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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석 Apr 26. 2016

황금 파도
4화

최민석



“나는 국민을 굳게 믿는다. 

진실을 알려주면, 어떤 국가적 위기를 만나더라도 그들을 믿을 수 있다. 

중요한 점은 그들에게 진실된 사실과 맥주를 전하는 일이다.”

- 아브라함 링컨(1809-1865) 




#4



‘의견을 굽히지 않는 용기, 군중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자신감, 결국은 자기가 하고픈 말을 해내고 마는 줏대, 게다가 고개 숙일 줄 아는 유연한 자세!’


정민은 오랜만에 가슴 어딘가에 꺼져 있던 심지에 불이 붙는 걸 느꼈다. 원에서 조용히 멀어진 정민은, 보좌관을 찾아가 말했다. 


- 그 친구랑 대화를 좀 해보고 싶은데 말이야. 


- 그 친구라니요?


- 저기, 아까 논쟁하던 키 크고 잘 생긴 친구 말이야. 


보좌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답했다. 


- 네? 저 친구요? 


보좌관은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 왜 그래?


- 실은 저 친구가 좀 이상한 면이 있어서요. 


- 이상한 면이라니?


- 아, 오늘 뒤풀이가 있는지 물어보더라고요. 분위기 봐서 할 수도 있고, 늦으면 안 할 수도 있다고 하니까, 아 그럼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자긴 어제 한국당 가서도 유세했는데, 거긴 뒤풀이 죽여줬다면서. 오늘도 또 오라고 했다며. 그래서 내가 아, 그럼 우리도 하지 뭐. 라고 하니까, 이번에는 술은 뭐 마시냐고 그러는 거예요. 


- 그래서?


- 뭐, 소주나 한 잔 할까? 라고 하니까, 그럼 자기는 한국당 가겠다는 거예요. 맥주 아니면 안 된다고.



한국당이라면 자다가도 지기 싫어하는 보좌관은 당원들과 아르바이트 생들을 모두 모아 맥줏집에서 뒤풀이를 벌였다. 비록 자기 앞에 아무도 앉지 않았지만, 맥주를 기다리는 기혁의 표정은 뿌듯하고 보람차 보였다. 그런데, 맥주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건 한 중년 남성이었다. 


- 자네, 어제 한국당 유세도 갔었다지. 


- 네.


기혁의 짧은 대답에 정민은 반갑다는 듯이 물었다. 


- 정치에 상당한 관심이 있군!


- 아뇨. 한국당은 뒤풀이 2차 가면 수입맥주도 사주거든요. 


정민은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그 사이 맥주가 나왔다. 


- 아, 그런가. 마시게……. 


정민은 속으로는 야심차게,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하게 물었다. 


- 그나저나, 자네 정치에는 뜻이 없나? 


그러자 기혁은 ‘마침내 올 게 왔구나’ 하는 표정이 되었다. 진지한 얼굴로 기혁은 우선 잔을 쥐었다. 그리고 우선 말없이 마셨다. 맥주를 넘기는 그의 목울대가 여러 번 올라갔다 내려왔다. 잔을 내려놓은 그의 윗입술에는 흰 거품이 잔뜩 묻어 있다.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저는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선생님, 저는 맥주가 좋아요. 




2012년 4월. 


정민은 4년 후, 또다시 만난 기혁을 보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기혁은 여전히 얼굴에서 빛이 났고, 성공 따위야 상관없다는 듯한 무관심한 자신감이 배어있었다. 그 녀석에게 또 행인이 다가가 말을 건다. 그리고 기혁은 다시 기나긴 토론 속에 몸을 던졌다. 정민은 그에게 다시 한 번 다가갔다. 그리고 정치인 답지 않게 좀처럼 명함을 건네지 않는 그가 명함을 한 장 꺼냈다. 그 명함을 건네며, 이번에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게!


일부러 목소리에 힘도 잔뜩 주어 말했다. ‘녀석이 알아채야 할 텐데.’ 정민은 조바심이 났다. 다음날 줄곧 연락을 기다려온 정민에게 문자가 한 통 왔다. 저장되지 않는 번호였다. 정민은 순간, 기혁 임을 직감했다. 기대치 않았던 문자에 정민은 반가운 마음이 들어, 잽싸게 전화기 화면을 확인했다. 


[선생님. 집에 와서 여러 번 생각해봤는데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약속하신 알바비보다 1만 원이 모자란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연락처가 그쪽 밖에 없어서요. 제 계좌는 …….] 


‘으으으…!’ 


정민은 허탈과 분노, 실망이 뒤섞인 탄성을 질렀다. 





2016년 4월. 


평일 오후, 노이쾰른에는 손님이 달랑 두 명 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유정민을 만나 이야기를 듣던 기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 네. 제가요? 절 보고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라고요?


지난 선거에서 확실히 기혁을 기억한 정민은 같은 동네에 살면서, 종종 마주치곤 했다. 물론, 그때마다 기혁은 술에 취해 있어, 정민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 제가 뭣 땜에 나가야 하죠?


기혁의 다소 맥 빠지는 반문에 정민은 약간 실망했다. 하지만, 자기가 기혁의 입장이라도 당황했을 법하다 싶었다. 정민은 차근차근 설명하기로 했다. 


- 잘 들어. 우리 당은 신자유주의로 인해,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청년들을 위해 정치를 하고자 해. 능력 있고, 열정 있지만 지난 8년간 여권이 쌓아놓은 진입장벽 때문에 노동시장에 진출하지도 못하고, 자기 꿈을 접은 채 살아가는 젊은이를 위한 정치를 할 거란 말일세. 그런데, 이런 정치를 우리가 한다고 하면 진정성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하네.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은 우리가 야당이지만 2000년대 초반에는 집권당이지 않았나. 그때 국민들이 가졌던 기대치에 우리가 미치지 못했던 것이지. 아직 그때 세력이 당에 남아 있는 것도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기도 하고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건 말이야. 우리가 드러나지 않는 것일세.


- 네? 안 드러나면 포기하신다는 건가요?


정민은 어쩐지 기대와 다르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그는 스스로 꺼낸 말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말을 이었다.


- 그게 아닐세. 우리가 드러나지 않을 뿐, 전체적인 판은 그대로 짤 거야. 정치는 우리가 하는 거지. 하지만, 우리 대신 연극을 해줄 배우가 필요해. 진정성을 연기해줄 배우 말이야. 


- 저는 연극을 해본 적이 없는데요. 


능청을 부리는 것인지, 딴청을 피우는 것인지 기혁은 연이어 정민의 기대에 어깃장을 놓았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우리는 시대의 희생양인 젊은이가 직접 배지를 달기 원하네. 그래야 우리 당이 재기할 수 있네. 이번 총선은 반드시 이겨야 하네.


기혁은 아무런 말도 않고, 묵묵히 있었다. 


- 자네, 지금 마포 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나? 전국의 모든 눈이 마포 을에 집중돼 있네. 이런 판국에 유명 연예인이나, 방송인, 운동선수가 나온다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아.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고, 충격을 주는 혁신적인 후보가 출마해야 한다는 말이야. 


- 그러니까, 그게 왜 저라는 겁니까?


정민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반문했다. 


- 자네, 정말 몰라서 이러나. 터놓고 말해서 자네 명성대 사학과 나오지 않았나. 옛날 같으면 대기업 취직해서 아무 걱정 없이 사네.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고. 성남 시장도 자네 선배 아닌가. 아무튼, 그게 일반적인 시스템이지. 그런데, 지금 자네는 어떤가. 


기혁은 자신을 보았다. 늘어난 셔츠, 거뭇한 수염, 물 빠진 청바지, 맥주를 마시느라 약간 나온 배, 푸석한 피부, 싸구려 운동화에 낡은 배낭. 스스로 보기에도 희망에 부풀어 있던 불과 몇 년 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 판이었다. 


- 자네야말로 재능 있지만 구태 정치가 이식한 악법 때문에 억압받는 젊은이의 상징일세. 이런 자네를 내세워야 ‘제대로 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단 말일세. 게다가, 자네는 도전 골든벨 우승자에, 대학 시절 전국 토론 대회 우승자 아닌가. 


-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아셨죠?


- 정당에서 사람 만날 때, 그냥 시간 때우려고 만나는 줄 아는가?


- 네… 근데, 그건 상금으로 맥주 여행을 가려고……. 


그러자, 전략 기획 실장은 거의 포기하듯 말했다. 


-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해줘야 자네가 만족하나. 뭐, 이집 맥주 평생 공짜로 마시게 해준다면 괜찮겠나? 


- 아니, 이 집 맥주를요?


정민은 거의 단념한 듯 말했다. 


- 그래. 이 집 맥주……. 


‘아니, 노이 쾰른 맥주가 평생 공짜라니!’ 


기혁은 놀라서 잔을 쏟을 뻔했으나, 애써 태연한 척하며, 손을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 저어, 그럼. 이 에일도 마시고, 필스너도 마시고, IPA도 마시고, 바이젠도 마셔도 되는 겁니까. 


- 뭐, 그쯤이야. 


정민은 기계적으로 답했다. 


- 라거도 마시고, 골든 에일도 마시고, 크리스탈 바이젠도 마실 수 있는 겁니다. 


- 그렇다니까. 


반사적으로 말한 그는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 으.. 응?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기혁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놓고 말했다. 


- 지키셔야 합니다. 약속. 


탁자 위에 올려놓은 스마트폰 화면에는 녹음 기능이 작동 중이었다. 


- 평생입니다. 평생! 


기혁은 장난감 가게를 통째로 선물 받은 소년처럼 또 한 번 행복한 함박웃음을 지었다. 


다시 말하지만, 35세의 기혁 역시 딱히 바라는 것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었다. 생의 거대한 욕망도 없다. 하지만, 바라는 것이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맛있는 맥주를 마시는 것. 오직 그뿐인 남자. 단 한 잔의 훌륭한 맥주만 있으면 행복한 남자. 그가 바로 장기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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