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지도가 아니라 그 길을 걷는 사람이다'
삼국지의 원소는 ‘역사가 승리자의 기록’이라는 걸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후대에 남겨진 그의 이미지는 과분한 권력을 누렸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우유부단한 귀공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핏줄이 좋은 것만으로 난세에 그만한 성공을 거두는 건 불가능하다.
명문가 출신 군벌은 원소 말고도 많았다. 게다가 원소는 정실부인도 첩도 아닌 노예의 배에서 태어난 ‘얼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본처의 자식들을 제치고 원씨 집안의 정치적 유산을 독차지했으며 강력한 경쟁자들을 누르고 최강의 군벌로 부상했다. 승자들이 남긴 편향된 사료들을 조금만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면 카리스마와 권력의지, 그리고 날카로운 정치감각을 겸비한 원소의 진면목이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패배했을까? 원소와 조조가 처음 군을 일으켰을 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원소가 말했다, “황하강을 방벽으로 삼고, 안으로는 하북 평원을 장악하고 밖으로는 북방 이민족들을 포섭한 뒤, 싸움에 지친 도적들을 굽어보며 남쪽으로 군을 밀고 내려오면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조조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천하의 유능한 인재들을 모으고, 정의로운 명분을 세워 그들을 바르게 통솔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일은 사람이 이루는 것이니 어느 곳을 거점으로 삼을지는 중요치 않다”.
이 대화는 두 사람의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원소는 판세와 계획을 중시한 반면 조조는 사람과 운영을 우선시했다.
20세기 후반 (아마도 마이클 포터가 등장한 이후), 경영이 과학의 영역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프로세스를 계량화하고 성과를 측정하고 등급을 매기는 게 유행했고, 그 결과 수단에 불과한 방법론에 모든 게 종속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요한 건 지도 위를 걷는 사람인데, 정작 사람들은 지도 그 자체만 보기 시작했다.
모든 류의 관리체계는 필연적으로 해당 체계의 구현을 최우선으로 추구하게 된다. 실행보다 관리가 중요해지면 ‘진짜 목표’가 아닌 ‘측정할 수 있는 일’만 하는 문화가 자리 잡게 된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문제는 대부분 인간에 관한 문제들이다. 모델과 공식, 데이터에 치우쳐 인간성이 배제된 계획은 반드시 실패한다. 우리가 굳게 믿는 데이터의 힘 역시 실제보다 과장되어 있다. 데이터를 수집하고 구성하고 해석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자기 편의에 따라 데이터를 해석하고 취사선택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복잡한 현실을 몇 개의 체크리스트로 단순화할 수 있다는 유혹은 너무도 강렬해 쉽게 거부하기 어렵다.
원소는 철저히 계획적인 인물이었다. 완벽한 판짜기에 집착했으며, 직접 싸우기보다 차도살인을 즐겼고, 사람을 육성하지 않고 그때그때 빌려 오고 바꿔 쓰는 걸 선호했다. 아마 오늘날에 태어났다면 영화 ‘Wall Street’의 고든 게코와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일이 잘 풀릴 때는 좋았다. 하지만 지도에 그려지지 않은 길에 마주치자 원소의 결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는 계획에 집착하지만 실행에 약한 이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1. 데이터에 집착해 비정성적 요소를 간과했다 - 병력과 물자의 우위만 믿고 조조의 세력을 과소평가했다. 조조군이 산전수전 다 겪은 정예군이고 황제의 군대라는 명분이 주는 보이지 않는 힘은 원소의 계산에서 빠져 있었다.
2. 확증편향 - 친황 세력을 중심으로 조조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커질 것이라고 전제하고 계획을 짰고, 조조 암살 시도가 벌어지자 이를 신호로 여기고 전쟁을 일으켰지만 이렇다 할 내분은 일어나지 않았다.
3. 계획의 완전무결함에 집착했다 - 조조에게 허점을 찔렸을 때 군량고를 지킬지 적의 본진을 칠지 결정하지 못하고 결국 동시에 시도했다 둘 다 실패로 끝났다.
4. 계획을 도그마처럼 숭배했다 - 동탁이 옹립한 헌제를 ‘가짜 황제’로 몰아 세를 키웠지만, 조조가 헌제를 모시자 상황이 급변했음에도 입장을 바꾸지 못하고 망설이다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5. 실패해도 계획은 완벽했다고 주장하며 문제를 실무자에게 전가했다 - 패배를 경고했던 전풍을 ‘군의 사기에 악영향을 주었다’는 핑계로 처형했다.
6. 계획과 실행의 주체가 분리되었다 - 계획이 도구가 아니라 목적 그 자체가 됨으로써 실행과의 괴리가 커졌다. 실전 감각이 전혀 없는 곽도가 모든 의사결정을 좌우하면서부터 원소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아이젠하워는 이렇게 말했다. “전투 계획 그 자체는 별 소용이 없다. 중요한 건 계획을 세우는 과정이다.”
계획이 필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계획 자체가 아니라 계획을 짜는 과정에서 쌓이는 변화에 대한 민감함과 자기 성찰이다. 솔직히 최고의 계획이란 건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닌 경우가 많다. 건강을 위해선 꾸준한 운동과 규칙적인 식사, 활동적인 취미가 있으면 된다. 중요한 건 계획이 아니라 실천이다.
어쩌면 완벽한 계획에 집착하는 사람이야말로 지적으로 가장 게으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현장에서의 끝없는 고민과 하루하루 달라지는 세상을 외면한 채 만병통치약을 찾길 원하기 때문이다.
이제 연말연초다. 한 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할 때다. 공허한 탁상공론, 계획을 위한 계획에 매몰되지 말고 진짜 내실을 다지는 시기가 되길 바란다. 연도는 그저 숫자일 뿐 - 해가 바뀌는 걸 핑계로 오늘과의 단절을 선언하는 건 이제 그만하자. 내일을 위한 답은 오늘을 알차게 보내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