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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Jun 03. 2020

웹소설. 피투성이 소나타

12화

"그럼, 이번 주 일요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무적이지만 친절한 목소리로 통화가 마무리 되었다. 고아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요일 제빵 수업 교사가 되어달라는 부탁으로, 제과제빵 교실이 갖추어진 복지관과 함께 하는 행사였다. 현재 시각 수요일 오후 여섯시. 시현은 천천히 가게를 정리하면서 수업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까 생각했다.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하니 만드는 재미가 있는 쿠키와 부재료가 많이 들어가는 단과자빵으로 하기로 결정한다. 일을 모두 마쳐놓은 후 계산기와 노트, 연필을 들고 야외 테라스에 앉는 시현. 재료와 양을 가늠하며 견적을 뽑는 작업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여덟시가 넘도록 시현은 액수와 레시피. 완성된 양을 생각하며 씨름했다. 서양인과 비교해도 꿇릴 것 없는 큰 체구의 치과의 예성이 큼직한 수박 한통을 덜레덜레 흔들며 찾아왔을 때, 시현은 대략적인 계산을 끝마쳤다.

"바쁜가 봐."

"아아, 이번 주 일요일날 복지관에서 제빵 수업을 하기로 해서. 견적 내는 중이야."

"좋은 일 하네."

"빵 만들어 보내는 거랑 별 다를 것도 없는데 뭘."

예성은 시현의 맞은 편에 앉았다. 딱히 더워보이진 않은 얇은 긴 소매 옷을 입고 있었는데, 손이 살짝 움직이는가 싶더니 예리한 단도 하나가 톡 떨어져 내렸다. 일본도 자루에 들어가는 얇고 작은 암기였다. 수박은 꽤 커서 큰 식칼로도 자르기가 버거워 보인다. 능란하게 단도를 회전시키던 예성의 손이 일순간 수박에 스미었고, 이내 수박은 빨간 물이 흐를 새도 없이 네 토막으로 쩌억 나뉘어 졌다. 시현은 그 모습에 아무런 감탄도 표시하지 않았다. 예성은 기대감이 비치는 웃음을 지으며 단도를 시현의 손 위로 던졌다. 시현이 단도를 낚아채 잔영이 남을 듯 현란한 손짓을 보이는 순간, 네 토막난 수박은 순식간에 한 손으로 들기 딱 좋은 크기로 잘려 나갔다. 조직에서 벗어난 후에도 시현처럼 무술 수련을 계속한 예성, 일반인의 눈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방금 전 단도 놀림을 파악하는게 가능했다. 사람을 상대로 시전하면 죽음조차 뒤늦게 파악할 정도의 살인 기술. 그런 삭막한 생각을 거두듯 수박 한 조각을 우적 베어 물며 박수치는 시늉을 하는 예성이었다.  

"역시 대단해."

"빵 만들면서도 칼질은 매일 하고 있으니까."

시현의 눈빛은 잔잔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음식을 먹는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는 시현. 수박을 베어 무는 단순한 동작에서도 기품이 느껴진다. 그러지 않으려 했지만 예성의 눈에는 이전 당주 시절의 시현이 보이곤 했다. 뒷세계 조직 보스였던 시현은 적대시하는 이들조차 경의를 표할만큼의 거물이었다. 가장 밑바닥 조직원들의 이름 하나하나도 전부 외우고 있고, 능력에 따라 정당한 대가를 보장하는 시현에겐 탁월한 조직관리 능력만으론 얻을 수 없는 신뢰가 두텁게 쌓여 있었다. 예성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았던 그 때의 영광을 시현 스스로 저버린 것에 대해 원망은 하지 않았다. 다만 보스 시절의 시현에 대한 그리움이 깊게 베인 상처처럼 남아 있었을 뿐.

다음 날 오후. 중학생들의 하교 시간이었다. 떡볶이나 핫도그. 어묵. 닭꼬치. 조각 피자 같은 노점 음식들 냄새가 피어오르는 때였다. 주머니 돈을 모아 '빛나는 나무'의 식빵을 하나 사서 찢어먹는 학생들도 있었다. 오늘 처음 들어온 학생 손님은 과일가게 첫째 딸 은지와 이사온지 얼마 안된 소년이었다. 둘은 들어오자마자 천원 짜리 지폐 다섯 장을 내밀고 야채 식빵을 외친다. 시현은 빵과 함께 물티슈 두 장을 건냈다. 두 아이는 손을 대강 닦고 빵을 떼어 먹으며 재잘재잘 떠들었다.

"동생들이 아빠가 사 준 새 자전거를 자꾸만 타려고 해."

"아직 자전거 못 타?"

"응..무서워서."

"공원에서 연습하자. 내가 잡아줄게."

은지가 아직 자전거를 못타는 모양이었다. 최근 은지 아버지가 완두콩 빛 예쁜 자전거를 구입한 건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등교할 때 동생들은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은지만 걸어가곤 했지. 소년은 덩치는 꽤 컷지만 얼굴은 무척이나 순해 보였다. 함께 자전거 연습 하자는 말을 할 때 은지의 눈에 설레임이 깃드는 것이 보인다. 풋풋한 감정의 물결. 꽃같은 아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시현은 흐뭇한 기분이 되었다. 곧 손님들이 몰려들어 카운터 업무를 보느라 바빴지만 분주한 와중에도 두 아이의 순수한 표정이 생각나 일손까지 경쾌해지는 것 같았다.

그날 일곱 시 반. 장사를 마무리하는 중이었는데 손님 한분이 들어왔다. 시장에 곧잘 와서 부업을 주로 하는 노부인. 폐점 시간임에도 빵이 종류별로 남아있어 천천히 가게를 둘러보았다. 가끔 오시는 손님으로 커피 취향은 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현은 자기가 먹을 에스프레소도 뽑을 겸 룽고로 더블을 세팅했다. 노부인이 주문할 때를 맞추어 머신 스위치를 누른다.

"완두콩 식빵하고 옥수수 식빵 줘요."

"잘라 드릴까요?"

"그래요."

커피가 추출되는 짧은 시간 동안 시현은 주문받은 식빵을 커팅기에 넣고 잘랐다. 열려진 문을 타고 가까운 곳에 있는 공원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리던 참이었다. 우연히도 오후에 봤던 은지가 소년과 함께 자전거를 끌고 가는 모습이 눈에 띈다. 시현이 좋은 기분으로 아메리카노를 건내는 차, 자전거를 바라보는 노부인의 눈가가 축축히 젖어있는 걸 보았다. 뭔가 감춰왔던 감정이 심하게 기복을 일으키는 것 같다. 시현은 노부인이 진정할 때까지 빵과 커피를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미안해요, 흉한 모습을.."

노부인은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돈을 건내고 빵을 집어드는 사이, 시현의 투명한 눈동자를 보게 되었다. 나이에 비해 깊이가 감도는 눈빛엔 현자라는 칭호가 어울릴 듯한 지혜가 엿보인다. 세상의 가혹함에 맞서 순수함을 지켜온 그 모습에 감화된 듯, 노부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옛날 일에 대해 말했다.

"서른 여덟에 처음 자전거를 배웠어요. 남편이 크게 다쳐 일을 할 수 없게 되어서..시부모님도 돌봐야 하니 자전거로 슈퍼에 납품하는 일밖에 마땅히 할게 없더군요. 처음 사흘은 짐을 싣기는 커녕 몸도 가누지 못했죠. 계속 넘어지니 손이나 무릎이고 까지고..바지도 열벌은 버렸던 것 같아요. 그렇게 고생한 게 엊그제 같은데...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자전거 타는 모습을 보니 생각이 나네요."

"고생이 많으셨군요."

"옛날 일이예요. 커피 고마워요."

노부인은 힘겹게 웃어 보이곤 가게를 뒤로 했다. 시현은 아프게 남아 마음을 아리게 하는 인생의 상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처를 본인이 받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에게 준 적도 많았으니까.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현재에 충실하는 것 이상의 진리는 없었다. 시현은 노부인이 처음 자전거를 배우는 모습을 상상하는 건 접어두고 눈 앞의 일에 몰두했다. 며칠 후 있을 제빵 수업을 대비한 준비 역시도.

일요일 오전 여덟시. 빵을 보내지 않으니 아주 오랜만에 늦잠을 잔 시현이었다. 수업이 시작되는 시간은 열시였고 복지관은 걸어서 10분 거리 밖에 되지 않았다. 한 시간 일찍 도착한 시현은 옷을 갈아입고 손을 철저히 씻은 후 시설을 체크했다. 오븐과 발효기를 확인하고 깨끗이 정돈된 작업대와 여러 도구도 꼼꼼히 살핀다.

칠판에다 단과자빵 레시피와 버터 쿠키 레시피를 적고 작업 과정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해온 수업 진행을 신중히 되돌아 볼 때쯤 창밖으로 아이들이 도착한 걸 보았다. 가볍게 숨을 몰아쉬고 칠판 앞에 서는 시현. 고아원에서 온 아이들은 10~12살 되는 나이로 삼십명 정도 되었다. 지금껏 빵을 자주 보내왔지만 직접 대면한건 처음. 시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을 향해 싱긋 웃어보인 후 자기 소개를 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제빵사 류시현이예요. 오늘 만든 빵은 단팥빵. 소보루빵. 크림빵. 그리고 버터 쿠키랍니다."

"빵 선생님한테 인사해야지?"

지도 선생님이 말하자 아이들은 "빵 선생님 안녕하세요!"하고 큰 소리로 인사했다. 마음의 상처가 많은 아이들이지만 그동안 자신들이 먹은 빵을 보내온 사람이라고 알고 있어서인지 밝은 얼굴들이었다. 시현은 곧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일단 처음 시작은 재료 계량. 작업대에 놓인 전자 저울 위에 플라스틱 통을 올리고 가루재료를 그램 단위로 담는 과정이었다.

"제과 제빵에서 제일 중요한 건 정확한 계량이예요. 재료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기 때문에 1그램 2그램의 차이가 아주 커요. 서두르지 말고 레시피대로 하도록 하세요."

작업대를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각 재료가 빵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설명한다. 과학적으로 체계가 잡혀있는 현대 제빵 이론을 지루하지 않게 풀어내는 시현. 아이들은 소금과 설탕의 역할. 이스트가 무엇인지를 듣자 호기심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빵은 밀가루의 단백질 막 사이로 이스트균이 호흡하여 부피가 커지는 거예요. 반죽을 늘여보아 손가락을 댔을 때 지문이 드러나는 정도까지 쳐 주면 되요."

믹싱 작업은 위험성이 있어 지도 교사들이 버튼을 조작하고 학생들은 바라보는 식으로 진행했다. 가루 재료와 액체가 뒤섞이고, 하나가 된 반죽에 실온에 둔 버터를 투입, 기계 출력을 한 단계 올려 한참을 믹싱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시현은 설명을 그치지 않았다. 반죽 부딪치는 소리 만으로 상태를 알 수 있는 시현은 자신이 맡은 반죽 상태를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이스트가 활발히 자라나는 온도와 습도를 유지해주는 게 발효기예요. 한 시간 정도 일차 발효에 들어갑니다. 그 시간 동안 버터 쿠키를 해보겠어요. 일단 사용한 통을 설거지 해 주세요. 바로 사용해야 하니까. 마른 행주로 물기를 확실히 닦아 주는 거 잊지 마시고요."

복지관에 구비된 믹싱기는 중형 정도로 선생님이 옆에서 조금씩 도와주면 아이들도 충분히 씻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시현은 농담이나 사담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흥미를 이끌어 내고 있음은 분명했다. 부드럽게 된 버터에 설탕을 넣고, 가루 재료와 함께 크림화하고 짤주머니에 넣어 오븐 팬에 짜내는 과정을 시범해 보이는 시현. 최근 웨딩 케이크를 위해 연습해서 인지 '빛나는 나무'에선 취급하지 않는 버터 쿠키지만 시현의 손길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오랜 시간 기술의 연마해 온 전문가의 아우라가 느껴져서일까. 아이들은 잡담하는 것도 잊고 균등하게 짜지는 쿠키 반죽을 바라보고 있었다.

"팬닝의 기본은 모양. 크기. 간격의 일치예요. 오늘 수업 한번만으로 익히는 건 무리니까 다들 부담없이 하도록 해요.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모양을 짜면 안되요. 차이가 심하면 오븐 안에서 불균형하게 구워지니까요. 손가락이 아플 수도 있으니 짤주머니를 짧게 쥐고 하는 게 조금 쉬울 거예요."

시현은 작업대 한 군데 한 군데를 모두 돌며 반죽을 짜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힘조절이 안 되어 삐뚤빼뚤한 모양이 나올 수 밖에 없었지만 시현은 인내심을 가지고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너무 크기가 맞지 않는 반죽은 다시 짜주머니에 넣어 짤 수 있었기에 아이들은 시현의 설명을 들어가며 차분하게 작업을 진행했다. 아이들이 생각보다 손이 야물어 처음 한 것치곤 괜찮은 모양이 나와 시현은 안도감을 느꼈다. 쿠키 반죽에 소요된 시간은 약 사십분. 시현은 S자 모양의 버터 쿠키 반죽을 오븐에 넣었다. 위험하기 때문에 굽기 작업은 시현 혼자 맡기로 되어 있다. 고온에서 재빨리 굽는 쿠키. 쿠키는 금방 구워졌고, 팬에 놓인 그대로 정리대에 꽂았다. 

"이제 발효된 반죽을 꺼내오도록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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