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호젓한 섬 여행
10월, 대체 휴일이 붙은 주말 연휴.
인적 없는 승봉도 해변에서 보낸 특별한 하룻밤을 소개한다.
날씨 좋은 가을, 강화도에 위치한 함허동천에서 캠핑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코로나로 야영장이 폐쇄된 것을 하루 전에 알게되었다.
허겁지겁 대체할 곳을 검색해 보았으나 알려진 서울/경기권 캠핑시설은 이미 모두 만석이었다. 섬에서 노지 캠핑을 할까도 했지만 유명한 섬의 배표는 모두 매진.
요즘은 시간을 만들어도 쉴 공간을 만들기 쉽지 않다.
승봉도를 택한 이유는 배표 때문이다.
가까운 장봉도나 유명한 굴업도로 가는 배는 이미 매진이었고 같은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승봉도는 하루 전에도 잔여석이 꽤 많았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선택지가 없었던 터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티켓을 구매했다.
승봉도 가는 방법
'가고싶은섬' 앱을 설치한다.(앱으로 배편을 예약할 수 있다) 인천 연안 부두에서 출발하는 고속페리호를 선택했다.
인천 연안 부두에 도착했다.
승선 신고서를 작성한 후 매표소에 신분증과 함께 건네면 표를 받을 수 있다. 모바일 발권도 가능하지만 섬에서 1박을 하는 경우 핸드폰 배터리가 방전될 수 있으니 종이 발권을 추천한다. 또한, 배를 탈 때 신분증도 필요하니 반드시 챙겨야 한다.
인천에서 출발한 배는 자월도를 거쳐 승봉도로 간다.(소요시간은 약 1시간 10분)
고속페리호는 자월도 - 승봉도 - 소이작도 - 대이작도 순으로 운항한다.
승선한 사람들 대부분은 자월도나 대이작도에서 내렸다. 승봉도에서 내리는 이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정보도 없이 섬 입구에 도착한 우리는 커다란 안내 지도 앞에서 모바일 위성사진과 번갈아 가며 확인한 후 머물 곳을 정했다.
승봉도는 섬을 일주하는데 2시간 정도 소요되는 아담한 섬이다. 하지만 오늘은 트레킹이 목적은 아니었다.
해변이 있는 방향으로 난 길을 선택하며 걸었다.
그리고 초행이지만 어렵지 않게 바다를 만났다.
기대 이상의 아름다운 만과 맑은 에메랄드 빛 바다를 품은 해변이었다. 무엇을 위해 4번의 서로 다른 탈 것을 환승하며 이곳까지 왔는지 속 시원히 보여주는 풍경.
무엇보다 이곳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는 사람이 없어서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조되는 요즘이지만 좁은 도시공간, 여전히 사람의 틈에서 하루를 보내는 나는
해와 그림자의 위치, 가끔씩 지나가는 고깃배와 여객선, 파도, 새소리를 제외하면
오랫동안 무인도처럼 비어있었을 것만 같은 인적 없는 해변에 마음을 빼앗겼다.
주말 성수기, 폭 200미터의 해변을 하룻밤 렌트하는 비용은 45,000원의 배 삯이 전부다. 캠핑인구가 늘면서 오르는 캠핑장 입장료를 생각하면 이런 호사가 있을까? 이 순간만큼은 팬데믹으로 갈 수 없는 몰디브나 동남아의 어느 해변도 부럽지 않았다.
어떤 숙박시설과 비교할 수 있을까 싶다. 누군가 사용한 침대, 이불, 배게, 공간이 아니라 내가 들고 온 텐트, 매트, 침낭이라 좋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좋고, 잔잔한 소리가 좋았다. 누울 자리에서 일몰을 보고 그 자리에서 날이 밝아오는 모습을 바라 보는 것은 도시인에게는 쉽지 않은 경험이다.
무엇보다 콘크리트 더미의 도시를 잠시 벗어난 것만으로도 좋았다. 우리는 가을 한낮 따가운 햇살을 피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정했다.
텐트와 타프를 설치하고 식사와 대화를 함께 나눌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해지기 전까지 각자의 시간을 즐겼다.
안쪽 깊숙이 들어온 바다가 하루 두 번 만나는 해변의 묵직한 돌, 자갈과 속삭이듯 찰랑인다. 소리가 귀에 감기듯 정겹다.
해안선이 멀어지니 하교시간이 지난 초등학교 운동장처럼 고요하다.
병풍처럼 둘러싼 숲의 그늘이 해변을 삼켰다.
이 해변의 유일한 아쉬움은 지는 노을을 볼 수 없다는 정도였다. 능선의 그늘은 한낮에는 고맙지만 해 질 녘에는 어쩐지 아쉽다.
아직 하늘은 밝은데 그늘 안의 어스름은 하루를 먼저 보내는 기분마저 들게 한다. 밤을 기다리고 있지만 해가 지는 것은 아쉽다.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다운 것은 짧았다. 깊어가는 가을처럼 하나의 세계가 끝나는 기분.
도시에서는 해가 언제 졌는지도 모르게 무심히 밤이 찾아온다. 건물 밖으로 나서도 밤은 가로등 뒤에 숨어 찾을 수 없다. 손전등을 들고 다니는 사람도 없고 아쉬운 감정도 없다. 그저 시곗바늘이 하루의 끝과 시작을 구분할 뿐이다.
자연에서는 다르다. 어둠에 밀려 서서히 작아져 가는 하늘과 바다를 넋 놓고 바라보다 주변에 어둠이 내려앉은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할 때가 종종있다. 그 어스름은 감정을 일으킨다. 시선도 영혼도 수평선 뒤로 꺼져가는 불쏯과 함께 사라질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다행히 불을 켜면 꿈에서 깬 것처럼 모든 것이 황급히 자리를 찾는다.
예전에는 자연에 나가면 멀찍이 떨어져 있는 풍경과 눈금이 사라진 시간의 허전함을 채우려고 습관적으로 음악을 들었다. 그래서 늘 손바닥 만한 블루투스 스피커를 가지고 다니곤 했다.
하지만 언젠가 몽골 초원에서 촬영한 영상에 함께 녹음된 음악이 그곳의 소리를 지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곳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소리의 상실. 이후 자연을 보는 것뿐 아니라 귀로 즐기는 법을 배웠다.
썰물의 고요함 역시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바다가 비운 해변처럼 잔을 부딪쳐 각자의 술잔을 비우며 함께 밤을 나눴다.
잠들기 전 방 스위치를 내리고 어둠속에 눈을 감는다. 바로 잠들지 못하면 다음날의 걱정으로 뒤척이게 된다. 자연에서 어둠은 또 다른 여백의 시작이다.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눈을 감아도 떠도 보이지 않는 세상.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반짝이는 별과 생각하는 나뿐이다. 일상에서 쉽게 꺼내지 못하는 물음과 생각이 밤하늘의 수많은 별처럼 명멸한다. 긴 밤, 수많은 기억과 감정이 컴컴한 어디쯤에서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날 새벽
어느새 슬며시 가까워진 해안선이
해먹에 누워 잠을 청하는 나에게 (보이지 않지만) 선명한 바다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넘치고 번잡한 도시의 일상을 벗어나
주말 적당히 떨어진 어딘가를 찾아
자신만의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면
이 여행을 추천한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외딴섬
승봉도에서의 하룻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