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 Day 28 - 도미니카 공화국 푼타 카나
오늘의 일기는 여담으로 진행되는 나의 전 연인의 관한 이야기이다. 왜 오늘이냐고! 미처 지우지 못했던 디데이 어플의 알람이 오늘 울려왔다. 1000일이 되는 날입니다. 너무 뜻깊은 날이었겠지만, 지금의 나에겐 더없이 쓰라린 알림이 되어버렸다. 첫 알림을 보고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헤어짐을 부정하고 슬프기보다는, 아쉽고 그리운 느낌이랄까. 또 지금까지 함께였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를 가장 먼저 생각이 들었다랄까. 어느 한 단어들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들이다.
대부분 연애의 시작은 끝을 바라보지 않았다. 애초에 끝이 보이면 연애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물론 끝이 보임에도 시작한 연애도 있었지만, 대게 끝은 내가 예상했던 혹은 이른 이별이 다가왔다. 아마 내가 온 마음을 다해 그 사람을 대하지 못해서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나를 알기에 누군가와 쉽게 인연을 끊고 싶지 않던 나에게 끝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너무 어려웠고, 매 이러한 연애가 끝이 날 때면 또다시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또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자신이 없었다. 또 누군가에게 온 마음을 쏟기도, 쏟고 싶은 상대를 만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까.
내가 지금 그리워하는 이 사람은 이 어려운 감정의 엉킴을 모두 잘라내며 나타나 내 앞에서 빛이 나던 사람이었다. 나름 길었던 연애의 끝을 마무리하고도 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아, 무뎌지기까지 1년이 걸렸던, 그러고서도 쉽게 뜨거워지지 않던 마음을 한 순간에 불을 지피며 다가온 사람이었다. 아직도 그 불씨의 온기가 남아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 사람, 즉 A를 만나기 전에 나는 군대를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 나는 전역 직전부터 친구의 제안으로 함께 학교에서 지원 사업을 기반으로 한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준비한 프로젝트는 웹드라마 제작이었다. 여기서 A는 여자 주인공 역할의 배우였다. 사실 나에게 있어 배우는 그저 비즈니스 상대였다. 학교에서 작품을 하면서 종종 만난다고는 들었지만, 내게 배우들은 친구이기 전에 직장 동료의 느낌이 강했다. 그 이유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영화를 시작했는데 우리는 연기하는 전공이 없기에 항상 외부 배우들을 캐스팅해서 영화를 진행했다. 때문에 내게 배우들은 오디션과 캐스팅으로 만난 비즈니스적 관계일 뿐이었고, 그 사이에서 더 나아가면 연락을 종종 하는 친한 동료의 관계 정도였다. 따라서 내게 있어 배우와의 연애를 상상하는 것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을 만큼 처음에는 그녀에 대해 연애의 감정을 한 올 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내게는 더 기적 같은 사람이었다. 학생 영화 제작현장이 그러하듯 아무리 지원을 받는다 한들 구성원이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하다 보니, 나는 배우들을 챙기고 간단한 의상이나 헤어 정돈을 해주는 등 배우들 옆에 붙어 있는 시간들이 많았다. 또 여름에 촬영을 진행했는데, A는 모기에 물리면 부어오르는 알레르기가 있어서 이래저래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누가보아도 나뿐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 다정해 보였을 것 같지만, 그 당시에 나는 웃기게도 연애까지 연상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가까운 거리에서 머리를 넘겨주고, 옷깃을 여며주고, 여러 가지 것들을 챙겨주는 등 참으로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참 많았다. 우린 이 웹드라마에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또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웹드라마의 촬영이 모두 끝이 나고, 대부분의 작품이 그러하듯 종종 술자리가 있어서 촬영 이후에도 만날 기회도 많았다. 하지만 단 둘이는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깨닫지 못했던, 우리의 관계에서 변화가 시작되는 조짐이 생겼다. 그녀가 같이 영화를 보자고 먼저 제안한 것이다. 나는 수원, 그녀는 서울에 살았지만 우리 둘 다 차가 있었기에 만나는 건 썩 어렵지 않았지만 서로 자기가 가겠다며 배려를 하다가 결국 그녀가 수원에 와서 같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이때가 처음으로 그녀의 마음이 그저 친구의 감정만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첫 데이트 아닌 데이트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귀여웠다. 그녀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영화를 본 건물의 주차 차량 등록을 뒷자리만 같은 다른 차를 주차 무료 결제를 한 것이다. 그렇게 우린 9,000원이라는 주차비를 추가로 지불했지만, 이 상황에서 누가 보아도 당황하고 뚝딱거리던 그녀가 자기는 여유 있는 척 괜찮다며 결제를 하는 모습이 어찌 그리 귀엽던지 아직도 눈에 이 그림이 보일 정도이다.
후담으론 나를 만나는 것이 긴장되어서 자꾸 뚝딱거렸다고 하는데, 연기할 땐 그리도 여유 있어 보이던 그녀가 내 앞에서 색다른 모습으로, 또 나와 만나고 있다는 이유로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 색다른 모습이 나에게는 너무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느껴졌다. 정말 맑고 투명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우린 저녁만 먹고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나의 집 근처에서 술을 한 잔 더 하고 대리를 부르기로 했다. 호프집에서 술을 시켜 먹는데 이게 술 때문에 떨리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는 동료가 아닌 정말 여자로 보여서 떨리는 것인지 갑자기 생겨난 두근거림이라는 감정은 꽤나 당황스러웠고, 두근거렸다. 감정이 참으로 투명했던 그녀도 나와 비슷한 감정이란 것이 느껴지니, 더욱 설레었다.
호프집이 문을 닫을 때까지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대리를 부르려 하지만 그녀는 너무 아쉬워하는 것이 보였고, 나 또한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우린 2차로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술을 한 잔 더 하기 시작했다. 먹을만치 먹었던 우리는 나의 허튼 개수작으로 마주 보고 앉는 게 아닌 서로 나란히 앉게 되었다. 우린 술에 취한 채 술에 쓰인 상표를 보고, 성분을 읽으면서 이 글씨가 보이냐며, 읽을 수 있겠냐라며 서로 상표를 유심히 보겠다는 핑계를 대고 꽤나 가깝게 앉았다. 서로의 어깨가 부딪히고 또 붙어 있기도 하고, 가끔은 살짝 기대기까지 하던 아주 가까운 간격으로 말이다. 그녀가 성분을 읽는 그 말 하나하나가 참으로 귀여웠고, 사랑스러웠다. 참 웃긴 상황이다. 술에 상표와 성분 글씨를 읽는 게 뭐가 그리도 설레는 일이라고. 모든 상황, 모든 행동 등 모든 것들이 떨리는 것이 진정 설렘이란 단어의 정의이지 않을까 싶었다. 어떤 상황이었고, 어떤 행동들을 하던 우린 설렜을 것이다. 그렇게 해의 머리가 빼꼼 튀어나와 하늘을 밝게 비추고 있을 때가 되어서야 그녀를 대리를 태워 집에 보냈었다. 그게 우리의 첫 데이트였고, 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 우린 서로의 마음을 모두 들킨 상태로 서로를 마주하게 될 수 있었던 첫날이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조금 더 서로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게 되었다. 후담으로는 내게 관심이 있던 그녀는 나와 이야기하던 중 나의 연애관에 대해 주의 깊게 들었고, ‘나는 썸을 되게 오래 타고 신중한 편이다.’라는 말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썸을 오래 타려고 했었다고 했다. 그저 흘러가는 사람이 아닌 진지하게 오래 마주하고 싶은 사람이어서 나의 연애관을 맞추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또 그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었다. 내가 신중하고 싶다의 의미는 ‘이 사람과 연애를 하고 싶다!’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내게 첫날부터 연애하고 싶다는 확신이 들었던 사람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꽂힌다는 느낌이었다.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확신을 갖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우린 자주 만났고, 서울에서 일이 끝나면 그녀에게 들러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가는 등 서로에 대한 호감을 강하게 표현을 해왔다.
우린 파주의 자동차 극장도 가고, 일산 호수 공원에 가서 또 아침 해가 밝을 때까지 차에서, 또 벤치에서 이야기를 하기도, 차에서 라라랜드도 보기도, 반포 한강공원에서 산책을 하는 등 우리 스타일대로 데이트를 하고는 했다. 별다른 고백은 하지 않았었다. 그저 처음으로 차에서 영화를 보다 용기 내어 그녀의 손을 잡았고, 그게 우리 연애의 첫날을 의미했기 때문에. 따라서 누가 어떻게 고백했다기보다는 서로의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강하게 끌려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우리의 연애의 시작을 더욱 강하게 알렸다.
그 이후로 참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단둘이 고성에 놀러 가서 서로 함께 있는 그림자 사진을 찍었고, 바다가 훤히 보이는 루프탑 카페에 앉아 몇 시간이고 떠들었다.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우린 함께 있었기에 더욱 빛났다. 난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날 밤 숙소에서 와인과 안주들을 사들고 먹으려고 하는데 그녀가 갑자기 눈물을 훔쳤다.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나? 혹은 내가 무언가 크게 잘못을 했나 당황을 했지만, 그녀는 그저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고 감사해서 눈물이 났다는 것이다. 참으로 무해하고 맑은 사람이었다.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우린 서로를 너무도 아껴주고 사랑해 주며, 주변 사람들조차도 응원하고 좋게 봐주는, 정말 예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연애를 했다.
너무 아름다웠다. 그녀도, 그때의 우리도.
흔히들 말하는 ‘내가 그리운 건 그대일까, 그때일까’라는 물음에는 나는 아직 그대이다. 너무 아름다웠던 그때이지만, 그대와 함께라면 더 아름다운 오늘을 그리며 내일을 꿈꿀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나는 미련이 많다. 미련이 많아서 1년이 넘는 시간까지도 자꾸 그녀와의 추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1년째 그녀에게 전달되지 않는 편지를 쓰고 있다. 애써 그녀를 지워보려 하지도, 잊으려 하지도 않는다. 지금의 결과가 어찌 되었던 그때의 우리는 찬란했고 빛났다.
님이란 글자에 점 하나 찍는다고 남이 되는 게 싫어 오히려 나는 그 흔적들을 지우지 않고 품으려고 한다. 물론 생채기가 난 마음에 과거형으로 끝나버리는 아름다웠던 추억을 문지른다는 것은 쓰라리고 아프지만, 내겐 과거의 추억이 이 아픔보다 더 가치 있다. 그래서 아직도 모든 흔적을 지우지 못했다. 품은 건지 미련이 남아서 정리를 못한 건지는 모르겠다. 아직도 핸드폰 속 저장명도 그대로, 상단에 고정되어 있는 카카오톡도 그대로, 내 방에 남겨진 우리의 연애도 그대로, 우리의 방향제도 차 안에 그대로, 내 마음도 그대로 있다. 그대로이지 않은 건 우리의 관계일 뿐 나는 아직도 과거에 살고 있다. 인정해야 하는데 인정이 쉽게 되지 않는다. 나도 안다. 그녀와 다시 재회할 확률은 극악하다는 것을. 이미 식어버린 감정을 다시 끓어오르게 하는 건,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는 걸. 하지만, 나는 내 기준의 끝까지 가보아야 이 관계를 놓든 더 꽉 잡든 정리할 용기가 생길 것 같다. 그래서 아직 열애 중이다. 벤의 <열애 중>처럼 난 아직도 뜨겁게 열애를 하고 있다.
일 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한번은 만나기로 했다.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다시 연애를 할지 말지가 아닌 그저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로 만나보기로 말이다. 약 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헤어진 지 1년이 되는 날이 다가온다. 아마도 나의 여행이 끝난 후, 우리의 연애가 시작된 그 시기즈음에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녀가 1년이 지난 지금 만나는 것을 거절한다면 만나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 시기가 내가 뱡향이 결정되는 순간이지 않을까 한다. 서로가 함께 붙어 사계절을 보내고, 서로와 떨어져 사계절을 보낸 뒤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지 조금은 두렵다. 헤어지기 직전처럼 차가워진 그녀가 그곳에 서 있을까 봐 걱정된다. 달라진 우리를 마주하는 것이 무서워진다. 무너질까 봐, 이제는 인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올까 봐 부정하고 싶어진다.
그녀는 이미 우리의 연애를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자필 사명까지 마친 후 추억앨범에 넣어두었지만, 내가 그것을 강제로 꺼내어 붓을 덧대는 것일까 봐 미안하기도 하다. 내게는 아직 채색도 되지 않은 미완의 그림이라는 이유로 상대방의 그림까지 망치는 것이 아닐까, 좋은 추억으로 마무리했지만 나는 마지막에 멋지지 않은 모습으로 추억이 오염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들도 함께 한다. 참으로 불안한 나지만, 그녀에 대한 마음은 아직도 그때의 그 마음으로 남아있다.
다른 사람들은 미련이라 표현한다. 나는 기다림이라 표현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부질없다고 말한다. 나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제 그만 너의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라고 한다. 나는 그 연애가 아직도 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내 안에서 하는 나의 소리를 듣고 마지막까지 도달해보려고 한다. 그때가 마지막일지, 새로운 시작일지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어떠한 기점이 될 것이란 확신은 있다. 그때까지 무너지지 않고, 다시 씩씩하게 일어나서 걸어가 보려 한다. 그 앞의 풍경이 어떠할 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글이 닿지 않았으면, 그럼에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그래, 이 감정의 이름은 사랑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