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잉, 미국의 자부심이자 항공을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은 존재. 하지만 지난 5년간 보잉은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수십조 원에 달하는 손실, 고객의 신뢰, 마지막으로 임직원들의 애사심까지.
한때 보잉은 전 세계 민수 항공의 90%에 달하는 점유율을 자랑하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미국이 하늘길을 독점하는 것에 불안함을 느낀 유럽이 힘을 모아 에어버스를 세운 뒤에도 여전히 50%가 넘는 점유율을 유지하며 독보적인 위상을 지켜왔다.
보잉은 오늘날 우리가 익숙한 제트 항공기를 개발해 민수 항공의 막을 연 기업이다. 50년대만 해도 제트기는 군용기에만 쓰였다. 수송 능력이 뛰어나지만 돈이 많이 드는 제트기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민수 시장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잉은 부자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비행기를 자유롭게 타는 시대를 꿈꿨고, 최초의 제트 민항기인 707을 출시했다. 그렇게 보잉의 전설은 시작됐다. (미국의 군비 증강으로 군용 제트기를 대거 수주한 게 큰 도움이 됐다. 전투기로 쌓은 기술력과 인프라를 고스란히 활용함으로써 경쟁자들을 앞서갈 수 있었던 것)
전략적 함의와 경제적 파급력이 엄청난 항공사업을 두 회사가 독식하는 구조에 불만을 품은 도전자가 없었던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캐나다의 Bombadier와 일본의 MHI가 있었고, 과거 Lockheed Martin도 민항기에 도전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사업을 유지할 수 있을만한 시장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항공은 진입장벽이 매우 높은 사업이다. 일단 비행기를 개발하는 것 자체가 천문학적인 돈과 많은 시간 (수십 년)이 드는 일이다. 사고가 나면 즉시 인명 피해로 이어지기 때문에 고객들이 쉽게 기종을 바꾸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감항 인증을 받는 것도 문제다. 미국과 유럽은 기술뿐 아니라 인증 권위도 독점하고 있으며, 이를 무기로 도전자의 등장을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게 가능하다.
이처럼 구조적으로 철옹성 같던 서구의 하늘길 독점이 흔들릴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은 일찌감치 2008년부터 C919라는 이름의 독자 민항기 개발에 나섰다. 독자 항공기는 중국 공산당이 2015년에 발표한 ‘중국 제조 2025’ 계획의 핵심 목표 중 하나다. 개발이 여러 차례 지연되며 우려를 낳기도 했으나 2023년부터 본격적으로 상용 서비스를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에 제3의 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중국이 진정한 항공 강자로 거듭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C919는 모든 면에서 보잉과 에어버스의 항공기 대비 열위에 있으며, 그나마도 주요 핵심 부품들은 서양에 의존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인 북미와 유럽은 감항 인증을 받지 못해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다. 성능 신뢰도는 물론 정치적인 이유에서도 C919이 이들의 인증을 받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중국이 세운 목표는 2030년 기준 연 150대 생산인데 이는 글로벌 시장 점유율 10%에 불과하다. 이 목표 자체도 대단히 의욕적인 (그리고 구체적인 근거가 없는) 목표임에도 그러하다.
하지만 역사는 반전의 연속이었다. 중국이 세계 최대 자동차와 조선 생산국이 될지 그 누가 예측이나 했을까? 중국이 지상과 해상에 이어 하늘을 제패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보잉의 방황이 길어지면 결국엔 그 빈틈을 누군가가 채워야 한다.
보잉의 위기는 단순히 한 기업의 경영 실패를 넘어 하늘을 둘러싼 미-중 경쟁의 차원에서 봐야 할 문제다. 당적에 따라 순한 맛, 매운맛이 갈릴 뿐 미국의 다음 대통령은 보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을 들고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우리나라에도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