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 여행 Day 12 - 멕시코 과나후아토
오늘은 과나후아토 마을을 둘러보고 여유롭게 하루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10시 즈음에 눈을 뜨고서는 호스트에게 빨래를 맡기고 집을 나섰다. 첫날의 무리로 계속 아파왔던 발도 이제 통증이 없어지기 시작했고, 꽤나 좋은 산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로 가볼까 생각과 함께 구글 맵을 켰지만, 저녁의 과나후아토만 즐겼던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발길이 가는 대로 길을 잃어볼까?’라는 생각과 함께 핸드폰은 집어넣고 그저 시선이 닿는 곳으로 발을 움직였다. 과나후아토의 낮은 평화롭고 여유가 가득했다. 밤과는 다른 분위기를 내고 있었는데, 다들 햇볕을 피해 그늘에 앉아 하염없이 앉아있기도 하고, 음악을 연주해 주는 악단의 노래를 듣기도 했고, 카페나 레스토랑에 앉아 상대방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참으로 평화로운 분위기의 마을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마음에 한 구석에 모진 감정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따분해지고, 괜히 만사가 귀찮아졌다. 어쩌면 재미없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 마을이 아니라, 여행이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다. 물론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일들이 많았고 그 당시에는 행복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이 가득 차는 느낌을 받았다가 적막 속에 혼자 남겨지면 외로움의 감정을 참 크게 느꼈던 것 같다. 그러곤 숙소에 혼자 잠이 들기 전엔 ‘정말 혼자구나 ‘라는 생각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의지할 사람도 없는 이 타지의 땅이 갑자기 두렵게 느껴지기도 하고, 한국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또, 정말 혼자구나 라는 생각만이 들었다. 이런 마음들을 나는 종종 덮어두곤 행복한 상황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많이도 움직였던 것 같다. 여행을 하면서 나에게 솔직하고, 감정에 솔직하자고 여러 번 다짐을 했음에도, 괜히 여행이 하기 싫어질까 봐 덮어두었다. 그게 오늘은 감정이 빼꼼하고 튀어나왔고, 나는 외면하지 못했다.
미라 박물관도, 코코의 배경이었던 공동묘지도 찾아놨건만 괜스레 가기 싫어져서 한참을 거리를 서성이다가 전경이라도 보면서 앉아있으면 마음이 조금 달래 질까 싶어 과나후아토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삐삘라 전망대로 올라갔다. 올라가서 알록달록한 과나후아토 마을의 전경을 보고선 개운한 마음도 잠시 다시 다운된 텐션이 돌아왔다. 그래 이건 여정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감정이 현실과 이상에 대한 괴리로 인해 현실을 못 받아들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망도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어딜 가고 싶지도, 숙소에 가고 싶지도 않았다. 또 쿠바 여행 관련해서 미국 관광 비자 ESTA 문제도 있어서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생각도 감정도 모두 흘러넘치는 순간이었다. 생각이 많아지자 눈앞에 경치가 보이지 않아 졌다.
한참을 꽁해있다가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먹고 싶다.‘ 나는 이 생각이 들자마자 리프레시하기 위해서 다시 광장으로 내려갔다. 그러곤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 시켜서 광장 그늘이 잘 드는 곳에 앉았다. 시원하게 한 모금 하고 나니,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었다. 일단 감정의 문제는 내가 더 대면해 봐야 할 일이고, 현실적인 일 문제 해결하자. 당장 내일 떠나는 칸쿤의 숙소를 잡았다. 꽤나 저렴한 가격에 괜찮은 시설인 호스텔이 있어서 거기로 예약을 했다. 14인실이라는 건 함정이지만, 뭐 잠귀도 어둡기도 하고 경비는 아껴야 하는 상황이니 락커도 있겠다 도전하는 마음으로 가보자!라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만났던 동행 누나 덕에 용기를 얻기도 했다.)
칸쿤 숙소는 해결했고, 플라야 델 카르멘의 고민은 가서 해보고, 쿠바를 다시 확인해 보기로 했다. 상황은 우리는 미국의 비자 면책 프로젝트 덕분에 관광비자를 따로 받지 않고 ESTA라는 간편 비자를 발급받아 관광 및 경유를 할 수 있다. 21년, 트럼프가 집권 당시 쿠바를 다시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했고 미국의 입국 방침 상 테러 지원국 및 금지 국가를 가면 ESTA 자격이 박탈이 되며 추후에 추가 신청을 할 수가 없어진다. 지금은 쿠바를 다녀와도 입국 심사에서 따로 제지를 하지 않았다는 증언도 많았지만, 어찌 되었건 깐깐한 심사관에게 걸려 쿠바를 단순 여행으로 다녀온 걸 알게 된다면, 미국에 입국 거부를 당하는 상황인 것이다. 쿠바를 못 간다는 건 아니다. 칸쿤에서의 직항도 있고, 심지어 미국을 통해서 갈 수도 있을 정도지만, 문제는 비자의 유지의 문제였다. 바하마나 자메이카를 가기 위해선 미국 경유가 필요했다.
두 번째로는 추후에 일을 하든 여행을 하든 미국을 방문하거나 경유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그때까지도 테러 지원국 지정이 풀리지 않는다면 나는 매번 불확실 한 채로 입국을 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여행을 갈 때도 문제고 일로 가서 거부당하면 더욱 심각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많은 정보를 찾아보고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 무리하게 들어가는 건 나에게 득 보다 실이 많을 것 같았다. 쿠바의 여행은 너무도 기대된 나라 중 하나였지만, 쿠바 여행 하나로 앞으로 신경 써야 하는 게 너무 컸다. 그래, 쿠바는 지원국이 해제되면 다시 오자. 내게 이건 한 번뿐인 여행이 아니니까. 내가 목표했던 쿠바는 온 김에 들르는 게 아니라, 쿠바만으로도 갈 만한 나라였으니까. 쿠바를 제외하고 여행을 하기로 결심했다. 일단은 바하마와 자메이카를 갔다가 다시 마음이 바뀌었는지 아닌 지는 다음에 한 번 더 고민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을 광장에서 서치와 함께 집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호객꾼이 와서 말을 걸었다. 커플 스냅을 찍어준다는 이야기였다. 내 옆에는 나랑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멕시코 여자분이 한 분 계셨다. 그분은 호객꾼의 말을 바로 이해했고, 나는 그 사람이 샘플 사진을 보여줄 때서야 알아들은 것이다. 너무나 달달해 보이고 행복해 보이는 사진이었지만, 우린 지금 처음 본 사이인걸요! 심지어 선생님이 오해해서 그제야 처음 제대로 서로의 얼굴을 본 거란 말이에요! 우린 서로를 바라보고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한참을 웃었다. 호객꾼 선생님에게 우리는 처음 본 사이이며, 커플 아니라고 설명을 했고 그래도 찍어 보라는 둥 정말 커플 아니냐는 둥 의심을 하시고는 몇 차례 거절하자 그때서야 가셨다.
그분이 가시고서도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후에 그녀가 말하길, 어떤 여자도 우리 사이에 앉기 전에 둘이 커플인지 물어봤다고 한다. 그러고 그때 나에게 말을 걸었지만, 쿠바에 집중하던 나는 못 들었다고 한다.) 웃기게도 우리는 그 선생님을 계기로 그제야 서로를 보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은 신디야이고 한국 나이론 이제 20살이 된 푸릇한 갓 성인이었다. 과나후아토에 가족들과 함께 여행 왔지만 혼자 길을 잃어서 그런 김에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었던 상황이라고 했다. 우리는 영어로 이야기하면서 말문이 막힐 때마다 번역기를 켜서 서로에게 보여주면서 대화를 했다. 사실 거의 90% 대화가 번역기를 통해서 이루어지긴 했다. 그녀도 나도 이 상황도 웃기고, 번역기를 켜서 이야기를 하는 게 재밌어했고 한참을 이야기를 했다.
나는 여기서 가볼 만한 곳 있냐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근처에 있는 한 카페를 추천해 주었다. 대화가 고팠던 나는 신디야에게 같이 카페 갈 시간 되냐고 물었다. 그녀도 나름 재미있었는지 흔쾌히 수락을 하여 우리는 근처 카페로 이동했다. 길거리가 보이는 발코니 자리에 앉아 서로의 번역기를 통해 질문하고 답하고, 서로의 언어를 알려주기도 하면서 참 많이 웃었던 것 같다. 여행 와서 이렇게 많이 웃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싶었다. 연락하며 지낼 수 있는 현지 친구를 사귀는 건 나와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저 외향적인 유튜버들과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생각을 했다. 나와 이야기하는 걸 너무도 재밌어 해준 신디야는 감사하게도 나와 같은 마음인 듯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약 4시간 정도를 떠들었다. 가족들과 함께 떠날 시간이 될 때쯤 우리는 다음을 기약했다. 우리에게 하루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신디야의 말과 함께 나도 아쉬움이 피어났다. 다른 나라로 넘어갈 때 과달라하라(그녀가 사는 곳 근처 대도시)를 경유할 수 있다면, 너를 보고 가겠다는 말을 하며 우린 아쉬움을 품은 채 안녕을 고했다.
이상하게도 숙소에 와서도 텅 빈 감정이 들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인연을 만나서였을까. 나를 옭아맸던 감정선이 조금씩 풀려가는 느낌이었다. 잔뜩 꼬여버린 이어폰 줄 같던 나의 마음은 한 발 멀리 보니 푸는 방법이 보였다. 외로움 마저 여행의 일부분이었다. 외롭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이상과 거리가 있는 현실을 마주하고, 그 현실 속에서 펼쳐지는 이상보다 더 이상적인 이야기는 여행을 하면서 쌓이는 추억의 일부분인 것이다. 외롭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고,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여행에 있어서 해가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저 느껴지는 모든 감정이 여행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수많은 나를 만나고, 숨겨져 있던 나를 마주하는 것. 혼자서 헤쳐나가 보아야 어렴풋이 나타나는 나의 일부분들까지도 품어질 때까지, 나는 나를 부정도 하고 숨겨도 보겠지만 언젠간 이 모든 것들을 품어줄 수 있는 그릇이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나의 그릇이라는 품의 면적이 넓어져 타인도 품어줄 수 있는. 말 그대로 깊고 넓은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하고, 모진 경험들로써 상처를 입고, 그 상처가 아물고, 그곳에 새살이 올라오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말이다.
비록 난 외로웠지만, 우연보다도 더 드라마 같은 만남을 가졌다. 수많은 순간의 선택이 우연을 만들었고, 그 우연을 붙잡았더니 인연이 됐다. 동행인이었던 현주 누나도, 살사 바에서 만난 세바스찬과 마르코도, 광장에서 만난 신디야도. 모든 선택엔 길이 있었고 그 길을 걸어가 보니 인연이 생겼다. 연인들로 넘쳐나는 이 아름다운 과나후아토는 때론 나를 외롭게 만들었지만, 인연들은 나를 채워주었다. 나를 품어주었다. 나를 넓혀주었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참 많은 귀인들을 만난 이 마을을 나는 어떤 느낌으로 기억할 수 있을까. 아, 나는 여기를 우연이 운명이 되는 도시. 과나후아토로 기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