(VLCC)은 육지에 접안하여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 떠 있는 채로 파이프라인만 연결하여 화물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항구에 기항하여도 육지를 밟을 기회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탱커선은 다른 선종에 비하여 일도 많고, 위험화물 관리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는 선박이기 때문에 벌크선에 비하여 월급은 높은 편이었다. 당시에는 승선하고 싶은 선종 중에 탱커선이 인기가 제일 많아서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동기들이 탱커선에 승선하고 싶어 했고, 나와 같이 벌크선만 승선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벌크선을 타고 자유롭게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던 나를 꿈꿔왔기 때문에 탱커선에 승선하라는 회사의 지시는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기에,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자 멘토님께 전화를 걸었다.
“회사에서 탱커선을 타라고 하는데, 너무 타기가 싫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떤 해결책을 바라고 전화를 드린 것도 아니고, 그냥 한탄을 하고 싶었나 보다.

멘토님은 탱커선에 승선하면 벌크선에서 얻을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으니 좋은 기회라고 말씀하셨다. 몸은 고되고, 벌크선보다 재미는 없겠지만 탱커선의 까다로운 화물 취급, 선박 관리 기술 등을 습득하는 것이 나중에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단순한 성격의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좋은 것만 생각하자라는 마음으로 인사팀에 전화를 걸어 탱커선에 승선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사람 인생이란 게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
내가 탱커선에 승선하게 되다니.
절대 탱커선은 탈 일 없을 거라고, 학교에서 인기 수강 과목이었던 탱커 교육 강좌에 수강 신청조차 하지 않았던 나였다.
탱커선을 승선하기 위해서는 필수로 수료해야 하는 교육 과정이 있었기에 2달의 휴가 기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3달 정도 부산의 해양연수원에서 탱커선 필수 교육과정을 받아야 했다.
3달의 교육을 마치고 나는 내 인생의 첫 탱커선에 승선하게 된다.
내가 승선하게 된 선박은 초대형 유조선(VLCC)으로 석유를 운반하는 선박 중에는 가장 큰 선박이다. 초대형 유조선의 길이와 너비는 축구경기장 3개의 크기에 맞먹고, 한 번에 20-30만톤의 석유를 운반한다. 대한민국의 하루 석유 소비량이 30만톤이니 엄청난 양이다.
초대형 유조선에 승선하기 위하여 울산에서 통선을 타고 배 앞에 도착하였는데, 통선에서 바라본 배의 크기에 압도되었다.
3등 항해사 첫 배로 승선하였던 벌크선과는 모든 것이 다른 배이기 때문에, 탱커선의 기초부터 하나하나 다시 배워야 하였다. 보통 탱커선에 승선하는 친구들은 실습도 탱커선에서 마치고 오기 때문에 나처럼 탱커선에 대하여 일도 모르는 친구는 흔치 않다.


첫 3개월은 정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바쁘게 일하고, 탱커선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업무 시간이 끝나도 일등 항해사님을 따라다니며 업무를 도와 드리고, 탱커선에 대해서 하나라도 더 익히려고 노력했다. 하루 종일 작업화를 싣고 돌아다니니까 발에 악성 무좀이 생겼는데, 아직까지도 완치가 되지 않고 있다. 지금도 가끔씩 굳은살이 가득하고 껍질이 벗겨진 내 발바닥을 보면서 참 그 때 열심히 배를 탔었구나 하는 생각에 내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초대형 유조선은 석유를 파이프라인과 펌프를 통하여 이송하기 때문에 펌프의 작동방법과 파이프 라인의 구조를 완벽하게 숙지해야 한다.

일등 항해사님은 펌프와 석유 파이프라인이 복잡하게 그려진 도면을 던져주며 3개월 내에 이 파이프라인이 실제로 선박에 어디에 위치하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완벽하게 외워서 보고하라고 하셨다.
한 손에 도면을 들고, 도면상의 파이프라인과 실제 위치를 맞춰보기 위해 배 구석구석을 쉴새 없이 돌아다녔다. 초대형 유조선을 한 바퀴 도는데 30분이 걸리고, 파이프라인이 위치한 펌프룸을 계단으로 오르락 내리면 30분이 걸린다.
선박의 다른 분들은 초임 3등 항해사가 쉬는 시간에 도면을 다니고 배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니까 신기하게 쳐다보셨다. 안 쉬고 뭐하냐고, 동기였던 3등 기관사는 나를 안쓰럽게 보기도 했다.

당시 일등 항해사님은 업무에 있어서 완벽주의를 추구하시는 회사에서도 일 잘하기로 소문난 분이셨다. 일도 많이 시키고, 어떤 일을 하든 정확히 알고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셔서 일주일에 한 번씩 사관들을 모아 놓고 직무교육을 하셨다
말이 직무교육이지 자신이 담당하는 업무에 필요한 지식들을 정리하여 발표하는 과제 발표일이었다. 나는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과제 발표를 준비해야만 했다.
육지 구경은 하지도 못하고 배 안에만 갇힌 채로 주말도 없이 일과 과제 발표에 치여 사니 피곤하기는 했지만, 이 선박에서 배운 탱커선에 관한 지식이 남은 승선 생활동안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어주었다.


특히 이 선박에서 모시게 된 선장님은 인품이 훌륭하시고, 아랫사람들의 역량을 키워 주셨던 진정한 캡틴이셨다.

선장님과의 첫 만남의 기억은 강렬했다.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몸매의 선장님은 항상 이두와 넓은 가슴이 돋보이는 꽉 쪼이는 티셔츠를 입고 계셨다. 60이 넘으신 나이셨는데 어느 젊은이 못지 않은 멋진 몸매를 가지고 계셨고, 당당한 걸음걸이와 우렁찬 목청이 마스코트셨다.

선장님은 승선 생활이 고되지만 항상 웃으려고 노력하고 긍정적인 자세로 업무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지금 배에서 일하며 배우는 것들이 절대로 헛된 것들이 아니고, 나중에 육상 해운회사에서 일을 해보면 지금 배운 것들이 얼마나 쓸모 있는 것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일을 배우려고 하는 나를 예쁘게 봐주셨고, 상급자 업무도 배워놓아야 한다고 2등 항해사 업무도 직접 해보고 배울 수 있게 해주셨다.
직원들을 동기 부여 시키는 것이 리더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인데, 선장님은 리더의 덕목을 갖추신 훌륭한 분이셨다.
선장님의 배려와 관심 덕택에 나는 상급자 업무까지 직접 해보고 배울 수 있었으며, 깐깐하신 일등 항해사님 덕분에 탱커선의 구조에 대해서 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모든 업무는 초기에 얼마나 집중적으로 몰입해서 배우느냐가 업무 역량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몸으로 배웠다.
10개월의 긴 승선을 마치고, 나는 내 첫 탱커선과 작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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