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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May 28. 2020

웹소설.피투성이 소나타

11화


시현은 어두운 회의실 중 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둠의 세력 중 보스들이 모여있는 회의실은 공기가 싸늘하게 느껴질 만큼 위협적이었다. 폭력조직. 도박. 투기. 암거래 같은 어두운 안건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다. 열 다섯의 시현은 새로 대통령이 바뀌던 해 공식적인 세계와의 파격적인 거래를 제시했다. 몸종으로서 시현의 옆에 서 있던 은아는 다른 조직 보스들의 차가운 눈빛과 빈정거림을 볼 수 있었다. 피와 돈이 오가는 세계의 잔혹함이 짙게 밴 움직임을.

가장 규모가 큰 조직의 대 보스가 시현의 나이가 보스 중 가장 어리다는 것을 이유로 기각한다 말했다. 시현은 흔들림 없이 말했다. 연배가 있다하여 현명한 것이 아니고 미성숙은 무능력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시현을 신뢰하는 몇몇 보스들은 투자를 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질나쁜 폭력 조직의 보스가 대놓고 시현을 모욕하며 회의실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의 자존심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을까. 시현의 예상은 과연 적중했다. 거래가 이루어진지 한달이 되지 않아 투자금을 제외한 순이익 20억원이 어둠의 조직으로 흘러들어 왔고, 두 개의 작은 조직이 시현의 문파에 자진 흡수되었다. 시현의 의견을 무시했던 몇몇 보스들이 수치심과 굴욕감으로 이를 갈았던 모습이 생생했다. 대 보스의 만족스런 웃음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언제나처럼 단정한 차림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시현을 향해 다른 보스들은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으음..."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세어나왔다. 어두운 방. 아무 것도 없고 시간조차 비껴갈 것 같은 작은 방. 잠에서 깨어난 시현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옛날 일이 꿈에 나온 건 오랜만이었다. 머리가 조금 아팠고 가슴이 부서지는 것 같은 마음의 상처가 뒤따른다. 본가에 있었을 땐 악몽을 꾸면 침대 밑에서 무릎 꿇고 반쯤 졸며 대기하던 은아가 바로 일어나 찬 물을 가져왔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시간은 언제나 일어나는 새벽 네시였다. 찬물로 머리를 감고 바로 작업 가운을 입는다. 진검의 날을 가늠하듯 스크래퍼로 도마를 통통 때려본다. 밤새 발효된 반죽에선 풍부한 발효향이 감돌았다. 오븐 스위치를 키는 짧은 마찰음이 물방울처럼 마음의 파장을 일으키는 듯 하다. 오늘의 일을 시작하는 순간, 의식에 눌러 붙으려던 마음의 얼룩은 싹 가셔져 있었다.

부동산에서 일하는 영희 아주머니는 언제나처럼 바쁘게 빵을 사들고 돌아가곤 했다. 어쩌다 테라스에 앉을 때도 있었지만 곧 휴대전화가 울리고, 빵을 먹는 둥 마는 둥 일어나는 것이었다. 때문에 빵도 사지 않고 멍하니 테라스에 앉아있는 지금의 모습은 무척 어색했다. 마침 시현은 향이 깃든 감미료, 플레이버 시럽을 종류별로 구비해 놓은 상태였다. 패션 푸르츠 시럽을 탄 카페 라테를 미지근하게 내려 건내는 시현. 영희 아주머니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커피 잔을 받아 한 모금 들이켰다. 시현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고 무언가 생각에 골몰해 있는 모습이었다. 시현은 조용히 이유를  물어 보았다.

"안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봐요."

"아아..시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안 됐습니다."

영희 아주머니의 시어머니에 대해선 시현도 알고 있었다. 영희 아주머니가 지극정성으로 모셨다는 것을. 궁합을 이유로 결혼을 반대하고 며느리가 되어서도 마음을 열지 않았었다. 영희 아주머니는 시장을 함께 다니고 목욕탕을 가고 떡볶이를 같이 먹으며 마음의 거리를 줄이고자 부단히도 노력했다. 몇번 시현의 가게에서 야채식빵이나 밤식빵을 사들고 가기도 했었다. 그땐 앉을 자리가 없던 때라 두 사람을 보는 건 아주 잠깐이었지만 시현은 알았다. 영희 아주머니의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걸.

"별로..병상에 누우신 후 몇 년 동안 미워해서인지. 슬프거나 하진 않아요..다만.."

커피 잔을 잡고 있는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미워했다 말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병간호를 했던 영희 아주머니였다. 반쯤 남은 커피를 겨우겨우 입으로 흘려 넣은 후에야 끊겼던 말이 모양을 갖추었다.

"평생을 멋쟁이로 살아온 시어머니에요. 구리 반지 하나쯤이라도 정표로 주셨음 했는데..형님한테 패물을 다 주셨어요. 쉽게 할 말은 아니지만 딸노릇 하려고 기를 쓰고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병간호한 건 나인데..마음이 상해서 그래요."

시현은 섣불리 말하지 않았다. 입에 발린 위로로는 마음을 더 상하게 할 테니까. 시현의 생각에도 은연중 그 시어머니가 잘못 판단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행복한 가정은 대개 비슷한 모습이지만 불행한 가정은 백이면 백 다른 모습의 슬픔이 있게 마련. 망연자실하게 하늘을 올려다 보는 연희 아주머니를 침묵으로 배려하며 시현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밤 여덟시. 가게 문을 닫은 시현은 방으로 돌아와 기마 자세를 취했다. 부동의 자세를 유지하는 중국무술의 수련법. 정확히 구십도 다리를 구부린 상태에서 미동조차 없이 시간을 흘려 보낸다. 오랜 훈련으로 만들어진 허벅지 근육은 칼이 들어가지 않을 듯 견고했다. 모든 움직임의 근간이 되는 하체 운동은 힘들고 지루한 법이었다. 이미 시현은 무념으로 시간을 채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삼십분 동안 기마 자세를 유지한 후, 그 상태에서 정권 지르기를 연마한다. 막강한 바람소리와 풍압에 좁은 방이 떨리는 것만 같다. 어둠의 세계를 떠난지 오래였지만 시현은 인생을 걸고 심혈을 기울인 무술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평범한 수련법임에도 일반인 수준으론 상상할 수 없는 강도를 해낸 시현은 가벼이 숨을 몰아쉬었다. 어둠 뿐인 방이었지만 한계까지 제련된 몸은 짐승의 위엄을 넘어선 아름다운 자태. 세상에 신이 존재하여 천리안으로 지상을 낱낱이 볼 수 있다면, 아마도 이 순간 시현의 육체에 의식을 빼았긴다 해도 과장이 아닐 것 같았다.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한 후 자리에 눕는다. 어렸을 때부터 악몽을 꾼 다음 날엔 잠을 잘 못 자는 시현이었다. 눈을 열어놓은 채로 반듯이 누워 있다가 휘파람을 분다. 고요한 공기 사이로 음표가 새겨지듯 시현의 숨결은 유명한 클래식 곡을 잇달아 재현하고 있었다. 시현에게 주어진 가장 천부적인 재능은 음악으로, 어떤 악기든 배우지 않고도 다 다룰 수 있었다. 

'만약 내 인생에서 무술과 빵이 없었다면..아마 난 외곯수 무명 뮤지션이 되어 음악만을 위해 살았을 거야. '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자다 깨기를 반복. 어느새 새벽 네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었다. 숙면을 못해 상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토막 잠으로 체력은 비축된 상태. 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일을 시작했다. 밤새 발효된 반죽을 작업대 위에 올려 분할한다. 각각의 재료를 넣어 식빵 모습으로 성형하여 틀에 넣은 채로 발효실에 넣는 모든 과정이 몸에 익어 있었다.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어둠의 세계에서 있었던 기억이 점차 희미해지고 처음 제빵 업계로 들어왔을 때의 추억이 잔잔한 파동을 이르켰다.

군을 제대한 시현은 아무도 오라는 데 없는 천둥 벌거숭이 신세였다. 숙식을 제공하는 빵 공장에 취직한게 첫번째 사회생활이었다. 약 육개월간 단순작업만을 반복한 시현은 기술을 익힐 필요성을 가졌고 작은 고시원 방을 하나 빌렸다. 그리고 취직한 곳은 백화점 지하 1층에 있는 대형 제과점. 일이 고되고 휴일도 적어 숱한 사람들이 취직과 퇴사를 반복했다. 장점이라면 기술을 빨리빨리 가르쳐 주었다는 점. 구개월 동안 성실히 일한 시현은 대략적인 기술을 습득하여 개인 윈도우 베이커리로 이직했다. 그곳에서 만난 스승님은 시현의 비범함을 바로 알아보았고, 유럽에서 배워온 발효종 제조법을 모두 전수해 주었다. 또 구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 시현은 독립하여 현재 자리에 자신만의 빵집을 열게 되었다. 큰 굴곡없이 성실함으로 채운 세월. 지금의 분주함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을 믿으며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것이 시현의 마음가짐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과발효 상태가 될 때까지, 시현은 한계까지 기다렸다가 빵을 오븐 속에 밀어 넣었다. 모두 식빵이라 작은 단과자 빵에 비해 굽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빵이 구워지는 동안 시현은 매장 불을 켜고 에스프레소 머신을 예열했다. 설거지를 끝내고 오전에 구울 빵 반죽을 계량할 때쯤 오븐에 부착된 타이머가 소리를 낸다. 작업장을 가득 메우는 풍부한 빵 향기. 11년의 경력에도 완성된 빵을 보는 걸 늘 새로웠고, 짙은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언제나처럼 빵을 진열하고 가게 문을 열었을 때, 초췌한 인상의 도련 아저씨가 길 건너편에서 손을 흔드는 걸 보았다.

"아저씨. 몸은 좀 괜찮으세요?"

시현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도련 아저씨는 잘못한 일이 있는 어린 아이처럼 머뭇머뭇 시현에게 다가왔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맘고생을 심하게 한 것 같았다. 시현이 종이 컵에 담아준 진한 아메리카노를 양 손으로 꼭 쥔 채 힘겹게 입을 여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더 이상 재료상은 못할 것 같아. 범죄에 연관된 사람하곤 일할 수 없다나...내가 일을 못하면 고향의 가족들이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는 데..어째서 이렇게 되버린 줄 모르겠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소리내어 울진 않았지만 도련 아저씨의 눈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크게 상심한 나머지 감정을 숨길 생각조차 못하는 모습이었다. 시현은 섣불리 위로하지 않았다. 도련 아저씨가 주먹다짐을 벌였다는 소문이 들린 날부터 매일 아침 찾아온 시류를 기다릴 뿐. 오늘도 따뜻한 주먹밥을 들고 다가오던 시류는 도련 아저씨를 보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염려와 기쁨이 교차하는 얼굴로.

"아저씨! 오랜만이예요..좀 괜찮으세요?"

"어..그래. 시류가 걱정해준 덕분에..별 일 없었단다."

"다행이예요. 일이 커지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식사 아직 안 하셨죠? 주먹밥 좀 드세요."

도련 아저씨는 시류가 건낸 주먹밥을 맛있게 먹었다. 방금 전 시현에게 보였던 절망스런 표정을 어른의 연충으로 덮은 것일까. 언제나처럼 시류와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에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학교 갈 시간이 되어 시류는 오래 있지는 못했지만 진심으로 도련 아저씨와 다시 만난 것을 기뻐하며 몇 번이고 뒤돌아 서서 손을 흔들었다. 시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지자 도련 아저씨의 눈에선 둑이 터진 듯 눈물이 흘러나왔다. 슬픔 앞에 벌거벗겨진 아이처럼 흐느끼는 도련 아저씨의 어깨에 손을 얻는 시현. 동정심이 아닌 진심 어린 염려에서 나온 말을 꺼내었다.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세요. 아저씨. 무슨 일이 하든 가족과 함께 살면서 이겨내셔야 해요. 불안한 미래에 떠밀려 현실의 행복을 외면해선 안되요."

끅끅 소리를 내며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는 도련 아저씨였다. 시현은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했다. 막 구워져 나온 밤식빵을 포장하고, 비상금 백만원이 담긴 돈 봉투를 도련 아저씨에게 건낸다. 시현은 위로의 말을 하지 않았다. 아저씨가 빵과 봉투를 받아들고 어쩔 줄 몰라하자 흡사 과거 한 문파의 당주였던 때처럼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로 지시할 뿐.

"아저씨 자신의 위한 삶을 사세요. 시류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도련 아저씨는 겨우 울음을 진정시키고 등을 돌려 떠났다. 그 후 시현은 도련 아저씨를 만날 수 없었지만 시류에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도련 아저씨가 가족들 곁으로 돌아갔다고. 시류는 다행이라는 듯한 웃음을 지었고, 아쉬움이 담긴 한 방울 눈물을 떨구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일상은 계속되는 것. 며칠 후, 돌아가신 시어머니에 대해 섭섭함을 느꼈던 영희 아주머니가 화려한 보석 귀걸이를 하고 온 걸 볼 수 있었다. 영희 아주머니는 이전에 비해 확연히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써놓은 편지를 남겼어요. 멋내기라곤 귀걸이 밖에 모르는 저를 위해 이 귀걸이를 주신다고..다른 패물은 아주버님 사정이 어려워 가용에 보태라고 주신 거래요. 이렇게라도 뭔가를 남겨 주셔서 정말 기쁘네요."

세상의 가혹함을 알고 있는 어른들이 흔히 잊고 사는 행복함이 영희 아주머니의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잘 어울립니다."시현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탄을 말했다. 붉은 색 석류석 귀걸이. 그 안에 깃든 변치 않음에 대한 믿음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영희 아주머니의 삶에서 시어머니를 생각했던 마음이 추억이 되어 이어지기를.

시현이 지금껏 살면서 겪었던 크고 작은 이별은 아픔과 기쁨의 감정이 복잡하게 교차되어 있었다. 며칠 사이 일어난 이별도 훗날 추억이 될 거라 생각하며, 오늘도 시현은 가게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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