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는 충돌과 수용의 반복으로 깊어진다.
요새 과거에 써놓은 메모들을 다시 읽어보며 예전의 나에 대해 돌아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4년 반전에 적은 메모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다.
-인생이 게임이라면 인간관계가 가장 어려운 파트일 것이다. 선택지 하나 잘못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끝나버릴 수 있으니까.
이 극단적인 생각이 담긴 메모를 읽고 과거의 감정들을 잠잠히 떠올려봤다. 굳이 인간관계가 아니더라도 시험이나 사업도 단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망칠 수 있고, 인간관계도 한 가지 실수만으로 무언가가 결정되는 경우가 흔하지 않은데 과거의 나는 왜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일까.
돌이켜보면 내 인간관계는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는 것처럼 관계가 끝나버리곤 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날벼락에 어린 나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내가 해선 안 되는 큰 잘못을 한 건가? 내가 무슨 문제가 있는 사람인가? 내가 모자라고 이상한 사람이라서 사람들이 나를 떠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점점 더 위축되고 방어적으로 변해갔다.
사실 그 관계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린 건 깊은 관계가 아니어서였다. 언제 끊어져도 이상할 것 없는, 가는 실로 이어진 연약한 관계였던 것이다. 나는 그 실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선 시간을 들여 실을 굵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고, 그러니 그저 얇은 실이 혹여나 끊어지진 않을까 신경을 쏟으며 전전긍긍하기만 했다. 중요한 건 실의 굵기를 굵게 만들어 갈 수 있는 인연을 찾는 것이었는데, 서로 잘 맞지도 않고, 서로가 미성숙해 끊어질 운명이었던 관계조차 끊어져 버리면 아파하고 자책하곤 했다.
나는 성장하며 계속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불안에 가득 차 있었고, 어떻게 하면 나를 싫어하지 않고 조금 더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가 불안해서 예민해져 있다는 자각은 없으니, 내 부정적인 감정들이 그저 내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서, 혹은 상대방이 나한테 문제가 있는 행동을 해서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조심하고 더 방어적으로 행동했다. 악순환이었다. 조심하면 조심할수록 더욱 불안해지고 예민해졌다. 잘못된 선택지를 고르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쉽게 지치고, 쉽게 지치는만큼 부정적인 감정들도 쉽게 날카로워졌다.
마인드가 변하기 시작한 건 초점을 내가 아닌 남에게 두면서부터였다. 어떻게 하면 나의 모자란 부분을 감추고 괜찮은 사람으로 보일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저 사람한테 조금 더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까로 시점을 변화시키자 관계 속에서 보이는 것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틀리면 안 되는 문제보다 맞추면 기분 좋은 문제들이 많아졌고, 그런 긍정적인 감정들 속에서 관계가 깊어져 갔다. 관계가 깊어져 안정감이 생기니 나도 모르게 자연스러운 내 모습이 드러났고, 내가 부정적으로 느꼈던 나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수용되는 걸 느끼며 내가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문제는 나의 본질이 아닌 태도에 있었다. 나는 어떠한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회피하려고 했었다. 사람이란 복잡한 입체 조각이 처음부터 서로 정확하게 들어맞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상대방이 누구라도 어울리고 친해지다 보면 충돌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는 상대방이 불편하거나 부정적인 기색을 보였을 때, 그 문제에 대해 해결해보려 하기보다는 “저 사람한테 내가 별로구나. 그럼 우리 관계의 깊이는 여기까지인 거구나.” 하고 포기해버렸다. 관계는 그런 충돌을 해결하고 서로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더욱 깊어진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저 어딘가엔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 줄,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헛된 희망을 품으며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났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외로워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잡을 수 없는 무지개를 쫓는 것처럼 허망함만이 계속 함께했다.
불행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니었던 것처럼 충돌 자체가 문제인 게 아니었다. 이제는 충돌이 생겼을 때 내 불만을 성숙하게 표현하고, 상대의 불만을 가능한 한 수용하려 노력한다. 충돌 자체가 일어나지 않도록 노심초사하는 것이 아니라, 충돌이 일어나도 그 후에 성숙한 대처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여전히 마음의 여유가 없어, 충돌하게 되면 그저 괴로워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는 회피와 상처의 악순환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