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명현 May 22. 2020

웹소설. 피투성이 소나타

8화

의무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축복과 저주가 새겨진 동전처럼.

연희와 유호의 결혼식을 두 시간 남긴 일요일 오전 열 두시. 시현은 웨딩 케이크를 만들고 있었다. 레몬즙을 넣어 상큼한 맛이 도는 스폰지에 초콜렛 크림을 샌드하고 겉은 하얀 버터크림으로 장식했다. 2단 케이크였는데 아래쪽에는 여러가지 모양 패턴, 위쪽은 꽃 모양을 짰다. 물결을 연상케 하는 패턴을 최대한 다양하게 짜면서 단조롭지 않도록 중간중간 포인트를 준다. 중앙에 장미꽃 아홉 송이를 짜고 주변을 에워싸는 형상으로 다양한 크림 꽃을 틔워 정원을 다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정한다는 개념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 동안 연습했던 시간만을 생각하며 즉흥적으로, 스스로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 최대의 섬세함과 자유로움을 구현할 뿐. 악보없이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있다. 그는 언젠가 연주에 좋지 않은 환경에서 콘서트를 가진 적이 있었다. 예술가의 자존심으로 처음엔 연주를 거부했지만 주최자의 간곡한 설득으로 콘서트를 치루었고, 열악한 조건을 정상과 마음으로 극복한 무대는 명반의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시현의 마음은 그 이야기와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아버지와 딸. 사랑으로 그들과 한 가족이 되려는 선한 청년. 그들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마음은 세밀하고 대담한 손놀림으로, 놀랄 정도의 정확성과 미사여구가 필요치 않을 정도의 아름다움으로 구현되고 있었다.

"끝났다.."
 
시현은 이마에 묶고 있던 두건을 풀었다. 마침내 완성된 웨딩 케이크는 신화 속 하늘 정원을 연상케하는 자태로, 탄성을 넘어 존경심을 가질 정도의 완성도였다. 땀 한 방울이 시현의 관자놀이에서 시작되어 목 안쪽으로 흘러 내린다. 자신의 작품을 유심히 바라보는 시현. 작업 시간은 한 시간 정도 걸렸고 크림 연습을 한 기간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시현의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즉흥 작업이어서 어느 정도 실수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기술적인 측면은 실수없이 완벽했지만 프로의 눈으로 볼 땐 전체적인 균형이 조금 맞지 않는 것이 보였다. 다시 만들 수는 없는 노릇. 시현은 대형 케이크 상자에 넣으면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저 그렇군..."  

상가 근처의 웨딩홀에서 2시 예식이었다. 시현은 먼저 주최측에 케이크를 전달했다. 한벌 뿐인 정장에 구두까지 신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조금 어색하지만 시현은 진심으로 지선 할아버지에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시장 사장님들 중에서 찾아온 이가 꽤 많았다. 작은 웨딩홀을 꽉 채울만큼 많은 하객들의 모습은 지선 할아버지에게 가족이 없다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동안 지선 할아버지가 쌓아온 신용과 정직함이 되돌아온 것이라 시현은 생각했다. 신랑 신부의 친구들도 정말 많았다. 웃음과 축하 인사가 가득해 마치 팍팍한 현실이 거짓말 처럼 느껴진다. 연희와 유호가 학교 생활을 얼마나 잘했는지 짐작하며 시현은 턱시도를 입은 유호와 악수를 나누었다. 

"시현 아저씨. 와주셔서 고마워요."

웨딩 드레스를 입은 연희를 보자 그 동안의 크림 연습이 가져온 심적 피로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늘 백합을 생각하게 하는 웃음이 연희가 느끼고 있는 깊은 행복을 말해주고 있었다. 두 딸을 데리고 온 반찬가게 아주머니는 폰으로 사진을 찍어 주었고, 비록 시현은 웃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편안한 표정으로 새 신부를 바라보는 모습이 찍혔다.

결혼식은 축제와 같은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시장에서 장사 잘하기로 이름난 과일가게 아저씨가 사회를 보았는데 어지간한 코미디언 뺨 때리는 입담을 과시했다. 식이 이어지는 내내 어찌나 웃음 소리가 컷는지, 유명한 토크쇼 라이브 현장에 와있는 것 같았다. 지선 할아버지가 연희와 함께 입장해 유호에게 인도할 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시장 식구들은 가슴 뻐근한 감동에 젖었다. 시현 역시 감정 표면에 파문이 퍼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기원했다. 부디 서로를 향한 해바라기가 되기를.

반찬 가게 첫째 딸 시류의 바이올린 연주는 무척이나 듣기 좋았다. 전공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부터 현악기 다루는 걸 좋아해 음악을 즐기고 있음이 느껴졌다. 학교 생활하랴 가게 일 도우랴 바쁘면서도 시간을 내어 열심히 연습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바이올린 현의 떨림은 축복받은 분위기와 어우러져 하객들의 마음에 파장을 남긴다. 곡이 끝나고, 박수를 치는 시현에게 옆자리에 앉은 호경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시현 씨 아는 사람이 노래 부르기로 했다면서?" 

"제가 아는 사람...누구요?"

"어..모르는 거야? 상가에 새로 문을 연 학원 원장인데, 시현 씨 지인이라면서 축가를 불러준다고 지선 형님한테 말했대."

"처음 듣는 군요."

시현이 아는 한 근방에서 시현의 지인은 치과 의사 친구일 뿐이었다.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검은 색과 흰 색이 조화를 이룬 치마 정장 차림이 여인이 마이크를 들고 한켠에 섰을 때, 시현은 모든 현실을 잊고 그녀의 모습에 영혼을 빼았겼다. 어떤 일이 있어도 흐트러진 적 없는 눈동자에 떨림을 일으키면서.

'앞으로 도련님을 모실 은아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시현 나이 7세. 수제자로 발탁되어 한참 무술을 익힐 때였다. 은아는 지금껏 시현을 돌보았던 유모를 대신하는 몸종으로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이후 그림자처럼 시현의 뒤를 지킨 다섯 살 연상의 사용인. 시현은 은아에게 만큼은 어떠한 비밀도 없었고 자신의 생각조차 숨기지 못했다. 문파의 당주가 되어서도, 스스로 그 자리를 버렸을 때도 은아는 한결같은 충성심으로 시현을 받들었다. 시현이 19살 나이로 본가를 나온 후 부터 소식조차 들은 적 없었다.

서른 여덟 살의 은아는 기껏해야 이십대 후반으로 밖엔 보이지 않았다. 동양 여성의 우아한 곡선이 완벽하게 균형을 잡은 얼굴에 상냥한 인상이 내려앉은 이목구비. 단정하고 기품있는 옷차림으로도 육감적인 몸매를 숨길 수 없었다. 가히 인간이 추구하는 미인의 기준 중 이상향을 보여주는 듯한 은아의 외견은 예식장에서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침묵을 확산시켰다.

"노래의 날개 위에..."

가곡 중 아름다움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명곡. '노래의 날개 위에'의 첫 소절이 흘러나오는 순간 하객들은 하얀 깃털이 나부끼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날씬하지만 마르지 않은 체격에서 발산되는 발성은 거목의 뿌리와도 같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서정적인 노래가사에 매료되기 전 이미 음색만으로도 사람들은 마음을 빼았겼다. 그런 반응을 살피는 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웃음지으며 한결 친근하게 음역을 낮추는 은아. 의식을 되찾은 하객들 사이로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박수와 환호성이 흘러나온다. 은아는 웃음이 깃든 화려한 목소리를 내면서 신랑신부를 가리키고 작은 손짓으로 축하의 박수를 쳤다. 노래만으로 예식장이라는 공간을 완벽히 사로잡은 그 매력이 시현에겐 죄책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를 가신다는 것입니까. 저는 도련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거야. 난 더 이상 당주도 아니야.'

'개는 주인의 의지에 따라 움직입니다. 도련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따를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존재 이유란 걸 아시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명령한다. 날 내버려 둬. 너의 인생을 살아. 그간의 정을 생각해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 이것이다.'

벌써 14년 전의 일이었다. 시현이 알고 있는 건 은아 역시 문파를 떠났다는 사실 뿐.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고 듣고 싶지도 않았다. 결혼식이 모두 끝나고 사람들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 계단 복도에서 마주선 시현과 은아. 은아는 175의 장신으로 178의 시현과 거의 비슷했다.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뭐라 말도 못하고 우물대는 시현을 자상하게 바라보는 은아였다. 감정의 기복이 없는 것 같은 시현의 흐트러진 모습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입장이어설까. 은아는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명함을 건냈다. 자폐아나 발달장애 아이들의 교육과 글짓기 교실이라 적혀 있는 명함에는 학원 약도까지 그려져 있었다. 시현이 어렵게 입을 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배려하듯 조용히 자리를 떠나는 모습은 우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시현은 명함을 받아들고 한참이나 서 있었다. 지금껏 살아온 날 동안 거의 경험한 적 없는 죄책감에 휘어 감기기라도 한 것처럼. 

며칠 후, 장사를 한 시간 정도 일찍 마친 시현은 은아의 명함을 들고 학원을 찾아갔다. 강사는 3명 정도였고 원장인 은아도 수업을 하는 중이었다. 한 타임에 수업받는 학생 수는 육십명 쯤 되어 보인다. 학생들 대부분이 발달 장애아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감정을 제어하는 데 서투른 아이들은 돌발행동을 보이기도 했지만 은아의 부드러움은 자상하게 아이들 한명 한명을 보듬고 있었다. 시현은 원장실에 가지고 온 빵을 놓고 조용히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은아가 혼란스런 시현의 흔적쯤은 아무렇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는 걸 잊었다는 것처럼.

"시현 씨. 아이들에게 빵에 대한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어느새 교실에서 나온 은아는 생긋 웃으며 부탁했다. 은아의 손은 시현의 오른쪽 손목을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접근한 게 언제였던가. 시현은 긴장했지만 곧 마음을 안정시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이 교실에 들어서자 한 아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선생님! 머리 따가워요! 번개가 쳐요!"

"왜 그럴까?"

"새로 온 선생님이 너무 좋아서요!"

아이는 머리 위로 박수를 치며 꺄르륵 웃었다. "빵 아저씨다! 빵! 빵!"시현을 알아본 몇명 아이들이 합세했고 교실은 금방 웃음과 박수로 넘실거렸다. 지도 교사들이 아이들을 부드럽게 진정시키는 사이 생각을 정리한 시현은 인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빵은 사람이 만든 과일이라고도 불리운 단다."

시현은 빵의 역사와 재미있는 유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어려운 단어는 전혀 없었다. 손주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라 하면 적절한 비유라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좋아하는 빵 이름을 말하기도 하고 칠판에 빵 모양내는 모습을 스케치까지 하면서 수업을 이끈다. 이십분 정도 수업을 마친 시현은 아이들의 질문을 받았고, 수려한 화법으로 톡톡 튀는 듯한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했다. 갑작스런 상황에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그 모습은 과거 한 문파를 이끈 수장으로서 당연한 교양이라 할 수 있을까. 저녁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이 학원 버스에 오르는 것까지 확인한 후 은아는 시현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 주셔서 고마워요."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11년 됐어요."

"내가 빵일을 시작한 경력과 같구나."

"수고 많으셨어요. 오늘은 이만..앞으로 자주 뵙겠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은아는 인사한 후 학원 건물로 들어갔다. 시현은 망연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식장에서 재회한 후 은아가 겨우겨우 감춰온 마음이 한 방울 눈물로 세어나온 것을 알지 못한 채. 14년 전의 이별이 오랜 길을 돌아 운명의 지휘 아래 다시 회귀했다. 그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서로의 표정에서 고개를 돌린 두 남녀의 앞날처럼, 시간을 관장하는 여신들의 실타래는 새로운 무늬를 잣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진격의거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