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챙겨보는 유튜브 방송이 생겼다. KFN(국군방송)에서 제작한 ‘지구영웅전’이다. 역사 예능인(?)으로 유명한 임용한 박사를 간판으로 내세웠으며 영웅이라 불릴 만한 업적을 남긴 역사 속 거물들을 심층 탐구한다. 전쟁 영웅이 주를 이루지만, 최근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보다 다양한 인물들로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이 방송에는 주인공의 숙적을 소개하는 ‘더 라이벌’이라는 미니 코너가 있는데 매 에피소드마다 누가 라이벌로 등장할지 예측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의 최대 라이벌은 누구였을까? 넬슨을 꼽을 수도 있고 쿠투조프나 카를 대공, 웰링턴 정도가 떠오른다 (임용한 박사는 워털루 전투의 웰링턴을 꼽았다, 만약 내게 선택권이 있다면 배신자 탈레랑을 꼽았을 것 같다).
오늘(8/19) 공개된 최신 편의 주인공은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1세다. 그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수복하고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해 제국의 행정조직을 정비한 인물로 ‘대제’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아마도 동로마 역사상 가장 인지도가 높은 황제일 것이다.
대제의 삶을 관통하는 라이벌은 누구였을까? 당장 몇몇 이름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사산 페르시아의 호스로1세는 명군으로 그의 치세에 페르시아는 동로마의 동쪽 국경을 위협하는 주적이었다. 반달족의 왕 겔리메르와 고트족의 왕 토릴라는 로마 제국의 옛 영토와 종교적 교리를 놓고 대제와 경쟁한 강력한 전사들이었다. 평생 권력을 놓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던 원로원 귀족들도 빼놓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 예측했던 건 명장 벨리사리우스. 뛰어난 지휘관이었던 그는 ‘과도한’ 명성과 업적으로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소중한 동시에 불안을 주는 존재였다. 둘은 수십 년간 묘한 긴장감 속에 애증의 관계를 이어갔다. 서로 죽고 죽이는 막장으로 치닫지는 않았지만, 둘 사이에 흘렀던 심리적 기조는 선조와 이순신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임 박사가 꼽은 최대의 라이벌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라이벌이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지 않는 관계, 바로 그의 아내였던 황후 테오도라였다.
테오도라는 술집 댄서 출신이다. 기록에 따르면 스트립쇼도 했었고 종종 매춘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제는 법을 바꾸면서까지 테오도라를 인생의 동반자로 선택했다.
이후의 역사는 그가 단순히 미모에 홀려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결혼 후 테오도라는 철저히 절제하는 삶을 살았으며, 다양한 복지 법률을 제정하고 외국 사절단을 직접 상대하는 등 정치에 적극적으로 간여했다. 권력 싸움에도 뛰어들어 정적이 많았던 남편을 도왔는데, ‘니카의 반란’ 때 그녀가 중심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유스티니아누스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용기와 총명함은 대제에 필적할 정도로 대단했다. 심지어 일부 역사가들은 그녀를 더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다만, 여기서 그쳤다면 좋은 파트너일 순 있으나 라이벌이라고 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테오도라는 정치나 신학 문제에서 남편이 잘못된 판단을 하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결코 순종적이기만 한 아내가 아니었던 것이다.
테오도라는 대제가 약해질 땐 힘이 되어 주었고, 독선에 빠질 땐 첨예하게 맞섰으며, 나태해질 때는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황제의 성공에는 그녀의 역할이 매우 컸다. 실제로 그녀가 죽자 황제는 의욕과 총명함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는 흔히 라이벌이라고 하면 서로를 파괴하는 적대적 제로섬 관계를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라이벌(Rival)의 어원은 라틴어로 ‘같은 물길을 공유하는 사람’이다. 서로 갈등하고 경쟁할 순 있지만 꼭 상생할 수 없는 관계인 것은 아니다. 정확히는 서로를 자극해 완성하는 관계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제의 라이벌로 그 아내를 꼽는 건 적절해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카이사르의 라이벌로 폼페이우스가 아닌 베르킨게토릭스, 살라딘의 라이벌로 리처드왕이 아닌 보두앵4세를 꼽은 것도 이해가 납득이 간다. 둘 다 전자가 더 강력한 적이었지만 성장의 계기가 되어준 것은 후자였다.
너무 건조한 이야기만 한 것 같아서 덧붙이자면 – 대제의 테오도라를 향한 마음은 분명 진심이었다. 대제가 지은 소피아 성당은 1층에서 2층으로 가는 통로가 계단이 아닌, 수레가 다닐 수 있는 오르막길로 되어 있다. 공사 당시 다리가 불편했던 황후가 편하게 오를 수 있도록 이렇게 만들라고 황제가 직접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 ‘지구영웅전’이 완성도에 비해 조회수가 높지 않아 혹시라도 조기 종영될까 불안해서 방송 홍보 차원에서 써본 글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추천 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