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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anius Aug 16. 2024

어려운 아이

A child who is difficult to deal with.

사람은 거의 대부분이 이기적이고 본인 중심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의 상황이 가장 힘들고 어렵다고 느낀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내가 중심이 된 삶을 살아가다가 가끔 육아 동지들 혹은 동지가 아니더라도 지인을 만나게 되면 내 어려운 육아에 대해 울분을 토해낸다. 자신의 삶, 그리고 그 삶 속에 육아가 가장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울분을 토해내고 나면 상부상조하며 상대방의 이야기도 들어주고,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하며 서로 위로해 주고 힘을 얻는다.


하지만 나는 그런 육아에 대해 나눌 육아 동지가 많이 없다. 25세 꽃다운 나이에 결혼해서 27세에 첫 아이를 가졌고 이듬해에 둘째, 그리고 박사과정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 셋째 아이를 가졌다. 어린 나이에 한 사람의 아내가 되었고 남들이 '결혼하기 너무 이르지 않나?'라고 고민하는 나이에 이미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 또래 엄마들보다 훨씬 젊은 엄마 축에 속한다. 지나고 보니 뭣도 모를 사회 초년생일 나이에 이것저것 재고 말고 할 겨를도 없이 결혼하여,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세 아이를 낳고 기르고 공부하며 살다 보니 10년이 후다닥 지나 어느새 나는 30대 중반이 되어있다. 나의 시어머니도 세명의 아이를 기르시며 내조까지 훌륭하게 하신 분이지만 나처럼 세 아이의 터울이 좁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주말부부에 일하며 세 아이까지 기르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나를 안타까워하신다.


육아 동지가 거의 없는 나는 가끔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프로그램을 본다. 우리 집에서 TV는 굉장히 제한적이라 나도 본보기가 되기 위해 아이들이 모두 잠든 후에 빨랫감을 개면서 가끔 TV나 영화 같은 영상을 시청한다. 그중 하나가 이 프로그램이다. 이를 시청하며 나보다 더 어려운 육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며 위안과 동시에 원동력으로 삼아 더 열심히 아이들을 길러야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한 에피소드에서 11살에 18.5kg 밖에 나가지 않는 아이를 다루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동생을 질투하여 엄마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일부러 음식을 먹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도 물론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건강 더 나아가서 죽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거식증은 정말 큰 문제기 때문에 잘 먹고 쑥쑥 크는 우리 아이들에게 감사하며 끝까지 봤던 것 같다. 영상이 후반부를 달릴 때쯤 영상 속 아이의 행동을 보면서 왠지 많이 익숙했다.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의 인색한 아이.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아이.

한 가지에 집중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 아이.

욕심이 지나치게 많은 아이.

주어진 일은 꼭 완벽하게 해야 하는 아이.

화가 나면 그 화를 분출해 내기보다 싸늘하게 무시해 버리는 아이.

말로써 통제가 안되면 눈물로 통제하려는 아이.


영상 거의 마지막에 아이가 엄마에게 소리치며 우는 장면을 보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엉엉. 엄마가 와서 위로해 줘야지! 빨리 사과해. 엉엉"


그리고 내 기억의 저편에서 희미하게 기억의 구슬 한 개가 날아와 내 머릿속에 꽂혔다.

'저거... 내가 예전에 엄마에게 했던 말인데...?'

아이의 행동들이 익숙한 이유가 있었다. 학창 시절의 나의 모습들이었다.



나는 초등학교까지 한국에서 생활을 하였고 크게 어려움이 있던 아이는 아니었다. 학생은 공부하는 것이 직업이라 배워서 공부도 열심히 했고, 학교 생활도 열심히 했다. 친구들과 친해지기 위해 학용품도 잘 빌려주었고, 가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친구들을 위해 화장실 청소도 도맡아 해서 '착한 어린이 상'도 받는 아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왕따는 아니었지만 '봉'인가?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반에서 회장이나 반장도 한 적 있었고 공부도 어느 정도 잘했으며, 교내 글짓기나, 표어, 포스터 대회에 나가면 항상 상을 탔을 정도로 다양하게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였다. 그렇게 하나 둘 받은 관심은 나를 칭찬의 노예로 만들었고 뭐든지 다 잘하고 싶은 욕심 많은 아이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고, 미국에 오니 언어 장벽 때문에 한국에서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소통을 위해 소통을 단절했다.

영어로의 소통을 잘하기 위해 한국어로의 소통을 단절한 것이다. 내가 살고 있던 Los Angeles는 워낙 한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아무리 미국에서 태어난 2세라고 해도 한국어만 사용하다 보면 영어를 유창하게 못 하는 사례를 너무 많이 봤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한국인 친구들을 일부러 피했다. 많이 외로웠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외롭다고 징징댈 여유가 없었다. 수업시간에 발표를 할 만큼 용기가 없었던 나는 수업이 끝난 후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정리하여 선생님께 개인적으로 질문했다. 영어로 소통을 위한 시간 소모였다. 당시 나는 할머니께서 운영하시던 하숙집에서 살고 있었고, 흑인 목사님이 한 분이 하숙하고 계셨었다. 학교를 마치면 항상 그분의 방을 노크하여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그렇게라도 영어에 대한 두려움을 얼른 걷어내려고 했고 조금이라도 더 영어를 사용하려고 했다. 그 외에도 집 옆에 있던 도넛 가게, 햄버거 집, liquor store(편의점)에도 가서 영어로 소통을 위한 금전적인 소비를 했다. 그렇게 영어로 소통을 위한 모든 에너지를 소비한 나는 집에서 과묵한 아이였다. 공부에 집중하느라 항상 책을 놓지 않았고, 식탁에서, 교회를 갈 때도, 심지어 가족끼리 외식을 할 때도 책을 읽어 타인을 불편하는 이기적인 아이였다. 그리고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화를 내며 감정적으로 에너지 낭비를 하기 싫었던 나는 그런 상황들을 피하거나 무시하기 일쑤였다.


내가 유일하게  소통을 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엄마였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는 친구처럼 지냈고 항상 허물없이 받아주셨다. 감정이 메말라 있던 나였지만 항상 따듯하게 안아주던, 진실한 친구 한 명 없던 나의 유일한 단짝 친구였다. 그렇게 메말라 보이던 나의 감정도 어디엔가 보이지 않는 웅덩이로 고여있다가 폭발하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통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나를 엄마는 항상 위로해 주고 안아주길 바랐던 것 같다.


"엉엉, 엄마가 나를 안아줘야지! 왜 위로 안 해주는 거야!!"


그날은 금쪽이의 엄마처럼, 내 엄마도 나를 안아주지 않으셨다. 그렇게 울다 지쳐 잠들었다. 다음날,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해 주셨다.


"딸, 엄마는 우리 딸이 너무너무 소중한데 딸은 어때?"

"나도 소중하지."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소중하게 사랑으로 대해야 돼. 잘해준다고 막대해서는 안 되는 거야."


나의 대해 너무나 잘 아는 엄마. 그날도 내가 안쓰럽다며 엄마가 다가와서 안아줬다면 어땠을까? 나는 아마 소중한 사람을 계속 잃으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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