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2일의 글
사람과 진솔한 대화를 해본 지 너무 오래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생각과 가치관에 대해 가감없이 말하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내가 하고 싶은 말과 만나는 사람의 주파수가 맞지 않는다. 주파수가 맞지 않으니 방법은 두 가지다. 내가 주파수를 잠시 바꾸어 말하거나, 내 주파수대로 고장난 라디오가 되거나. 잠시 주파수를 바꾸면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답답하다. 고장난 라디오가 되면 내가 남들을 배려하지 않고 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 혹자는 이런 걸 사회성 부족이라고 하지 않나. 과거에도 사회성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요즘 들어 더욱 고장난 것 같다. 한 번씩 검색창에 '사회성 키우는 법' 같은 걸 검색한다. 죄다 세 살배기 아이들의 임상발달적인 이야기만 한다. 어떤 글에는 사람에 따라 장단점이 있는 거라고, 대신 당신이 잘하는 것을 하라고 답변이 달려 있다.
언젠가 일상과의 주파수가 너무 맞지 않아서 그게 목을 조여오는 것처럼 느낀 적 있다. 처음 이런 일을 하기로 했을 때만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완벽한 일자리 같은 건 찾을 수 없으니까. 다들 무언가를 포기하고 살아간다. 그게 돈일 수도 있고 가치관일 수도 있고 안정성일 수도 있고 흥미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치관이나 흥미와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 '대부분의 사람'이 되는 게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 안에서 새로운 비전을 볼 수도 있고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 수도 있다. 다른 무언가를 함께할 수도 있다.
나는 내가 돈이나 안정을 선택한 것을 받아들였었다. 여러가지 이유다. 살아온 배경 때문일 수도 있고 남들을 보아서도 있다. 모든 걸 가질 수는 없으니까. 무언가를 포기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버려온 것 중 매우 소중한 게 있었던 것 같다. 그 사실을 자각한 건 주파수가 맞지 않았던 때, 그리하여 나는 조금씩 죽어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아티스트들을 사랑한다. 어떤 아티스트들은 내가 동경해 마지 않는 것들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한다. 그 자체로 너무 아름다워서 감탄한다. 열렬히 사랑하는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사랑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들이 사랑하는 가치는 내가 동경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꾸면 그것도 내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쩌면 나는 영원히 가질 수 없을. 나는 나의 일상과 주파수가 맞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도 나와 주파수가 맞지 않았다. 어쩌면 나의 일상이 나의 목을 조인 게 아니라 과거부터 쌓아온 나라는 사람이 나의 목을 조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성질이, 대학 때부터 쌓아왔던 삶의 궤적들이 내 목을 조르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쓰기로 했다. 고장난 라디오가 고장나지 않은 척하는 제법 세련된 방법이다. 글은 쓰는 사람이 맺기 전까지 누구도 끼어들 수 없다. 동시에, 글은 나의 세계로 타인을 초대하는 행위다. 읽는 사람에게 장문의 초대장을 쓰고 약간의 창문을 열어두는 일이다. 그런데, 집이 좀 엉망인 것 같다. 컨셉도 제각각이고 미니멀하게 꼭 필요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한쪽에서는 할로윈 파티를 하고 다른 쪽에서는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맛있다고 떠들어댄다. 어떤 쪽은 미니멀리스트라며 황량한 벽에 가구 하나 놓여 있고 반대편엔 뜯지 않은 상자가 꿉꿉한 공기를 뿜으며 자리한다.
나는 맞는 주파수를 잡을 수 있을까. 마침내 방향을 정하고 그에 맞게 어떤 집기는 내다 버리고 새로운 집기를 들이며 정리해나갈 수 있을까. 다시 문밖으로 나가 버려둔 어떤 것들은 들고 들어올 수 있을까. 그 사이에 쓰레기차가 모조리 실어가진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나는 쓰레기장을 뒤져서라도 버렸던 것을 찾아 돌아올 용기가 있을까. 맞는 주파수도 모르겠다며 멍하니 서있으면서 그런 용기가 있냐고 자문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