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명현 May 26. 2020

웹소설. 피투성이 소나타

10화

다른 이에게 하는 말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 오는 것이었다.

불 위에 올려진 들통에서 나는 향이 작업장을 메우고 있었다. '빛나는 나무'의 식빵들은 종류에 따라 들어가는 물이 다 틀렸다. 야채식빵엔 야채 스톡. 옥수수 식빵엔 옥수수 수염차. 그런 식으로 감칠맛이 배인 물을 매일 만들고 있었다. 수고가 필요하지만 제품에 더해지는 풍미를 생각하면 거를 수 없는 일. 앉을 자리도 하나밖에 없고 화려한 단과자빵도 없는 '빛나는 나무'가 유지될 수 있음은 시현의 부지런함이 낳은 결과였다.

"사장님. 옥수수 식빵 좀 줘."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던 할머니. 미란 할머니가 주름진 얼굴에 웃음을 담으며 가게로 들어갔다. 부동산 아주머니가 애써서 좋은 조건의 집을 구해준 후 원래 웃는 인상이었던 얼굴이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마침 옥수수 식빵이 막 구워진 참이었다. 시현은 연한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미란 할머니에게 건낸 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빵을 보여주었다.

"지금은 뜨거워서 자르기가 조금 곤란한데 기다렸다 가져가시겠어요?"

"으응. 그럼 그냥 줘. 손으로 찢어먹으면 되지. 봉투에만 담아 줘. 그리고 이거.."

미란 할머니는 들고있던 검은 봉투를 내밀었다. 빵냄새로 가득한 가게에 알싸한 향이 살포시 피어오른다. 쑥과 오이. 가지. 고구마 줄기 등 등 텃밭에서 직접 거둔 채소들이었다.

"쑥은 아직 부드러우니까 튀겨 먹거나 깨소금 무침을 해먹어도 좋을 거야. 고구마 줄기랑 가지는 볶아 먹어."

"감사합니다."

"이런 건 먹지? 반찬 가게 아줌마가 나물은 안 먹으니 그냥 주라고 했는데.."

"맞습니다. 다 생으로 먹겠습니다. 맛있어 보이네요. 야채식빵 하나 서비스로 드릴게요." 

"맨날 맛있는 커피 주는 게 고마워서 주는 거야. 답례라 생각하고 넣어둬. 아참..이건 좋아할지 모르겠어서 줘야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데.."

주섬주섬 신문지에 싸인 꾸러미가 하나 더 나왔다. 깻잎 냄새가 고소하게 올라옴을 인식하기 전, 벌레 먹은 구멍이 숭숭 뚫린 게 먼저 눈에 들어온다. 미란 아주머니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농약을 안해서 벌레가 먹었어. 이걸 따느라 모기한테 얼마나 시달렸는지 몰라. 얼굴이고 팔이고 안물린 데가 없어. 보긴 좀 이렇지만 보약이야, 보약."

"수고 많으셨습니다. 구운 닭고기랑 먹으면 맛있겠군요. 여름에 몸보신 제대로 하겠네요."

"그래? 다행이네. 다행이야."

가지고 오면서 고민을 조금 했는지 시현이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자 미란 할머니는 소녀같은 웃음을 지었다. 미란 할머니는 시장에서 흥정을 안 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고기나 생선을 살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보고 키우라 해도 무슨 수로 키우고, 바다에서 잡으라면 잡겠어? 다 힘들게 짐승 기르고 바다에 나가 고생해서 잡은 건데. 감사한 마음으로 먹어야지." 장사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생각해 상황이 되는 대로 작은 선물이라도 챙겨주는 미란 할머니. 빵이 든 봉투를 손목에 감고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면서 가게를 뒤로하는 그 모습을 보며 시현은 오이 하나를 베어 물었다. 아삭아삭한 식감을 즐기다가 맑은 여름 하늘을 올려다 본다. 입을 메우는 청량감에 매료된 듯, 할머니의 소박한 정성이 닿은 걸까. 시현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맛이 좋군."

'빛나는 나무'는 영업 시간의 대부분 동안 빵을 구워내는 편이었다. 오전 오후로 한 시간 정도 캐셔만 보는 때도 있지만 재료 준비까지 생각하면 시현은 거의 쉬는 시간 없이 15-6 시간을 꽉 채워서 일하는 셈. 그렇게 바쁘게 일하는 체계를 잡았지만 늘 팔리는 양보다 더 많은 빵을 만들었다. 때문에 식빵 이십 개 정도의 추가 주문은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은아가 운영하는 학원 '꽃밭'의 학부모들이 샌드위치용 사각 식빵을 주문한 것이었다. 원생들을 데리고 문화공원으로 소풍을 가는데 그때 샌드위치를 만들어 간다고 했다. 시현은 재료상에 연락해 고급 케찹, 마요네즈. 신선한 채소와 천연 재료 햄 같은 좋은 식자재를 저렴하게 구하도록 다리를 놓아 주었다.

금요일 밤 일곱시. 사각식빵 이십 개를 모두 자르고 봉투에 담아 준비한 참이었다. 아주머니 세분이 빵을 찾아가기 위해 찾아왔다. '꽃밭'에선 한 시간 이상 거리에서 등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상의 먼 거리도 적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정신 장애아 자녀가 있는 가정 입장에선 조금 과장해서 '구원'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학원이었으니까. 두 분은 초면이었지만 국밥가게에서 일하시는 초원 아주머니는 금방 눈에 띄었다. 모자에서부터 상의. 하의. 양말과 신발까지 모두 빨간 색이었으니 그럴 수 밖에.

"빵 준비 끝났습니다. 가져가시면 되요. 샌드위치 재료는 학원으로 가도록 연락해 놓았습니다."

초원 아주머니가 현금이 담긴 봉투를 건냈고 시현은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시현이 액수를 확인하는 동안 아주머니들은 빵이 담겨있는 봉투를 나누어 들었다. 만원짜리 지폐를 세던 시현은 만원이 더 들어있는 걸 확인했다. 바로 돌려주려 하자 초원 아주머니가 손사래를 쳤다. 

"고마워서 내가 한장 더 넣었어. 다른 말하지 말고 그냥 받아. 우리 빨리 가야 하니까 커피는 나중에 줘."

초원 아주머니는 일행에게 서두르자고 말하며 분주히 가게를 빠져나갔다. 시현은 만원짜리를 가만히 바라보다 돈통에 넣었다. 아침 반죽도 준비됐고 오늘은 장사를 접어도 될 듯 싶다. 30분 후 가게 문을 닫은 뒤 시현은 하얀 작업복과 전용 칼을 가방에 넣고 밖으로 나섰다. 여름이어선지 저녁의 시장에는 생기가 감돌았다. 치킨 튀기는 냄새와 맥주잔 부딪치는 소리. 분식 노점에도 손님들이 제법 앉아 있었다. 마트에서 3개 천원으로 파는 아이스크림 콘을 하나씩 들고 깔깔대는 아이들까지. 여유와 즐거움이 시원한 바람 사이로 스미는 시간이었다. 

문득 유리창에 얼굴을 비춰보았을 때 머리가 자란 것이 눈에 띄었다. 위생을 위해서도 늘 짧은 머리를 유지하는 시현이었다. 미리 온 손님이 없으면 좀 정리해야겠군. 항상 가는 미용실에 갔을 때 중학생 딸과 함께 티브이를 보고 있던 지연 아주머니가 반겨 주었다.

"어머, 어서와. 시현씨. 가게 문 일찍 닫았나 봐?"

"안녕하세요. 그렇게 됐습니다. 짧게 다듬어 주세요."

시현은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미용실에 들를 줄 미리 알았다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도 한잔 들고 왔을 텐데. 지연 아주머니가 물 스프레이를 뿌릴 때 딸아이가 보조할 준비를 했다. 작업에 필요한 가위를 미리 꺼내 주거나 스펀지를 건내는 등, 평소 일을 자주 거들어선지 아주 능숙해 보인다.

"요즘 좀 어때? 장사는 잘 되지?"

"덕분에 잘 되고 있습니다. 미용실에 곤란한 손님은 없으신지요."

"저번에 밤에 문닫고 올라가려는데 어떤 술취한 아저씨가 대자로 누웠어요."

딸아이 요원이 재잘재잘 일러 바쳤다. 일상적인 목소리지만 묘하게 동요같은 리듬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런 말 하는 거 아냐."지연 아주머니가 웃으며 말했고, 요원은 참새가 연상되는 태도로 신나게 떠들었다. 소리 지르는 아이. 외상값 안 갚는 손님. 하라는 대로 잘라 주니까 맘에 안든다며 불평하는 아가씨 등등..시현은 미용실의 일상을 즐겁게 상상할 수 있었고 머리를 감은 후 좋은 기분으로 돈을 지불했다.

"어머님께서 늦으시겠네요."

시현의 조용한 목소리에 지연 아주머니는 웃음 지었다. 기쁨이나 예의와는 다른 의미가 깃든 표정. 아까 빵을 찾아간, 온통 빨간 옷차림을 한 초원 아주머니는 지연 아주머니의 어머니였다. 초원 아주머니는 무책임한 남편을 대신해 고되게 일하며 4남매를 키워낸 분이었다. 다른 자녀들은 잘 자라 독립했지만 자폐아인 막내를 위해 오늘날까지도 고생을 하는 형편이었다. 머리 자른 자리를 조용히 정리하는 사이 지연 아주머니의 얼굴에 약간의 우울이 깃든다. 눈을 내리깔며 흘러나오는, 삶의 무게가 서려있는 목소리.

"오늘도 빨갛게 입으셨지?"

"네."

"어떤 손님이 그러시더라고. 나이도 있는데 시뻘겋게 하고 다니는 건 창피하지 않느냐고. 나보고 좀 말려보래."

"다른 사람의 상황을 모르고 말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지요."  

"맞아요. 우리 할머니가 그렇게 입고 다니는 건 막내 이모를 위해선데. 몇몇 사람들이 문제라니까요."

다행히 손녀 요원은 할머니를 이해하고 있었다. 두달 전쯤 점쟁이에게 복채 대신 국밥 한그릇을 대접한 후 들은 말이 빨간 옷을 입으면 자식들이 잘 된다는 소리였다. 마음 기댈 곳이 마땅히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자식들을 위한 마음이 넘치고도 남아서 였는지 그 날부터 온통 빨갛게 입기 시작했다. 그런 차림을 한지 얼마 안되어 은아의 학원이 열리자 철석같은 믿음이 생긴 모양이었다. 혼자선 아무 것도 못하는 아픈 막내 딸을 안심하고 맏길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이틀 동안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까지 들은 바 있었다. 시현은 특유의 투명한 눈동자에 생각에 잠긴 지연 아주머니를 담으며 말했다.

"어머님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받아들이시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신 겁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시현 씨."

"내가 용돈 모은 걸로 야채식빵이랑 밤식빵 한번 털러 갈게요. 고마워요. 빵 아저씨."

시현은 손 흔들어 인사한 후 미용실을 나섰다. 몸과 마음의 상쾌함을 느끼며 걸음을 내딛는다. 조리도구까지 챙겨들고 시현이 찾아간 곳은 은아의 학원 '꽃밭'이었다. 입구에서 잠깐 망설이는 듯 하다가 고개를 한번 끄덕인 후 계단을 올랐다. 수업은 모두 끝났는지 교실은 비어있었다. 주방에선 내일 소풍에 가지고갈 샌드위치를 만드는 준비가 한창이었다. 아주머니들과 강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사이, 앞치마를 두르고 계란 삶을 준비를 하던 은아는 시현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조용한 미소로 맞이했다.  

"도와드릴까 해서 왔습니다."

"와주셔서 고마워요."

시현은 바로 일을 시작했다. 두꺼운 수제 햄을 슬라이스하고 채소를 먹기 좋게 자르는 칼질에는 생동감이 넘쳤다. 마요네즈에 결대로 찢은 맛살과 삷은 달걀을 섞어 으깨는 동작은 신속하면서 섬세했다. 평소에도 다량의 샌드위치를 만들어온 것처럼 빠른 손놀림은 과연 주방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라 인정하게 하는 것이었다. 아주머니들과 강사들이 느낀 피로도는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이 마무리되자, 빨간 앞치마를 두르고 일했던 초원 아주머니가 시현의 손을 잡았다. 붉은 머릿 수건 아래 떨리는 눈동자는 감격에 젖어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줘서 고마워. 내가 준 만원의 보답이라고 하기엔 너무 크잖아.."

"그것때문에 온게 아닙니다. 원장 선생님께 신세진 게 많아서 그래요.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예요. 제가 받은 것에 비하면."

"정말 원장 선생님도 그렇고..시현 씨도 그렇고..고마운 사람들이야."

웃음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시현은 분명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은아는 내일 일정을 확실하게 통보하며 아주머니들과 강사들을 돌려 보냈다. 방에 단 둘이 남은 은아와 시현은 완성된 샌드위치를 랩으로 싸서 냉장고에 넣었다. 은아는 시현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다. 보는 이가 없는 상황에서 시현의 손놀림은 아까의 재빠름 같은 건 애들 장난이었다 말하듯 무서울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다. 백개가 넘는 샌드위치를 포장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작업을 마치고 시현이 가벼이 숨을 몰아 쉬자. 은아는 상담실 소파에서 쉴 것을 권했다.  
  
"꿀물은 드시죠?"

"물론.."

은아는 산뜻한 풍미의 커피 꽃에서 딴 꿀을 넣은 꿀물을 가져왔다. 시현은 두 손으로 잔을 받쳐 들고 천천히 입을 맞췄다. 그런 시현의 옆 얼굴을 바라보는 은아.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순수함으로 빚어진 청초한 용모가 아름다운 시현이었다. 은아는 시현이 앉은 소파 옆에 앉았다. 천천히 손을 뻗어 시현의 뺨에 대었다. 시현은 눈을 내리깔았다. 길들여진 짐승이 주인의 손길에 전의를 거두는 태도를 연상시킨다. 은아는 주저할 틈도 없이 시현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잇달아 입술을 대길 반복한다.

"시현 씨는 따뜻해요.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여인의 손길은 대담해졌다. 시현의 다물린 입술에 입을 대며 목을 만지고, 상의 단추를 풀어 가슴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시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딘지 슬프게 느껴지는 조용한 태도를 유지할 뿐. 혀를 내밀어 시현의 목덜미를 유린하던 은아는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시현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어쩌면 난 이런 순간을 기다려 왔는지도 몰라..하지만..지금의 난 내 자신에게 화가 나서..견딜 수가 없어.."

시현의 말이 끝나자 은아의 눈에선 이슬 한 방울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미안해요..."은아는 시현의 옆에 앉아 시현의 목을 껴안았다. 힘겹게 감정을 누르며 애워하듯 부탁하는 목소리엔 슬픔이 가득했다.

"이렇게..조금만 이렇게 있어 주세요. 이 이상의 접촉은 하지 않겠어요."

"미안해."

"고맙다고 말해주실 순 없을까요..?"

"..미안해."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아직 두 사람의 감정에 매듭이 풀어지긴 이른 것 같았다. 몇 시간 동안 이 남녀는 함께 있었고, 새벽이 되어 시현이 가게로 갔을 때 은아는 자리에 누워 잠깐 눈을 붙였다. 아직은 이야기할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을 외면하듯 은아와 시현은 각자의 역할이 이끄는 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웹소설. 피투성이 소나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