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본질적으로 기술적 존재, 호모 테크니쿠스이다. 우리의 역사는 기술과 공생하며 함께 발전한 역사다.
기술은 우리의 삶과 생각 전반에 걸쳐 근원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심지어 우리의 육체도 기술의 영향을 받아 진화해 왔다. 불의 발견으로 음식을 조리해 섭취할 수 있게 됨으로써 씹고 소화하는데 들였던 시간을 보다 생산적인 일을 하는데 쓸 수 있게 됐다.
더 싸고 편리한 기술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끝이 없다. 여기에 지정학적인 경쟁이 더해지면 기술은 편의를 넘어 생존의 문제가 된다. 역사상 테크포비아는 단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다. 단지 그 기술의 가성비가 감수해야 하는 비용과 불편함을 능가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기술의 혁신은 유사 이래 멈춘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일단 새로운 기술을 발견하면 사람들은 더 좋은 제품, 더 나은 서비스를 만들어낸다. 시간이 흐를수록 수요는 증가하고 품질과 가격을 둘러싼 경쟁이 치열해진다. 그리고 과정에서 더 많은 기술들이 발견되면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이런 순선환을 통한 끊임없는 확산이 기술의 본질이다. 그렇다, 기술은 진화하는 존재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질서정연과는 거리가 멀다. 기술의 발전은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보단 어느 쪽으로 솟구칠지 예측할 수 없는 파도에 가깝다. 일단 기술이 원작자의 손을 떠나 세상에 나오면 그 흐름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2차, 3차, 4차 파도를 거치면서 처음의 의도와는 아예 다른 것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구텐베르크는 그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히고 싶었을 뿐이었다. 에디슨은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돕기 위해 축음기를 만들었고, 노벨은 광산 채굴을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다. 온난화의 주범 취급을 받고 있는 내연기관 자동차는 처음에 ‘친환경’을 강점으로 내세웠다. 도시 곳곳에 널려 있는 말똥을 줄일 수 있을 것이란 게 그 이유였다. 인터넷을 처음 만들었을 때 유튜브, 위키피디아, 온라인 뱅킹의 등장을 예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결론,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만큼 새로운 기술과 어떻게 함께 살지를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다. 보다 깐깐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1차원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기술은 우리의 법과 규범, 습관과 상식, 책임과 권력이 배분되는 구조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런 통찰 하에 선진국에선 기술 담론이 연구계를 넘어 법, 정책, 경영, 그리고 인문철학의 영역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인공지능, 로봇, 유전자 조작, 민간 우주탐사 등 여러 첨단 기술들이 부상하고 있다. 하나같이 전례 없는 기회와 위험이 공존하는 기술들이다. 이젠 우리도 이러한 기술들과 어떻게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때가 됐다. 이러한 정치적 함의는 결코 ‘배부른 소리’가 아니다. 그 사회의 기술 수용력 및 집단 복원력, 즉 ‘지속가능한 혁신 경쟁력’에 직결되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