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급 호칭을 없애며 고민해야 할 것들
18년 전 국내 한 대기업이 직급 호칭을 전면 폐지하고 연차, 직급에 상관없이 이름 뒤에 '님'을 붙이기로 한 제도 개편은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유교적, 수직적 거시 문화가 사회뿐 아니라 조직에도 깊이 자리 잡혀있는 상황에 한 기업의 이런 변화는 상당히 신선했다.
이 과장, 박 차장, 김 부장 등 성 뒤에 직급을 붙여 호칭하는 제도는 서로를 부를 때마다 그 사람의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 줄 뿐 아니라, 확실한 서열도 상기시켜준다. 직급 호칭은 권위와 힘의 상징이자 조직생활의 증거, 성과물로 여겨졌다. 그리고 몇 가지 웃픈 일도 필자의 머릿속에 생생한데 가령 이런 것 들이다. 차장인데 팀장(직책)인 사람은 '팀장'으로 불러야 했다. 하지만 부장님이 팀장을 하고 있다면 이는 '부장'으로 호칭하는 것이 예의(?)라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 또, 직원의 성(姓)과 직급은 알지만 이름은 모르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나 더하자면, 누군가 퇴직을 하면 직급은 그대로 멈추고 평생 동안 퇴직 시 직급으로 불리곤 했다.
몇 해 전 미국 유럽 기업들의 호칭제도를 벤치마킹하며, 국내 대기업에서 사용 중인 영문명도 우리의 전통적인 직급 제도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음을 확인했다. 필자가 소속되어 있던 회사의 영문 직급은 아래와 같았는데, 이는 직무에 상관없이 상관없이 모든 직원에게 적용되는 사내 규정이었다.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는가? 그렇다. 여기에는 본인의 직무를 알 수 있는 내용이 없다. 가령 미국 기업의 채용담당 사원은 대부분 Recruitment Specialist, Talent Acquisition professional이라는 영문명을 사용하는 반면, 위의 영문명 체계에서는 인사담당이건 영업담당이건 사원은 Jr. Assistant로 명함을 판다. 물론 이도 상당히 변화하였지만, 국내 직급 중심의 호칭체계가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은 자명하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서로를 부를 때 나타난다. 국내를 제외하고는 직급명으로 누군가를 부르는 일은 극히 드물다. 즉, 직급에 상관없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장이건, 상무 건 심지어 CEO에게도 그 사람의 이름이 'Sean'이라면 망설임 없이 이름을 부른다. 한국에 있는 외국계 기업을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행동유형이 눈에 띈다. 사장님이 외국인이면 모든 직원이 사장님의 이름을 영어로 부르는데 거리낌이 없다. 누구도 'Dear CEO!'라고 부르거나 이름 뒤에 직급명을 함께 붙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밑으로 줄줄이 한국 임원들이 있다면 그들은 강 전무님, 하상무 님, 이 부장님 등으로 호칭하는 하이브리드 행동을 보여준다.
민첩하고 유연한 조직, 수평적이고 창의적인 조직을 표방하며 이제는 수많은 기업들이 직급 호칭을 없애고, 모두 '님'이나 '프로'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몇몇 기업은 아예 영문 이름을 부르는 기업도 있다. 사람을 부르는 호칭은 그 사람을 상징적으로 대표할 뿐 아니라, 수도 없이 반복되는 만큼 이는 인간 행동과 사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직급 호칭을 없앴다고 수평적인 조직문화가 구축될까? 정말 호칭을 바꾸면 그동안 회의실에서 조용히 입 꾹 하던 구성원들의 입이 트일까? 미팅에서 자유로운 의견이 오가고, 거침없이 생각을 발산하게 되는 일이 일어날까? 차이가 있겠으나, 직급 호칭을 없앤 기업의 구성원들은 상당 부분 이런 변화가 수평적 조직문화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에 긍정적 응답을 보낸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변화 과정의 중요성에 대해 말했다.
직급 호칭과 관련한 여러 제도들을 검토하고 실제 변화를 경험한 필자는 호칭 변화 작업에 꼭 신경 써야 할 것으로 아래 세 가지를 꼽는다.
1. 직급 호칭 폐지를 일부에만 적용하는 것은 정말이지 효과가 없다. 임원 호칭은 그대로 남기고 사원들만 님으로 부르도록 변경한 기업을 보았다. 또 사원, 대리는 선임으로 과장, 차장, 부장은 수석으로 부르거나, 간부는 매니저로 그 이하는 사원으로 호칭하도록 한 회사도 있다. 일부의 권위는 그대로 남기며 수평조직을 외치는 건 넌센스라 생각한다. 직급 단순화(Braod Banding)의 일환이라면 그 취지에는 맞을 수 있겠으나, 그 이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2. 리더십이 직급 호칭 폐지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결과물에 대한 확실한 합의가 필요하다.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 조직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직원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이를 통한 집단 지성 극대화라는 명제에 확실하게 동의가 안되어 있다면 언제든 누수가 발생한다. 에릭 슈미트의 '구글은 어떻게 일하는가'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사람들은 수평 조직을 원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위계를 원한다' 했다. 변화를 통해 얻게 될 열매를 바라보고 모두가 이를 지키고 실천해 나가야 한다.
3. 제도 시행 후에도 이를 안 지키는 조직이나 사람이 있고, 옆에서 이를 방관한다면 이는 조직 분열의 시초가 된다. 상무님이 하루아침에 OO님으로 불리는 일은 듣는 사람도 부르는 사람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렵다고 이를 방치하거나 암암리에 상무님이라는 호칭을 부르도록 놓아둔다면, 이를 바라보는 구성원들은 이 자체를 불공평하고 불공정하다고 느낀다. 규정 위반은 물론이고 윤리적이지 않다고 느끼기까지 한다.
글을 마치며, 이런 호칭 변화를 가장 확실하게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한다. 이 역시 리더십 행동이다. 한 팀원이 'A 상무님'이라고 부른다면, 이를 들은 A 상무는 그 즉시 '이제 OO님으로 불러주세요'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윗사람이 직접 새 제도를 공식화하고 인정하며, 팀원의 행동을 고쳐주는 것이다. 그제야 팀원들은 '님'호칭에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이 생길 것이다.
일단 '님'으로 부르는데 안전함을 느낀 직원이 이를 몸에 새기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호칭은 하루에 수백 번도 더 사용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꼭 들여다보자. 직급 호칭 폐지는 끝이 아닌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