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불행한 건 잘못된 일이 아니다.
나는 살아가며 세상이 원망스러울 때가 많았다. 왜 세상은 나한테 이렇게 못되게 구는 걸까. 사는 게 너무 힘들다. 그렇게 한탄하며 우울감에 빠져있는 시간이 참 많았다. 그러다 벼랑 끝까지 몰려 이대로 한 발자국이라도 더 밀려난다면 그대로 죽는구나 싶었던 순간,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세상과 싸워보기로 했다. 자세를 고쳐 잡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세상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었다. 싸움의 국룰(=진리)은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다. 나는 나에 대해선 잘 아니까 세상에 대해서만 알아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고, 유튜브 강연을 보고, 새로운 사람들과 세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세상에 관한 탐구 속에 임시로 내린 결론은, 결국 사람들이 사는 사회 또한 하나의 자연환경일 뿐이라는 것이다. 법, 윤리, 사랑 같은 요소로 예쁘게 포장되어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사실 이곳도 하나의 정글일 뿐이다.
초원에서 영양은 풀을 뜯어먹고 산다. 그러다 사자를 보면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도망친다. 그리고 도망치는 데 실패한 영양은 잡아먹힌다. 사자 또한 최선을 다해 영양을 사냥한다. 사냥에 실패한 사자는 굶어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양을 제압할 능력이 없는 사자는 생존할 수 없다.
이처럼 자연 속에서는 그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 강자, 약자 상관없이 도망치지 못하면 죽고, 잡아먹지 못하면 죽는다. 살아간다는 건 생존을 위한 싸움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세상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안전을 보장받을 수는 없다. 사람 또한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하루하루를 당장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살아가고 싶다면 매일매일을 살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평생 아무 걱정 없이 침대에 누워 유튜브나 봐도 되는 삶 같은 건 세상에 없다. 설악산에 사는 다람쥐도, 동네 길거리의 비둘기도, 여름밤에 날아다니는 모기도 그렇게 살면 생존할 수 없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사람들에게 안겨준 경제적 풍요로움과 SNS가 선물한 무한대로 이어지는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이, 마치 그런 삶이 세상 어딘가에 있기라도 한 듯,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주고 있다.
나는 불행한데 다른 사람은 행복해 보이면, 내 삶이 지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 삶은 다른 사람의 삶보다 모자라고, 그렇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면 억울하다. 내 삶에 마땅히 일어나야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결핍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나보다 더 대단한 삶을 가진 사람들이 미워 보인다. 그렇게 억울함과 질투심이 쌓이면 사람의 마음은 점점 더 뒤틀린다.
사실 세상은 모두에게 안전하지 않고, 사람은 누구나 불행과 마주하게 된다. 그 불행을 이겨낼 것인가 그 불행에 잡아먹힐 것인가는 개인의 역량이다. 그런데 나는 불행을 견뎌내고 평온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보며, 또는 불행을 견뎌낼 수 없어 마음 한편 어딘가에 보이지 않게 묻어버리고는 행복한 척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이들을 보며 나와는 전혀 다른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오해하곤 했다. 그렇기에 나한테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내 삶이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고는 괴로워했다.
불행이 일어난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불행은 내가 잘못된 존재라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냥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어쩌다 보니 나에게 일어난 것뿐이다. 그러니 불행을 크게 억울해할 필요도 없고, 불행 때문에 크게 자책할 필요도 없다. 괴로운 일이 생겨 그걸 견뎌내는 게 너무나 힘이 들더라도 결국, 그것을 견디고 한 단계 성장해내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인 거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세상과 어떻게 싸워나가야 할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불행에 강해지고, 오늘 하루 무탈했음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행복과 평온이라는 감정에 다다르는 날도 찾아오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