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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너 Jul 21. 2024

Give & Take

In a perfect world, we would live by only one rule: In doubt, give.


주는 마음과 받는 마음은 완전히 별개야.

받는 마음과 주는 마음은 서로 모르게 하는거야.


주는 마음에는 각자의 마음만을 또렷이 그리고 진심으로 담으면 충분하고, 서로에게 맞추거나 잴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볼 수 없기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구체적 형태를 띄는 무언가에 담아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물이나 편지는 단순한 물건이나 종이의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상징하는 매개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부끄러움에 마이너스 하거나, 미안함에 플러스 하면 안된다. 단언컨대 선물은 금전적 가치로 계산되어져서는 안된다. 그래서 의미가 중요하다. 맥락없는 선물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계가 계산적으로 변하는 시점은 무엇일까? 어떤 저울에 서로의 마음을 올려 재어보고, 상대에 비해 내 마음이 크면 부끄러워 덜어내고, 작으면 서둘러 채워넣는 그런 구색 맞추기가 우리의 관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때부터? 아니면 그 마음으로 인해 어떤 인적 혹은 물적 손해와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를 따져보고, 우리의 마음과 시간에 상응하는 가치와 대가를 점쳐보는 순간부터일까? 아니면 그런 생각이 들어 좀 더 '똑똑하게' 관계를 정립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일까?


실제로 이런 사고는 만연하다. 우리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조금 더 방어적으로, 기회주의적으로 실리를 따지려는 태도를 취하고는 한다. 하지만 관계에서 중요한 것이 상처받지 않는 것일까? 안전한 관계맺음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에서 좋은 태도일까? 우리가 살면서 사랑하는 것보다 싫거나 피하고 싶은 것들에 더 큰 에너지와 관심을 쏟게 되면, 정작 중요한 본질적인 것들을 놓친채 특정 손실 회피에만 몰두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것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고민해본다.


상대방의 마음이 바뀌는 궤도에 따라 내 마음을 데칼코마니처럼 바꾸는 것이 상처 받지 않는 똑똑한 관계법이라며 제시하고, 그것을 수긍하는 사람들. 그게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내 마음의 크기를 상대방의 것에 맞춰 재단하듯 자르고, 주도권을 가지고 휘두르기 위해 상대방을 유혹하거나 유인하는 그런 기술들이 정말 우리를 사랑받게 할 수 있는 것인지. 또 그렇게 쟁취한 애정과 관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할 것인지에 대해 가슴 깊은 곳으로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관계에는 정말 셈법이나 기술도 필요한걸까?


그렇게 겉으로 똑똑한 방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환심을 사는 방법론을 택한다면 결국에는 후회하게 될 것이 뻔했다. 당장의 자존심을 지키고 내 마음을 드러내지 않음으로 해서 누군가를 안달나게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소인배의 비지니스라고 생각했다. 내가 주고 싶은 마음이 물건에 담기면 선물이 되고, 말에 담기면 편지가 되었다. 그렇게 담은 마음은 주지 않았어도 이미 상대방의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달된 마음이 소중하게 여겨질수도, 누군가의 하루를 행복하게 하거나 혹은 평생의 작은 기쁨으로 남게 될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내 손을 떠난 일. 그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봐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심정으로 그저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보내는 것이다.


간혹 불의의 사유로 전달되지 못한 선물은 종종 나에게 상심의 이유가 되었다. 기쁨은 나누어야 두 배가 되지만, 마음은 통하면 이해의 통로를 만들어주어 열 배, 스무배로 관계를 성숙시켜준다. 진심을 다해 표현한 마음이, 상대방을 향한 내 마음이 구체화된 어떤 상징물이 정작 그 주인을 찾아가지조차 못할 때, 시간차와 온도차, 또 그 밖의 복잡한 상황으로 감정의 터널이 막힐 때, 가서 닿지 못한 마음은 갈 곳을 잃고 슬픈 쓰레기로 전락되고 만다. 그것은 견딜 수 없이 서글픈 일이다.


일이나 인생을 계획할 때와는 다르게 사람을 만나는 일에는 어느정도의 우연과 순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부러 더 알려고 하지 않고, 생각하거나 계획한 대로 하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인연이 만들어지도록 두려고 한다. 그때 그때 마음의 이끌림에 따라 매 순간 나의 최선으로 진심을 담은 담백한 말과 행동으로 대하는 것이 나의 기술이라면 그렇게 볼수 있겠다. 그러다가 이어질 인연은 내 사람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서서히 교류가 줄어들다 잊혀지게 되고, 그래서 한참의 시간이 흘러야 그 만남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도 그저 짐작할뿐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은 서로 다른 세계가 조우하는 일. 한 번 인연이 시작되면 확신이 필요하고, 그 확신을 바탕으로 필요한 부분을 노력으로 채워나가야 함께 행복할 수 있다.


내가 주고 싶은 마음, 이미 내 안에 생겨나고 자란 마음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니 고스란히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진솔하고 용기있게 내 진심을 보여주는 것이 상대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고 믿어왔다. 재고 따져보지도 않았고, 더 표현하는 것이 어리석으며, 더 사랑하는 쪽이 손해라는 통념은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나는 내가 말하려는 내 마음이 늘 진심인지 확인하는데 많은 고민을 하고, 기회가 되는 만큼 자주 보여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내 마음의 크기를 얕보거나 함부로 하는 사람들은 아직까지는 없었다. 곁에 있어주었던 사람들이 모두 좋은 사람이어서였는지, 진심은 대부분 통했다.


내 마음은 내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어쩌면, 순간 견고하고 강해보일 수 있는 마음도 한 순간 인생의 수많은 변수들에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워진다. 그 유한함을 알기에 고마움과 애정을 그 감정에 온전히 진심일 수 있는 시점에 고스란히 전달하고싶다. 아무 계산없이. 그래서 내일 떠날 사람에게도,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람들에게도 오늘의 고마움을 전달할 것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볼 때 지속성은 의미가 없어진지 오래다. 내 통제 하에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끊어졌던 관계가 하루 아침에 회복되기도 하고, 다신 볼 수 없을 것처럼 멀리 떠났던 사람과 이웃이 되는 일도 인생에는 꽤나 자주 있었다. 반대의 일도 수두룩했다. 많은 노력을 들여 오래 유지했던 관계가 별 이유 없이 틀어지거나,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한 순간에 거리가 생기는 경우.


오늘의 우리의 마지막 날로 못박혀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고민없이 당신에게 편지를 쓸 것이다. 온전한 내 마음을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 그 뿐이다. 찰나일지라도 우리의 교감을 바라는 나의 작은 진심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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