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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May 25. 2020

웹소설. 피투성이 소나타

9화

미래를 점치는 것, 과거를 회상하는 것. 모두가 현재의 연장일 뿐이었다.

비가 이틀 째 내리고 있었다. 시현은 에스프레소 도피오를 손에 들고 문에 반쯤 몸을 기댄 모습이었다. 손님들은 적당히 와주었고 습도를 체크해 반죽한 제품들도 하자가 없었다. 동그랗게 말린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휘파람. 동양의 악기가 떠오르는 서정적인 음색이 빗소리 사이를 헤메듯 나직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의 한 때를 즐기는 것인지, 두터운 크레마에서 올라오는 과일 같은 향기에 의식을 맡기는 걸까. 그렇게 말하기엔 시현의 눈빛은 차가웠고 진검의 날을 연상시키는 번뜩임이 어려 있었다. 옛 일을 굳이 회상하는 건 아니었다. 살아온 날의 절반 이상을 긴장 속에서 보냈던 걸 증명하듯 태연한 태도조차 사치로 느껴질 뿐. 휘파람은 곧 멎었고 시현은 발효실에서 반죽을 꺼내 작업대 앞에 서는 것이었다.

"들었어? 아래쪽 빌라에서 물난리가 났다던데."

'빛나는 나무'는 지형상 윗쪽에 있어 빗물이 넘칠 일은 없었다. 시현은 소문을 들은 그 날 장사를 마치고 아래쪽 빌라에 가 보았다. 물바다가 된데다 수도에 가스고 전기도 끊기고 난리가 아니었다. 일요일 날, 봉사자를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빵을 보낸 후 바로 참여했다. 모두가 열심히 도와 주었지만 그 중 세탁소집 부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건장한 체격의 아저씨는 물을 퍼내고 살림살이를 들어내며 번쩍번쩍 힘을 썼다. 그중에서 쓸만한 걸 골라내고 청소에 여념이 없는 아주머니는 손끝이 아주 야물어 있었다. 일단의 정리가 끝나고 사람들은 국밥집에서 보낸 순대국밥을 먹으며 한숨 돌렸다. 

"어라? 시현씨 어디갔어? 방금 전까지 있었는데.."

"따로 도시락 먹으러 간 것 같아."

"그 친구 참 희한해. 닭고기랑 채소 반찬만 먹고 질리지도 않나?"

"식이요법하나 보지, 뭐."

시현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담 위에 올라가 닭가슴살 샌드위치를 우물거렸다. 국밥을 권하는 사람들에게 매번 거절하기도 귀찮고 예의도 아니었으니까. 분석과 예지에 익숙한 시선은 빌라의 피해 상황을 금새 파악했다. 다른 복구 현장에 가느라 전문분야 직원들은 오지 않았지만 도와주러 온 사람이 많아 급한 건 오후엔 끝날 것 같다. 국밥을 먹으며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현이 눈여겨 본 세탁소 부부는 밥을 먹고 금방 일어났다. 꽤 힘들 텐데도 웃음을 머금고 있는 표정. 그 모습에 다른 사람들도 다시금 일을 시작한다. 조용히 현장으로 돌아온 시현은 본래 힘의 반 정도만 쓰며 물을 퍼내는 작업에 매달렸다. 다행히 오늘은 날이 좋았고 눈 앞의 난제는 모두 해결되었다. 사람들은 각자 "수고하셨습니다."인사를 나누며 기분 좋게 헤어졌다.

"일 정말 잘하네. 시현씨. 고생 많았어."

세탁소 아저씨가 아는 척을 했다.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주머니도 웃는 얼굴로 말을 걸었다.

"먼 거리도 아닌데 그동안 인사를 못했네. 식빵을 그렇게 맛있게 만든다면서?"

"식빵만 종류별로 팔고 있습니다. 식사용으로 드실만 하실 거예요."

"혼자 산다고 들었는데..세탁할 거 밀리거나 하면 우리 집에 맡겨. 공짜로 해줄게."

"맡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경우엔 빵으로 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되지. 하하." 

뭔가 하고 싶은 말을 숨기고 있음을 알았지만 시현은 모르는 척 넘겼다. 부부 내외가 밝고 씩씩하게 보이지만 은연 중 내면의 고민이 그림자처럼 비치는 것까지도. 시현은 빠르게 소문을 알고 싶을 때 들르는 치과 의사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 치과의 예성은 족발을 정보료로 걸었고 시현은 시장에서 족발 중 자 하나와 소주를 들고 예성의 오피스텔로 찾아갔다. 근육질로 뭉친 80kg의 예성은 족발을 우적우적 밀어넣고 소주로 병나발을 불면서 시현의 물음에 답했다.

"그 집 아들이 발달 장애래. 나이가 스물 아홉인데 정신 연령은 예닐곱 살 수준이라나."

인스턴트 커피를 블랙으로 마시며 시현은 은아의 학원이 떠올랐다. 학원이라 하지만 장애아들을 오랜 시간 돌봐주는 걸 생각하면 장애를 가진 아이 부모님들에겐 흔치 않은 좋은 장소. 시현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족발 다리를 물어뜯으며 예성은 말을 이었다.

"은아 님의 학원이 문연지 한달쯤 되었는데, 세탁소집 아들이 낮시간에 학원에 나가고 있어. 그때 너에 대해 은아 님이 얘기했겠지."

"그렇군..고마워."

"좀 같이 먹지 그래."

"이제 보통 음식은 달고 짜서 못 먹겠어."

예성은 별 말 없이 시현을 놔주었다. 과거 당주였던 시현에겐 말을 놓고, 시현의 사용인이었던 은아에게는 존칭을 쓰는지에 대핸 언급하지 않는다. 시현 역시 그 사실에 신경 쓰지 않는 눈치. 일주일에 여섯 시간 남짓한 자유 시간을 온전히 봉사활동에 사용함 시현은 가게에 딸린 방으로 돌아왔다. 텔레비전도 앨범도 없는, 사막의 공허함을 닮은 자신의 방으로. 시현은 두 손을 바닥에 대고 느릿하게 물구나무서기 자세를 취했다. 시현의 체지방은 6퍼센트. 결결이 갈라진 근육과 그 위로 불거진 핏줄이 꿈틀대며 약동한다. 아주 천천히 새끼 손가락부터 접기 시작했다. 양 쪽 엄지 손가락만으로 물구나무를 선 후 한참을 그대로 있는다. 아무 것도 없는 방에 생명을 불어넣듯, 압도적인 신체능력과 놀라운 집중력은 시간이 가져가려는 허무함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월요일은 날이 조금 흐렸다. 비가 올 조짐은 보이지 않아 시현은 가벼운 마음으로 구워진 빵을 진열했다. 재료상 도련 아저씨를 기다리며 원두를 갈던 참이었다. 채소 재료를 실어온 이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지난 주 금요일까지만 해도 도련 아저씨가 왔기에 시현은 새로 온 이에게 어찌된 일인지 물었다.

"도련 씨. 외상값 안 갚으려는 식당 주인하고 주먹다짐을 했어. 둘 다 크게 다쳤다는데 도련 씨가 폭행 전과가 있어서 상황이 안 좋다더라구. 당분간은 못 나올 거야."

시현은 씁쓸한 기분을 감추며 커피 한잔을 담아 건냈다.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도련 아저씨에게서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건 알고 있었다. 기분풀이를 핑계대기 위한 게 아니라 정말로 앞뒤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화를 폭발시키는 정신질환. 고된 재료상 일을 하면서 가족을 위해 어떻게든 억눌러 왔지만 질나쁜 상대방에게 걸린 것 같다. 나중에 상황을 들어봐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가게 앞 테라스의 먼지를 터는 시현의 손길은 언제나처럼 침착했다.

"어..도련 아저씨 안 오셨어요?"

반찬가게 첫째딸 시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오늘도 도련 아저씨를 위해선지 컵에 넣은 주먹밥을 들고 있었다. 오늘따라 바쁘게 일을 도왔는지 머릿결 밑이 살짝 땀에 젖어 있다. 시현은 거짓과는 인연이 없었다. 담담한 어투로 자신이 들은 바를 말하자 시류는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막았다. 생각보다 더 놀란 것 같다. 늘 현실을 직시하는 화법의 시현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잇는다.

"상대방 측이 잘못을 했으니 일방적으로 과한 처벌을 받진 않을 거야."

"너무 해요..도련 아저씨가 얼마나 고생하시는데..외상값을 안 주다니.."

"장사하는 사람들 중엔 이런 저런 사람이 있는 법이야."

"알아요. 하지만..하지만..정말 너무 하네요."

시류의 눈이 떨리는가 싶더니 파편같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시류도 도련 아저씨에게 폭행 전과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과거의 죄에서 벗어나려는 듯 몸이 상할 만큼 노력하고 있었다는 것도. 무거운 채소 상자를 옮기면서도 항상 밝게 인사하고 시류에게 유난히 친절했던 도련 아저씨를 생각하는 걸까. 시류는 쉽게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시현은 에스프레소 룽고를 내렸다. 안쪽에서 설탕을 듬뿍 넣어 시류에게 건낸다. 시류는 당황한 듯, 시현의 태도에 놀란 듯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저 쓴 건 잘 못 먹어요..."

"설탕 많이 넣었어. 그냥 단숨에 마셔 봐."

시류는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이내 에스프레소를 들이켰다. 설탕을 넣는 걸 보지 못해 의외의 맛이 혀에 닿자 찡그렸던 미간이 바로 펴진다. 에스프레소에 대한 인식과 전혀 다른 달콤쌉싸레한 맛이 나쁘지 않았는지 한번에 싹 비웠다. 시현은 잔을 돌려 받으며 조용하게 말했다.

"어른들의 인생은 쓴 맛이 나지. 하지만 살아가면서 달콤한 일들이 생기고, 행복했든 불행했든 결국 끝을 보는 수박에 없어. 도련 아저씨가 무사하길 바라자."

"..그래요."

짧은 말이나마 안심이 되었는지, 시류는 꾸벅 인사한 후 학교에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시현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가게로 돌아갔다. 일상에 충실함이 결국 기적을 만든다는 단순한 진리를 생각하면서.

저녁 여덟시. '빛나는 나무'의 평균적인 폐점 시간이었다. 일을 마친 시현은 며칠간의 비에 깨끗이 씼겨 내려간 공기를 즐기고자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운동장으로 향했다. 보통 하루 한 시간의 수련을 쪽방에서 하는 편이었지만 때때로 밖으로 나갈 때도 있었고, 그럴 땐 보통의 신체능력으로 무리없는 운동을 하곤 했다. 

400미터 운동장을 열바퀴 도는 것이 오늘 정한 트레이닝이었다. 시원한 저녁 공기를 만끽하며 느긋하게 뛰는 데, 어제 봉사활동에서 만났던 세탁소 부부가 걷기 운동 하는 것이 보였다. 아들로 보이는 이도 있었는데 아주머니가 손을 꼭 잡고 함께 걷고 있었다. 시현의 시선은 걷는 모습과 몸짓에서 익히 들었던 발달 장애가 있음을 파악했다. 시현은 천천히 걸으면서 바로 옆까지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뵙네요."

"오, 시현 씨 잖아?"

"아휴, 반가워요. 운동하는 건 처음 보네. 자주 와?" 

"가끔씩이요."

"진수야. 인사해. 윗동네 빵집 아저씨야." 

"안녕하세요.."

아들 진수는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수줍은 듯 엄마 뒤에 가 섰다. 시현은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매일 이 시간이면 온 가족이 나와서 걷기 운동을 한다는 것을 듣자 시현의 감각은 소중한 진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장애가 있는 아들을 더 오래 돌보기 위해, 그리고 아들의 세계를 넓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시현 씨가 은아 선생님하고 아는 사이라면서. 꼭 좀 전해 줘. 이 근방에 그런 학원을 차려줘서 고맙다고. 하루 종일 진수를 맏길 수 있으니 우리 생활이 훨씬 편해졌어. 진수도 좋아하고. 정말로..감사하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어."

"기억하죠."

시현은 이쯤에서 대화를 끝내고 다시 뛰었다. 뒤돌아 보지는 않았지만 진수가 "빵. 빵 먹고 싶다." 하고 아주머니가 "내일 사줄게. 오늘은 참자?"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세 가족 중 앞서 걷는 아저씨의 입에서 오래된 가요가 흘러나오는 것도. 시현은 사십분 정도 느긋하게 달린 후 가벼이 손과 발을 풀었다. 운동기구에 올라 어린아이처럼 깡총대는 진수와 혹 다치지는 않을까 옆을 지키는 세탁소 부부를 뒤로 하는 와중, 핸드폰을 꺼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현이냐?"

"예, 아버지. 건강하시죠."

"그래."

"다음에 또 전화하겠습니다. 잘 지내세요."

"너도 잘 지내라."

부자 지간에 당연하다고 하면 당연한 짧은 통화. 시현은 어머니 핸드폰의 번호를 누르다가, 은아의 모습이 떠오르자 핸드폰 액정을 껐다. 타인의 사정을 잘 들어주지만 자신의 일에 대해선 함구하는 버릇처럼. 밤바람에 감정의 흔들림을 맡긴 채 조용히 가게로 돌아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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