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5일에 쓴 대도시의 사랑법 후기
나도 안다. 이 영화의 주제가 그게 아니라는 것도. 결국 이 모든 이야기의 끝은 아름답고 그들답다는 것도. 그래서 글의 제목을 바꾸려고 했지만 우리의 삶은 해피엔딩이 아니라서 부득이하게도 소설에, 영화에 양해를 구하며 후기를 적어내고 싶어진다. 평소에 쓰던대로 기승전결이 잘 정리되거나 분석이 주를 이루는 글은 아닐 것 같다. 줄거리를 깔끔하게 적어내고 싶지도 않다. 그건 다른 사람들이 해줄 거니까. 나는 내가 느꼈던 장면과 인상 깊던 순간들을 적어내기로 한다.
이 글은 대도시의 사랑법에 대한 매우 강력한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난 보고싶단 말이
사랑한단 말보다 더 진짜 같아.
사랑은 추상적이고 어려운데
"보고싶다"는 참 명확해.
- 재희의 말 중
영화를 보면서 커밍아웃에 대해 생각했다. 사실은 재희도 흥수도 정체성과 커밍아웃이라는 단어로 합쳐질 수 있겠지만 이들을 그렇게 합쳐버리고 싶지 않다. 재희는 재희의 자리에, 흥수는 흥수의 자리에 두고 싶다.
그럼에도 재희의 말 일부를 들고 오며 흥수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 이유는, 이것이 언어에 대한 얘기니까 그렇다.
어떤 언어는 눈이 침침하도록 추상적이고 퉁명스러운데 반해, 또 어떤 언어는 시리도록 명징하다. 흥수가 자신을 무엇으로도 지칭하지 않을 때, 그저 그렇게, '일반'으로 퉁쳐질 때 그는 일반 사이 어딘가로 여겨질테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흥수가 이반이라는 게 두드러진다. 흥수의 어머니가 알비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틀어두고 성경을 필사할 때, 지석이 흥수를 보며 재희에게 '집에 남자를 그렇게 끌고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할 때, 흥수의 어머니가 재희를 만난 뒤에 "네 병이 치료될 줄 알았어."라고 말할 때, 그리하여 흥수의 어머니가 흥수의 등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할 때. 그럴 때면 기묘하게도 흥수에게 겹쳐진 다른 이름이 더 명확해진다.
그 이름이 흥수에게만 또렷하다는 건 다행인 걸까 불행인 걸까. 영화 초반, 흥수는 재희에게 자신이 게이임을 들켰을 때 '아웃팅', '안 아프게 죽는 법' 같은 걸 검색한다. 비닐봉다리를 머리에 쓰고 질식사하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흥수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웃팅과 커밍아웃을 두려워한다. 그런 흥수에게 "네가 너인 게 어떻게 네 약점이 될 수 있어."라고 말한 사람이 재희라서 다행이지만, 동시에 아리기도 하다.
흥수가 자신의 등에 손을 대고 기도를 시작하려는 어머니에게 "나 게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남자야."라고 말하는 순간, 자신을 수없이 찔렀던 이름이라는 칼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명확하게 드러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실, 어떨 땐 커밍아웃이 그렇게까지 깊은 무게를 가져야 하는지 의아할 때가 있다. 그저 당연한 것이니까. 이것이 사과이고 식탁 위에 놓여 있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그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흥수의 커밍아웃은 왜 세상에 '커밍아웃'이 존재하고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커밍아웃은, 내가 소수자라는 것이 무엇으로 부정할 수 없는 또렷한 사실로서 그 자리에 존재하는 순간이다. 커밍아웃을 하는 순간 당사자는 발가벗겨진채로 상대 앞에 선다. 스스로는 수없이 의심하며 재단하고 고민해왔던 일을 상대방 앞에 보기 좋게 놓아두는 일. 그러므로 당사자에게는 그것이 또렷한 사실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되고, 의심과 재단, 고민은 그때부터 상대방의 몫이 된다.
그러게 말이다. 그렇게 커밍아웃한 뒤 어머니가 콜미바이유어네임을 예매하고, 결혼식장에서 헤드셋 마이크를 달고 bad girl good girl을 부르며 결혼식장 바닥을 쓸어볼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물론 이 소설이 해피엔딩이라고만 말하면 박상영작가님께서 화내실 수도 있다.... 맞다. 이 소설은, 이 영화는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니다. 마냥 행복한 이야기가 아니다. 흥수는 대학시절 아웃팅을 당할 뻔했고, 정말 아프게도 믿었던 재희에게 아웃팅을 당하기도 했다. 성소수자 부스를 부수는 혐오자에 맞서다가 대신 맞기도 한다. 재희는 자신이 사는 3층 자취방까지 기어올라 팬티를 훔치는 괴한을 마주하기도 하고, 이름 모를 사람의 아이를 임신해보기도 한다. 전 남자친구가 자신의 집에 몰래 들어와서 자신의 집을 뒤지고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뒤늦게 벽장을 나온 흥수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과 더이상 맺어지지 못하기도 한다. 이렇게만 보면 새드엔딩이겠지. 그렇지만 세상은 참 녹록치 않아서, 내게는 그 모든 불행들보다 흥수의 어머니가 콜미바이유어네임을 보러가고 재희가 자신을 드러냈음에도 그런 재희를 사랑하는 민준을 만나 결혼하는 게, 파출소에서 열변을 토한 결과가 경찰들의 박수세례일 때, 저곳이 현실이 아니라 소설과 영화 속 세상이라는 사실이 더더욱 확실히 다가왔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갈 무렵에 저런 생각을 했던 거다.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존재한다는 건 비현실적이라고. 그래서 이건 언제까지고 어디까지고 소설인 거고 해피엔딩인 거라고.
재희가 영화 내내 던졌던 대사가 바로 "나 같은 게 뭔데?"였다. 앞서 어떤 언어는 추상적이고 퉁명스럽다고 했는데, 그런 언어들 앞에서 재희는 계속 의문을 던져 왔다. 너네가 생각하는 나 같은 게 뭐냐고. 나도 잘 모르겠는데 왜 너네가 나를 그렇게 말하냐고. 재희를 향한 이름들을 생각해본다.
ㄱㅈㅎ, 미친년, 걸레, "이게 네 삶의 결과야"
그런 이름들은 또다시 칼이 되어 이번에는 재희를 난도질한다. 재희의 단면을 판단하기 좋게 잘라내어 멋대로 씹어댄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재희는 또렷하게 존재한다. 재희로 추정되는 가슴 사진에 대해 아예 본인의 가슴을 까며 정면으로 반박하고, 수군대는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말하라며 나 같은 애가 어떤 애냐고 묻는다.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보고싶다는 말이 명확하다고 말한다. 그래, 그게 재희다. 숨기지 못할 정도로 또렷하고 명확한.
그들은 더할나위 없는 베프임에도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팬티를 잃어버렸다는 재희의 말에도 시큰둥하며 베란다를 잘 찾아보라고 말하는 흥수가 그렇고, 막상 다급한 상황에서 흥수를 아웃팅한 재희가 그렇다. 흥수는 게이임에도 남성이고, 재희는 여성임에도 성소수자가 아니다. 그러니 그들은 서로를 상처주기도 한다.
이들은 베프이다. 서로의 나이브한 점마저 받아들일 수 있는 사이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우정은 없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당당하게 외치는 이상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앞에서 이게 이상하냐고 반문하는 사이이다. (파출소에서 그것이 이상하냐고 반문하는 사람은 그동안 나 같은 게 무엇이냐고 반문하던 재희가 아니라 자신을 숨기던 흥수였다는 것도 흥수가 용기를 내고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한 사람이 재희였다는 점도 나를 감격스럽게 한다.)
내 감상이 남들과 일치하는 감상도, 작가님과 감독님들이 바라던 감상도 아니리라고 확신한다. 내가 짚은 점이 틀렸다고 생각한다기보단 이걸 주제로 잡으라고 만든 영화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를 결국 중심적으로 말했다. 씁쓸했다. 저들은 저들의 세계에서, 저만큼 아름답게 살아갈 것 같아서. 영화관을 박차고 나간 세상에는 여전히 자신을 숨기는 수많은 흥수와 몸을 떨고 있는 수많은 재희가 존재할 것 같아서. 그래서 대도시의 사랑법이 말하는 아름다운 도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서. 저런 대도시는 존재할까. 내가 나로 존재하는 게 약점이기도 하지만, 그걸 약점으로 보지 않으려는 사람이 많은 도시가. 그게 약점이 아니라 그저 나인 도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