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까지 아이숙제는 엄마의 과제랬다.
과학의 달 맞이 학교에서 과학 토론대회가 열린다는 안내문을 받았다. 발부된 지는 좀 지난 것 같은데 이제야 가지고 와서는 참가하고 싶다는 아들 녀석.
대회까지 3일 남았는데 뭘 어쩌라는 거냐...
이 대회는 그냥 토론대회가 아니라 아이들의 창의력과 최근 과학 관련 이슈에 대한 이해도, 글짓기, 어휘력, 발표 등 많은 것을 요구하는 만큼 준비도 오랫동안 해야 하는 토론대회였다. 각 과학에 대한 주제가 랜덤으로 주어지면 아이들은 그 문제에 찬성 혹은 반대 의견을 내고 그 의견에 대한 원인과 해결방안을 과학적인 근거와 함께 창의적이고 다양하게 제시하고 실제로 이룰 수 있는지 과학적인 지식과 논리를 바탕으로 90분 내에 서술해야 했다. 또, 이를 토대로 토론을 진행하는데 토론 참여도도 점수로 환산하여 각 학교에서 최종 2인을 뽑는 대회였다.
아이는 고작 4학년이고 5, 6학년 형아들은 이미 이 대회를 위해 집에서 혹은 학원에서 준비를 한다고 들었다. 단 3일을 앞두고 이제야 이 대회에 참가하겠다는 겁도 없는 녀석. 준비도 없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J인 과학자 엄마는 아들의 대회 참가를 포기시켜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엄마: 아들, 이 대회는 오랫동안 준비하고 과학에 대해 평소에 많은 지식을 갖고 참여하는 거야. 이 안내문도 이제야 가져와서는 나가겠다고 하니 엄마가 당황스럽다.
아들: 하지만 저는 꼭 나가고 싶어요. 평소에 과학 관련 만화책도 많이 읽어서 저는 자신 있어요!
엄마: 그렇긴 한데 네가 알고 있는 지식들을 주제에 맞게 정리해서 글로 옮기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야. 90분이면 엄청 긴 시간이야.
아들: 알아요. 1시간 30분이죠.
엄마: 그래, 그 긴 시간 동안 너 혼자서 글을 작성할 수 있겠어?
아들: 할 수 있어요! 엄마가 도와주시면 되잖아요.
엄마: 엄마가 옆에서 같이 글을 써줄 순 없지. 우리 지금부터 노력해서 내년에 나가보자. 지금은 너무 준비가 안 됐어.
아들: 아니에요! 저는 할 수 있어요. 엄마가 노력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영어단어 외우라고 할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 아들의 노력은 왜, 노력해도 우승할 확률이 없는 이런 때에만 스멀스멀 나타나는 건지 모르겠다. 에잇, 나도 모르겠다.
엄마: 오케이. 대신 약속할 것이 있어.
아들: 네, 엄마. 뭔데요?
엄마: 네가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우승하지 못해도 울거나 서운해하지 않고, 우승한 형아들을 축하해 주겠다고 약속하자.
아들: 네! 약속할게요! 우승을 목표로 할 필요는 없어요.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엄마가 그러셨잖아요.
항상 무언가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오직 우승을 목표로 최선을 다했던 나는, 우승이 아니어도 그냥 열심히 해보겠다는 아들의 말에 부끄러워졌다.
3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아이가 최선을 다한다면 대회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아이가 성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날부터 특훈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점수가 부여되는지 파악하기. 각 카테고리 별 부여되는 최종 점수와 키워드를 찾아 정리를 하였다.
그리고 전년도에 나왔던 주제들을 토대로 아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엄마: 작년에는 로봇의 진화에 대한 장점과 단점에 대한 주제였네. 이제 우리 생활에 로봇이 많이 이용되는데 이게 좋은 점이 뭐가 있을까?
아들: 편리해요! 사람들의 일을 도와줘요.
엄마: 그래, 더 자세히 얘기해 볼까?
한참을 아이와 장점과 단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해결 방안에 대해서도 몇 가지 나누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글로 옮기게 했지만 아이는 한 문장도 쓰질 못했다. 과학 관련 만화책은 유일하게 내가 허락하는 만화였다. 그래서 과학 관련 상식과 지식은 많이 알고 있는 아이였지만 그 생각들을 글로 옮기기에는 아이에게 어휘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아.. 이래서 국어가 중요하고 독서가 중요하구나.'
영어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낼 때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만 처음에는 단순히 영어를 잘하기 읽어야 하는 줄 알았다. 내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영어든 한국어든 언어가 필수 영역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아이와 나눈 이야기들을 토대로 빠르고 간단하게 토론서의 뼈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계속 읽고 숙지하여 '주제-소주제-해결방안1-근거-해결방안2-근거' 이런 형식대로 글을 쓰고 밑줄 친 부분만 주제에 맞게 바꾸어 작성하라고 했다.
둘째 날은 내가 작성한 예시 토론서 처럼 다른 주제에 맞게 작성해 보도록 했다. 주제는 플라스틱 이용의 장점과 단점. 생각보다 쉬운 주제였지만 전날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발전한 아이였다. 한 문장도 쓰지 못해 쩔쩔매던 아이는 내가 짜준 토론서의 뼈대를 생각하며 자신의 생각을 적어나갔고 20분 만에 두 페이지의 공책을 꽉 채웠다. 맞춤법도 틀리고 삐뚤빼뚤한 글씨였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날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달라진 아이의 태도였다.
사실 처음에만 호기롭게 대회에 참가해서 우승하겠다고 자신감을 보였지, 나와 첫날 준비를 하면서 글 쓰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이는 조금 위축된 것 같았다. 하지만 물고기 잡는 방법을 깨우친 아이는 자신 있게 내일 토론대회로 항해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다음날 토론대회는 2시간이 넘게 진행되었고, 오후 4시가 넘어서 아이에게서 온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왠지 모르게 벨소리 마저 더 우렁찬 느낌이었다.
아들: 엄마! 저 오늘 잘했어요! 선생님도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고 형아들도 멋지다고 칭찬해 줬어요!
엄마: 우와, 정말 대단하다. 주제가 뭐였니?
아들: AI에 관련 주제였어요. 엄마랑 같이 얘기했었잖아요!
엄마: 우와 진짜? 대박이네! 최고다 우리 아들!
아들: 소감도 발표하는 시간 있었는데, 저도 손들고 발표했어요.
엄마: 그래, 뭐라고 했어?
아들: 토론 배틀이지만 열심히 한 우리 모두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고 했어요.
우리 아이가 (당연히) 최종 우승을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작은 경험을 통해 아이에게 더 큰 자신감이 생기고 자존감이 높아지는 계기가 된 것 같아 행복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모든 일을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일에서 항상 일등 하지 않아도 된다.
서툴지라도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응원한다, 아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