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응, 아들^^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아들'이란 단어에 미소가 지어지는 아들 바보.)"
아들: "엄뫄아아! 나 오늘 수학 시험 100점 받았어!"
나: "와우! 진짜? 대박. 울 아들 최고!"
아들: "나 오늘 라면 끓여줘."
아들이 100점 받은 날은 라면 먹는 날이다. 우리 집에서 평소에는 절대 먹을 수 없는 것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라면이다.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살이 급격하게 불어났고 당시 나의 몸무게는 내가 첫째를 임신했을 때랑 맘먹었을 정도로 살이 쪘었다. 고등학교 때 교내에선 내가 성적으론 1인자였으나, 미국 전역을 포함하여 전 세계에서 똑똑한 아이들이 모인 명문 대학에서 나는 그저 보통 학생이었다. 공립학교였던 우리 대학은 1,000명이 넘은 화학 수업도 있었고 전공과목이었던 biochemistry(생물화학)도 200명이 넘을 정도로 수강생이 많았고 상대평가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전 세계 똑똑한 아이들과 겨뤄서 1등 하기란 하늘에 별 따는 것보다 어려웠다. 여기서 깨달은 점은 내 성적이 바닥을 칠수록 내 몸무게는 스트레스와 함께 치솟아 오른다는 반비례 관계를 알 수 있었다. 살이 급격하게 오른 나를 보고 아는 교회 분이 내 허벅지를 '코끼리 허벅지 같다'라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뒤로 나의 소울 푸드였던 라면과 소다 그리고 시리얼을 끊고 10kg 감량했었다. 여담으로 '시리얼을 먹어서 얼마나 살찌겠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당시 내가 먹었던 시리얼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우유와 같이 먹은 게 아니라 공부에 집중하느라 계속 손이 가는 시리얼, 일명 아침에 우유와 먹는 튀긴 과자를 입으로 계속 집어넣었으니 한자리에서 18oz (510g)의 양을 뚝딱 해치웠다.
지금도 15년이 넘게 라면 대신 파스타를, 소다 대신 무칼로리 탄산수를, 시리얼 대신 소량의 과자를 먹으며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다. 라면 중에서도 컵라면은 특히 금지다. 1회용 용기에 포장돼서 판매되는 식품은 환경과 건강에도 안 좋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주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오늘은우리 집에서 금기시되는 것들 중 한 가지가 가능한 날이다.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받아쓰기를 100점 받거나, 수행평가를 만점 받거나, 교실에서 뭔가 큰일을 해내서 선생님께 큰 칭찬을 받을 때 보상처럼 라면을 끓여주고 있다. 내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나에게 전화를 하여 신나게 자랑하는 아들이다. 2학년 때까지만 해도 핸드폰이 없었던 아들은 초등학교 돌봄 교실이나 교내 콜렉트 콜로 전화하여 자신이 받을 보상에 대해 확인하곤 하였다.
"엄마! 저 오늘 라면이요! 영어 100점 받았어요!"
"우와. 당연하지! 대단하다. 역시 울 아들 짱."
"엄마, 사랑해요. 그럼 끊어."
뚝.
라면 먹는 것만 컨펌하고 사랑한다는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매정한 아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하긴 했는데 깊게 생각해 보면 나를 향한 아들의 사랑이야 말로 조건 없는 사랑 아닐까 싶다.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든 말든 엄마를 향한 자신의 사랑만 표현하고 그에 만족하는 아가페 사랑 말이다. 잠깐. 내가 라면 끓여준다니까 사랑한다는 거면 라면의 대한 아가페 사랑인가?
오늘도 아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엄마! 오늘 1학기 수행평가 점수들이 나왔어요. 나 영어, 미술, 체육, 음악 모두 최상 받았어요! 오늘 라면 끓어주세요!"
초등학교 3학년 성적이 이 아이의 추후 인생에 크게 반영되는 것은 아니나 아이에게 자신의 열심에 대한 성취감을 안겨 주고 싶었던 나는 오늘도 라면을 끓여주기로 이미 결심했었다. 하지만 퇴근하고 보니 오늘 해야 할 일이었던 수학문제집과 학습지를 끝내지 못했다. 결국 나와 약속한 시간 내에 다 끝내지 못했고, 그 시간에 맞춰 미리 물을 부어 놓았던 라면은 퉁퉁 불어서 하수구로 직행하였다.
무자비한 엄마가 자신의 소울푸드 낭비에 대해 아들을 서운했는지 펑펑 울었다. 하지만 흐느끼며 끝까지 문제집을 푸는 아이의 모습이 재밌기도 하면서 기특하다. 사실 문제집을 풀고 못 풀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아이들에게 학습지를 시키는 이유 역시 아이들이 공부하는 시간과 습관, 그리고 집중력을 기르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단순 계산을 위한 시간투자는 아니다. 결국 아이는 할 일을 모두 해내었지만, '집중'하여 제시간에 해내는 것은 실패하였고, 나는 매정하게 '오늘의 라면'은 없음을 선포한 후 씻으라고 하였다. 오늘은 샤워하며 기분이 좋아 흥얼거리던 아들은 없었다. 대신 서운하여 흐느끼는 아들만 있을 뿐. 마음 약한 엄마인 나는, '어쨌든 수행평가도 잘했고, 할 일은 결국 끝까지 해냈으니까...'라고 생각하며조용히 라면 물을 다시 끓였다. 씻고 나온 아들은 식탁에 놓인 탱글탱글하게 잘 익은 따듯한 라면을 발견하고는 또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흐어어엉. 엄마, 정말 감동이에요ㅠㅠ 앞으로는 더 집중해서 열심히 할게."
라면이 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가 해냈다'라는 성취감으로 라면을 찾는 것이라 생각했는데...내가 아닌 라면의 대한 아들의 아가페 사랑이 확실해진 날이다.그나저나 아들아, 너는 왜 저녁밥에 라면까지 먹어도 키만 크고 살은 안 찌니? 너란 녀석의 발육이란... 너희 아빠가 이루지 못한 180 cm라는 키의 장벽을 넘어서길 엄마는 간절히 바란다.
결국 성적과 몸무게의 반비례 관계는 모두에게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살은 나만 찌나 봐.'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거의 반년만에 마셔보는 콜라에 신난 아이들. 건배사는 "Long time no co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