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연말 결산

2025년 결산

마음과 태도

by 박혜민

올해 가을에 부산에서 힐마 아프 클린트 전시를 보고 겨울에 상하이에서 피카소와 린톈먀오 전시를 봤다. 세 작가 다 작품 수가 정말 많았는데 어느 시기나 사건을 넘어서면 같은 사람의 작품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계속 빈 캔버스를 마주했을까. 채워진 작품이 이전의 자신과 달랐을 때 어떻게 또 나아갔을까. 경탄하는 마음으로 직업인으로의 작가의 마음과 태도를 생각했다. 단절된 세계가 이어지며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게 삶의 재미처럼 느껴진다.


올해는 강도와 밀도 면에서 압도적인 해였다. 새로운 경험과 사람은 만나기 어려웠고 자주 혼자 있고 싶었다. 나라면 안할 법한 일들을 많이 감당해보려고 했다. 와중에 가족들과 어느 해보다 여행을 많이 갔다. 3년 같았던 2025년이었다.


2025년의 마음


나에게 마음은 상대적으로 다루기가 쉽다. 하루가 고되게 느껴지면 배달 음식 시켜서 맥주랑 먹고, 나를 위한 시간이 없다고 느껴지면 책 한 권 들고나가서 맛있는 커피랑 와인을 두고 읽고, 세상이 나아지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마음이 들면 공원에 나가 햇살과 바람을 누리는 사람들의 평온한 표정을 보며 산책하다 보면 곧 나아진다. 안 해본 일이라 버겁고 자신이 없어지면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하다 보면 재미에 몰입이 된다.


올해는 내가 다뤄본 적 없는 마음이 들었다. 미래의 나에게도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불안해진 것. 어느덧 5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고 더 오랜 시간 필요할 거란 생각이 들다 보니 '아니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라는 생경함이 들었다.

난 엄청난 사명감이 아니라 호기심과 재미로 하는 건데, 난 정치 산업의 가능성을 보고 시작한 거지 그렇게 큰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닌데, 사심이 질서를 흔드는 세계에서 이 정도의 공심으로 정말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나. 결국 제대로 된 변화도 못 만들고 시간은 다 흘러가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

애초에 다른 영역에서 같은 강도와 방식대로 일하면 더 많은 성과를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오만한 생각도 했다.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자꾸 체스판 위에서 나라는 사람을 가장 적절히 배치했는가를 질문했다.


이런 얘기를 하니 선배 기업가 J 님이 대표들이 원래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생각한다고, 회사가 잘될 때는 원래 자기 천직 같다가도 잘 안 되는 거 같으면 갑자기 내가 잘 모르고 못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요즘 뭐 잘 안되냐고 물었다. 그 말 듣자마자 정신 차림. 헤헷.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고된 일들이 많았다 보니 스스로 태만해질 핑계를 찾고 싶었던 거쟈나.

그즈음 만난 국회에서 20년 가까이 일한 S 님은 비즈니스는 물결 따라 밀어내는 대로 나아가는 일이라면 정치는 물결을 거스르는 일이라서 멈추면 떠내려가고 잘해도 유지, 더 많이 애써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어쩌면 바닷가에서 모래성 짓는 일이라고. 파도에 쓸려가면 다시 짓고, 태풍에 무너지면 또다시 짓다 보면 사람들은 모래성이 어떤가 보다도 그걸 계속 다시 쌓는 사람을 보게 된다고. 날이 쨍해지면 그때는 모래성이 오롯이 보여서 역할을 할 거라고. 그러다 또 파도에 쓸려가서 한 발 나아갔다가 또 거슬러가는 거 같아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고 했다.

두 분의 이야기를 곱씹으면서 이전과 다른 상황과 조건이 되었는데 그에 맞는 마음을 갱신하지 못했단 생각이 들었다. 좀 더 거시적 관점에서 미래의 목격자처럼 세상을 보기로 했다. 결국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언어를 선명하고 유쾌하게 만들고 싶다.


내 편을 좀 들어보자면 내 사심의 모양이 기존에 많이 보고 들었던 모양과 달라서 부족하다고 여겼던 것도 있다. '내가 이뤄서 증명해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이뤄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사람'이고, ‘사람들이 같이 해낼 때 더 좋은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믿게 만들고 싶은 것'이라서 애초에 나에게 남는 결괏값을 위해 하는 일도 아니다. 그냥 난 나대로 하면 된다. 당연한 것에 혼란스러워하지 않기. 이런 사심도 있는 거지. 그래서 또 이렇게 할 수 있던 것 아닌가.


2025년의 태도


마음은 자신을 돌보고 이해하는데 중요하다면 태도는 일하는 사람으로서 과정이자 결과다. 리더가 되고 나서는 조직의 태도 역시도 중요한 부분이 된다. 작년 회고에서 남겨둔 메모를 보면 까마득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올해 내내 계속하던 생각들이었다.


1. 내가 가장 자주 하는 질문은 진짜 의미가 있는가, 무엇을 안 해야 하는가. 결정의 최선에 집착하는 걸지도. 지금은 결정도 중요하지만 결과의 최선을 다해볼 때. 진짜 중요한 것 외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올해는 결과를 가장 중심으로 두기.
2. 망설여진다면 저지르고 끝까지 해보자. 기세를 만들고 적극적으로 자원을 연결해 보자.
3. 스스로 일하는 태도를 계속해서 갱신하자. 변화하는 환경과 역할에 맞는 태도를 갖추자. 이미 넘어갔다면 그다음 페이지로 가자.
4. 태만해지지 말자. 절박하고 집요하게 해도 될까 말까.
5. 정치 세력이 되는 것과 정치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대척점으로 두지 말고 정치 세력으로서 새로운 정치 시스템의 자양분을 만드는 상상력을 가져보자. 똑같아지는 게 두려워서 주저한 게 너무 많다. 다르게 해내는 쪽으로 생각해 보기.


내년을 위해 마찬가지로 메모 형식으로 남겨 본다.


1. 정확한 실패에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고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감각으로 문제를 정의하고 결과를 만들기.

2. 끝까지 증명해 볼 수 있는 시간과 자원의 크기를 가늠하며 일하기. 응당 필요한 시간을 가늠하고 그때까지 믿고 밀기. 필요한 시간을 들이는 걸 두려워하지 않기.

3. 성과 내는 일 70, 다음을 준비하는 일 20, 조직 시스템 10 으로 꾸준하게 에너지 쓰기

4.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풀어낸 일' → '단순한 줄 알았는데 결국 다 연결된 일'

5. 내/외부적으로 필요한 조언 그룹을 적극적으로 만들기

6. 다음 단계로 넘어갔을 때는 마음과 태도를 점검하고 갱신하기

7. 집중해야 할 것을 단순하게 만들고 단순한 결과에 명확한 서사를 붙이기

8. 네트워크 리더십 관점에서 타고난 기질을 역량으로 전환하기. 자기 조직화의 동기 부여.

9. 과거 - 현재 - 미래에서 위치성을 이해하고 어디로 갈 것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기.

10. 성장과 유머를 잃지 않는 팀 만들기.


올해 기억하고 싶은 장면


1. 언니와 겨레 형부가 결혼했다. 식에서 축사를 읽고 동리씨와 원목 테이블을 선물했다.

2. 엄마 환갑 기념으로 가족 다함께 남해에 다녀왔다.

3. 10월에 동리씨와 함께 경포에서 10K를 완주했다. 손 잡고 함께 들어오던 순간 짜릿했다.

4. 8월에 동리, 민해, 엄마, 아빠, 언니, 형부와 속초 여름을 맘껏 즐겼다. 바다 가고 산 오르고 호수를 뛰고 여름 과일을 먹었다. 엄청 탔음.

5. 7월에 도진, 규민, 킴, 썸머와 강릉-속초에 다녀왔다. 그때 대화를 종종 떠올리며 용기를 얻었다.

6. 펀딩을 받았다. 새로운 언어를 배웠고 더 잘해볼 용기가 생겼다. 3년 동안 받은 펀딩과 5년 동안 받은 지원 사업을 졸업하기도 했다. 기회가 될때마다 생태계에 대한 감사와 책임을 전했다.

7. 스무 번에 가까운 부트캠프를 진행했다. 주말이 없어졌지만 새로운 관계성을 만드는 즐거움이 컸다.

8. 상하이 디즈니랜드에 갔다. 이야기의 힘. 나도 좋은 이야기로 이기고 싶다.

9. 상하이 임시 정부에도 갔다. 다른 세계를 꿈꾼다면 굳건한 믿음이 토대라는 것.

10. 제주에서 동리씨에게 프로포즈했다. 근데 반지가 안 들어가서 실패. 풉.



올해 동리씨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내 미숙한 사랑에 자주 미안했다. 슬픔을 통과하며 가족이 되었다.

전세금은 결국 돌려받지 못해 다시 이사했고 경매 낙찰 받았다. 5년이 걸렸다. 동리씨가 속초에 간지도 곧 5년이 된다. 6년 전 했던 수술이 재발해 약물 치료를 시작했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전환의 해가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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