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의식, 표절, 생명윤리
데미안 허스트의 상어들은 예술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그의 예술 또한 세간의 비평에 있어 완벽하진 못하다.
필자의 의견을 섞어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들에 대한 비판점 3가지를 담아보고자 한다.(필자의 주관에 의거하여 작성하였으며, 다른 해석 또한 당연히 존중합니다 :) 일개 개인의 의견일 뿐,, )
1. 모순된 주제
그가 상어를 이용한 최초의 작품이자 대표작인 "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 이 작품은 제목과 포르말린 탱크 안의 상어를 엮어서 생각해 보았을 경우, 작가인 데미안허스트는 상어는 이미 죽어있지만, 역동적인 자태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끔 연출하였고, 이를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물리적으로 죽음이 불가능한 상어로부터 공포를 느끼게끔 의도하였다고 한다.
물리적으로 죽음이 불가능한 상어. 달리 말하면, 상어가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죽었지만, 죽지 못하는 상태로 놓여있다는 것인데, 이게 과연 맞는 주장일까?
위 작품이 제작된 91년으로부터 무려 13년이 지난 2004년 이 작품은 경매를 통해 미국의 한 자산가에게 소유권이 넘어가게 되는데, 꽤나 웃긴 상황이 벌어진다. 작품 속 메인인 상어를 교체하는 작업이었다.
사실 경매 이전에도 상어 표본에 대한 유지보수는 항상 문제가 되어왔다.
상어를 포함한 어류의 경우는 주로 액침표본의 형태로 표본을 제작하게 되어있다. 이 과정에서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도 유기체 표본은 부식되게 되어있다.
위 작품 속 상어처럼 크기가 약 4m에 이르는 대형어류 액침표본을 만들 땐, 당연하게도 내부 장기가 부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제작 시 주사를 사용하여 장기 내부에도 포르말린을 주입해줘야 하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 속에서 이런 과정은 생략되었고, 단순히 수조에 상어를 "절임"하듯 담가놓은 게 전부였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전시직후부터 내부 장기는 지속적으로 부패하였으며, 상어의 살점 또한 점점 떨어져 나갔었다.
결국 1993년 1차적으로 대규모 보수에 들어갔다. 수조 속 상어를 꺼내 내장을 제거하여, 마치 상어 가죽만을 남긴 상태로 내부에 유리로 된 틀을 넣어 이전에 형태를 유지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결국 경매로 넘어가는 시점인 04년까지 계속하여 살점이 분리가 진행되고 상어 몸이 마치 피클절임 마냥 찌그러져 상어를 교체하였다. (사실 교체한 시점부터 이를 똑같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한 갑론을박이 많이 생겼었다.)
꽤나 웃긴 포인트가 작품에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주제의식인 물리적으로 죽지 못하는 상어라 주장하지만,
실상은 상어는 계속 부패, 즉 죽음 이후 썩어 나가는 과정이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과학적으로 액침표본으로는 영구적인 보존은 "불가능하다". 필자도 실험실 생활 간 많은 액침표본을 제작을 해봤지만, 아무리 정성을 기울여도 결국은 표본의 살점등이 떨어져 나가는 등의 훼손은 막을 수가 없다.
예술계에서도 "이 작품은 이름이 전부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제목이 주는 상징성을 높게 평가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한낱 인간의 술수로 죽음이란 거대한 자연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죽음이 불가능한 상어를 바라보고 있다고 말하지만, 상어는 그 순간에도 서서히 죽어 부패해 나가고 있던 것이란 말이다. 데미안 허스트는 스스로 이 작품이 전달하는 메시자와 개념이 중요한 요점이라고 얘기했지만, 이런 사정들을 알고 나선, 필자가 생각하기엔 이는 치명적인 주제의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2. 작품 표절?
데미안허스트의 상어들은 작품의 표절으로도 한번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물론 그렇게까지 파급력이 있는 사건은 아니었고, 필자도 이에 대해서 주관적으로 표절을 주장한 이가 단순 시기 질투로 접근했다고 보이긴 한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2003년 Eddie Saunders라는 인물은 상어 작품과 관련해 Damien Hirst와 표절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에디는 1989년 자신의 상어 작품을 런던 쇼어디치에 위치한 전자제품 상가에 전시했으나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Hirst의 상어 작품이 큰 성공을 거둔 후, 2003년에 Stuckism 갤러리에서 "A Dead Shark Isn't Art"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작품을 재전시하며 이 논란을 공식적으로 제기하였다.
에디가 사용한 상어는 데미안이 사용한 상어인 뱀상어가 아닌 귀상어의 한 종을 사용하였고, 액침표본의 형태의 작품도 아닌, 아예 박제를 한 형태의 작품이었다. 보존방식, 연출, 상어의 종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에디는 상어를 매게로 한 전시라는 점에서 이와 같은 논란을 제기한 것이었다.
사실 틀린 말이 아니긴 하지만, 그의 행적을 보면 꽤나 치졸하게 느껴진다.
분명 데미안의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이 세간에 등장하여 주목받은 1991년 이전인 1989년부터 상어를 박제의 형태로 전시해 둔 것은 사실이지만, 애당초 에디는 이를 예술작품이라고 칭하지 않았고, 데미안의 성공에 질투심을 느껴 시간이 흐른 2003년 데미안의 상어 작품들을 비판하는 태도로 자신의 상어를 예술품처럼 전시를 하기 시작하였고, 스스로 백만 파운드(당시 환율로 약 19억) 가격을 책정해 장사질을 하려고 했다. (물론 팔리진 않았지만)
스스로는 타당한 주장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필자가 보기엔 꽤나 멍청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일 데미안의 작품이 그의 말마따나 ”작품이라 볼 수 없다 “라고 주장한다면, 선제되었던 자신의 상어에 가격표에 매기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다. 가격을 책정하고 팔아보려는 시도를 한 순간 그의 행위 자체에 의의가 없어진 셈이다.
분명 데미안의 작품과 같은 형태의 수생동물 표본은 최초이지 않을 것이다. 그야 연구 분야에서도 어류를 액침표본은 하는 건 뭐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방법에서도 독창성은 없을 거다. 다만 분명한 것은 표본의 형태의 생물을 이용하여 예술로 그 가치를 전환시킨 것은 그가 최초이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를 보고 예술이 아닌 하나의 사기행각, 나아가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등의 비판의 목소라를 내기도 한다. 필자도 그가 말한 개념예술이라는 차원에서 주제가 모순되는 부분에 있어서는 비판적이지만, 그가 단순 표본을 예술로 접목시킨 시도에 있어서는 혁신적인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데미안은 비판하는 목소리에 이렇게 답하였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 그래 맞다. 근데 아무도 하지 않았고 난 그걸 했을 뿐” 그의 말은 틀린 게 없긴 하다. 아무도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고 그는 이런 상황을 잘 분석하고 예술활동을 한 것뿐일지도 모른다. 필자가 어류학계에서 일할 때도 다수의 어류 액침표본이 사용가치 없이 수십 년간 썩어가기만 하다, 결국은 폐기처리되는 것을 수없이 봐왔다.
3. 생명윤리
비판점에 반드시 들어가야만 하는 그 항목 "생명윤리"이다
데미안 허스트는 91년 첫 상어작품으로 엄청난 상업적, 예술적 성공을 일구어낸 이후, 끝없는 자기 복제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행각은 상어에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경악스럽게도, 얼룩말, 소, 양 등을 죄다 이용하여 종단면으로 절단하는 등의 기이한 박제 예술을 하였다.
일단 본 글에서는 상어에 국한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데미안이 가장 많이 사용한 상어는 최초 작품에 사용되었던 종인 뱀상어였다. 물론 이 종은 멸종위기에 가까운 종은 아니긴 하다. 다만 비판할 수 있는 요지는 바로 본 상어의 수입경로일 것이다. 데미안이 직접 밝히진 않았지만, 그가 첫 작품에서 사용하였던 수입경로에서 유추해 본다면, 그 형태는 의뢰의 형태였다. 풀어 말하면, 어부에게 특정종, 크기 등을 의뢰해서 잡았던 것이다.
아마 추후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그의 요청은 필연적이었을 거다.
그리고 뱀상어로 만들어진 작품등을 보면 몸이 비교적 온전한 형태인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단순 혼획으로 잡힌 개체가 아닌 철저히 의뢰를 통해 잡힌 개체라는 것을 방증하는 꼴이다. 한마디로 상어사냥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국제법상 뱀상어는 IUCN 준위협종에 속하기에 사냥 금지 어종은 아니다.
다만, 해양생물 생태 연구등과 같은 과학활동도 아닌 한낱 한 예술가의 작품으로 쓰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냥을 당해야 했던 뱀상어입장에서는 매우 치욕스러운 거었다.
뱀상어 이외에도 돌묵상어와 백상아리로도 작품을 만들었으며 돌묵상어의 경우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어류이며, 현재 멸종위기동물로 지정되어 있다. 다만, 이 경우에는 사냥을 통한 샘플 확보가 아닌 영국 콘월해변에 좌초된 개체를 사용하였고, 작품 제작 간 런던자연사박물관과 협조하였기에 큰 비판점이 없긴 하다.
문제가 되는 점은 백상아리의 경우이다.
백상아리는 IUCN 취약종에 속하여 사냥 금지 어종이다. 그럼에도 그는 2005년 호주 퀸즐랜드에서 수입한
백상아리를 사용하여 전시를 감행하였고, 이는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사냥 의뢰가 분명하였고,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다. 데미안 스스로 욕심에 눈이 멀어 선을 넘어버린 행동을 한 것이었다. 동물 보호 및 윤리에 있어 많은 이가 비판을 가했지만, 그는 이에 대한 어떠한 피드백도 수용하지 않고 흐지부지 넘어가게 되었다.
필자가 보기엔 데미안 허스트의 시도 자체는 높게 평가할 수 있다. 표본을 이용하여 복합적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독창적이며 특별하다 다만, 그가 자신의 명성과 작품활동을 위해 상어사냥을 의뢰하고, 더 나아가 멸종위기 종도 잡아들이는 등의 행동은 추악하기 그지없다.
또한, 그가 상어를 매개로 한 모든 작품을 꿰뚫는 죽음의 불가능성이라는 주제 자체도 천천히 썩어나가고 있는 상어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판단한 그저 있어 보이는 글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런 과학적 생물학적 교훈도 담지 아니하였던 부분에서 상어들의 희생은 그야말로 "개죽음"이 아닐까라는 의문점도 생기고..
필자는 예술을 전공하지 않았고, 그리 조예가 깊지도 않다. 그러니 데미안의 예술을 좋아하는이라면 그저 컬러 들었으면 한다. 이 글은 온전히 필자 개인의 감상일 뿐이며, 타인의 의견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