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유비를 통해 보는 '지피지기'의 의미
“당신은 연나라의 젊은이가 한단에 가서 그곳의 걸음걸이를 배우려다 망신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아직 듣지 못한 모양이군요. 그는 한단의 걸음걸이가 멋있어 보여 배우러 갔지만, 결국 제대로 배우기는커녕 본래의 걸음마저 잊어버려 기어서 돌아와야 했습니다. 당신이 무작정 장자를 추종하면, 장자의 지혜를 다 배우지도 못하고 당신의 지혜마저 잃어버리게 될 겁니다. 한단의 걸음걸이를 배우려다 망신을 당한 그 젊은이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돌아가시오.” —— 고사성어 ‘한단지보(邯鄲之步)’
우리는 누구나 ‘모든 문을 여는 마법의 열쇠’에 대한 갈증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소위 ‘경영 기법’이라는 것도 일단 유명세를 타면 순식간에 퍼져 나가곤 한다. 도요타의 린 시스템, GE의 식스시그마, 구글의 OKR, 아마존의 워킹 백워드가 돌아가며 서점가와 경영대학원을 휩쓸었다.
하지만 이들을 추종한 사람들 중 오리지널만큼 큰 성공을 거둔 사례는 극히 드물다. 오히려 어설프게 따라 했다가 소중한 돈과 시간만 낭비한 경우가 더 많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시스템 전반에 체화돼야 작동하는 경우가 많아 복제하기가 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남을 보고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은 권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남을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잃기 마련이다.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겉모습만 따라 하는 것은 섣부른 장기 이식 수술처럼 다양한 부작용으로 이어지기 쉽다. (최악의 경우 후유증으로 사망하기도 한다.)
중국 후한 말기에 등장한 수많은 군벌 가운데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인물은 조조였다. 그는 뛰어난 용병술로 당대의 강대한 제후들을 차례로 격파했고, 다양한 제도적 개혁을 단행해 초토화된 중국을 상당 부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중원에서 출발했다. 고대 중국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중심지는 장안에서 낙양을 거쳐 바다로 이어지는 황하 유역이었다. 사방이 뚫려 있는 곳이라 힘이 없으면 지키기 어려운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조는 All or Nothing의 자세로 치열한 사활의 현장에 뛰어들었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신념을 온몸으로 실천하며 중원에서의 입지를 견고히 다질 수 있었다.
둘째, 한 황실을 수중에 넣었다. 황제를 받들어 ‘관군’이라는 대의명분을 독점하고, ‘불충한 신하’를 호령하며 시대정신의 소유권과 도덕적 우위를 주장할 수 있었다.
셋째, 철저한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유재시거)으로 탄탄한 인재층을 구축했다.
기존의 문법에서 벗어난 인재들과, 명문 호족에게 막혀 있던 아웃사이더들을 흡수해 변화의 물줄기 위에 올라탔다.
넷째, 둔전제의 성공으로 경제적 우위를 확보했다. 병사들의 자급자족 체계를 구축해 경제력을 크게 향상시키는 동시에 수많은 유민들을 병력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경쟁자들은 조조가 성공한 공식을 베끼려 했지만 하나같이 실패로 끝났다. 원소는 대장군에 올라 황실의 권위를 ‘복제’하려 했지만 낭패를 봤고, 원술은 스스로 칭제 했다가 몰락했다. 공손찬은 기존 사대부를 배제한 파격적 인사를 시도했지만 명분이 약해 재앙으로 끝났다. 주요 군벌들도 둔전제를 도입했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참모진을 만들지 못해 일시적인 시도로 끝나거나 수탈로 변질되었다.
하지만 유비는 달랐다. 그는 ‘제2의 조조’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첫째, 포지셔닝을 전환했다. 조조를 ‘황실의 보호자’에서 ‘황제를 협박해 국정을 휘두르는 간신’으로, 자신을 ‘흔한 군벌’에서 ‘진정한 한나라의 계승자’로 자리매김했다. 평생에 걸쳐,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유비는 스스로를 ‘인의의 수호자’라는 브랜드로 만들었다. ‘의대조 사건’과 ‘장판교 전투’에서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기도 했다. 그 결과 유비는 ‘역적을 처단한다’는 조조의 명분 공격이 통하지 않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당시 인심이 조조의 유일한 라이벌로 인정했던 건 다른 강력한 군벌들이 아니라 송곳 하나 박을 땅조차 없던 유비였다.
둘째, 신의를 뭉친 강력한 측근 집단을 만들었다. 어차피 조조보다 나은 처우를 해주는 건 불가능했다. 유비는 대신 ‘절대적 신뢰’와 ‘자유롭게 자기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자유’을 주어 규모로는 작지만 질적으로는 결코 뒤지지 않는 에이스 집단을 구축했다. ‘유재시거’의 이면에 숨어 있는 냉정함(필요가 없어지면 제거된다)으로 가득했던 조조와 달리 유비는 한번 함께한 사람에겐 혈육 같은 정을 주었다. 배신이 당연했던 시대, 항상 쫓겨 다녔던 유비의 집단에서 나온 ‘적극적 배신자’는 맹달 정도가 유일했다.
셋째, 중원을 포기하고 사천을 근거지로 삼았다. 형세가 굳어지기 전까지, 즉 중원의 판도가 결정되기 전까지, 유비는 조조의 빈틈을 시시각각 노리는 날카로운 비수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조조가 중원을 장악하자 유비는 철저히 장기전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후대의 우리에게는 ‘천하삼분지계’가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당시의 유비에겐 그 외에도 선택지가 있었다. 형주를 차지한 뒤 곧바로 북진을 감행하거나, 익주가 아닌 한중으로 들어간 뒤 관중 땅을 넘보는 방법도 있었다(‘기동전’을 선호했던 모택동도 이 방법을 지지한 사람 중 하나다). 하지만 유비는 나이 쉰을 넘기면 따라오기 마련인 초조함을 이기고 장기전을 선택했다. 이는 조조의 물량 우위를 상당 부분 상쇄하는 결과를 낳았다. 비슷한 시점에 조조와의 전면전을 선택한 마초가 패망한 것과 달리 유비의 촉나라는 50년 넘게 유지될 수 있었고,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위나라에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 수 있을만한 힘을 모으기도 했다.
미국의 연주자 델로니어스 몽크는 말했다. “천재는 가장 자기 자신다운 사람이다.”남을 무작정 따라 하는 사람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결국 자신의 걸음마저 잃어버리고 기어서 돌아오기 십상이다. 수많은 ‘제2의 ○○’, ‘한국판 ○○’ 가운데 제대로 된 것이 얼마나 되는가?
유비는 다른 군벌들보다 힘도, 돈도, 인맥도 약했다. 그러나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정확히 알고, 꾸준히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었다. 적의 강점을 열위 버전으로 복제하지 않았고, 때로는 편승하고 때로는 급소를 찌르는 영리함을 보였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지피지기(知彼知己)를 잘한 사람이었고 단순 모방을 넘어 창의적 모방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지금 내게 있어 물과 불 같은 관계에 있는 자가 조조요. 조조가 급하면 나는 너그러웠고, 조조가 사나우면 나는 어질었고, 조조가 속이면 나는 성실했다. 매번 조조와 반대로 하여 일을 이루었다. 지금 사소한 이유로 천하에 신의를 잃는 것은 내가 취할 바가 아니다.” —— 구주춘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