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후회에는 맥락이 있다
언어에는 맥락이 있다. 어느 한 구절에 꽂혀 파고드는 것은 수많은 오류를 초래한다. 종교에서도 원전의 시대적 상황과 맥락이 실종된 채로 어느 한 구절에 몰입하면 여러 가지 실수와 오류를 범하기 쉽다.
집에서 만드는 영어 환경의 중요성을 지난 세월 수없이 강의해 오며 했던 말들 중 수정해야 할 것이 있다. 수년 전부터는 거의 쓰지 않는 말.
“내 새끼는 내가 제일 잘 안다.”
강의 대상인 엄마의 존재감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아이에게 최적의 교육 환경 만들기를 동기 부여할 때 종종 사용했던 언어이다. 한 아이의 엄마로서 뿌듯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말이고 엄마의 책임감을 새로이 다지게 해준다. 내 아이의 행동과 일상 패턴을 가장 잘 아는 엄마(주양육자)의 적절한 환경 조성이 중요하기에 강의중 가끔씩 사용하던 말이다.
그런데 사춘기를 지나 성장하고 성인이 되어 마주한 내 새끼는 달랐다.
아이 마음은 이럴 거라 확신했던 나의 생각에
오류가 있었다는 자각에 이르렀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이 왔다.
"그때는 내가 말을 할 수 없었어.
속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몰랐고,
그냥 우물쭈물 지나가고 싶었지.."
누군가와 안 좋은 경험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은
내가 추측하던 아픔의 정도를 훨씬 넘는 것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알고는 어찌나 미안했던지.
내 새끼 내가 제일 잘 안다고 호언장담하지 말고
아이의 내면에 좀 더 들어가 볼걸.
멈추어 아이 마음을 조금 더 많이 만져줄걸.
당면한 문제를 우회하지 말고, 회피하지 말고
조금 더 나서서 행동할걸.
많은 뇌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부모가 자신을 바라볼 때와 자녀를 바라볼 때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가 같단다.
즉 나를 바라보는 자화상이 육아를 하며
아이에게 줄곧 투사가 된다는 말이다.
내가 나에게 만족스러운 상태라면
아이를 좀 더 편안하게 키울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이에게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부모는 더욱 불안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견딜 수 있었으니
내 아이도 감내할 수 있을거라는 믿음은 착각이었다.
이것을 시간이 한참 흘러 알게 된 것이 부모로서 아프다.
어쩌면 부모는 사실 아이를 제일 잘 아는 것이 아니라
가장 오해하고 있는 존재이지 않을까.
때로는 아이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인물의 일상 행동을 따라 돌아가는 카메라처럼.
아무튼 그래서 어느 순간
‘엄마표’라는 말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출판이나 강의에서는 여전히 통용되는 말이기에 아직 사용할 때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나 맥락보다는 한마디 표면적인 메시지에 꽂힐 수 있다.
그래서 진의를 오해하고 밀어붙이곤 한다는 것을 알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그래서 나의 과거 속 언어를 하나 수정한다.
내 새끼 내가 제일 잘 안다는 것은 착각이다.
아이였던 나도 그랬듯
당시 아이는 어리고 미숙해서
자기 마음을 잘 인지하지 못했고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었다.
아이의 삶과 언어가 성장해야 비로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결핍은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무엇을 할 때 만족감을 느끼는지,
내가 왜 어떤 행동을 반복하는지 알 수 있다.
어느덧 나이가 드니
성장한 내 아이들을 볼 때 타인을 대하듯 보게 되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다.
내가 제일 잘 안다는 말이 어리석게 여겨진다.
아이들의 미래를 부모인 내가 완성할 수 없다.
그러니 미리부터 불안해 말자.
내가 어떻게 해도 아이는 아이만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엄마가 내 새끼 내가 제일 잘 안다는 착각 속에서 점차 나이 들어가는 동안
아이는 그 역시 자신도 모르던 자아를 발견하며 성장할 것이다.
지금 불안해 보이는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런 언어 아닐까.
"너의 힘든 마음을 엄마가 감히 헤아릴 수 없어 미안하구나.
네가 기댈 수 있도록 그저 엄마가 옆에 있어줄게.
자, 엄마 어깨에 기대어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