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차분하게 굳은 목소리 탓인지, 아님 그동안 목이 터져라 섭섭하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된 탓인지 엄마가 먼저 선수를 친다.
"너는 나처럼 집에 있고 너거 오빠는 비 오는데 일을 나가니까? 하하하"
"그래도 너도 괜찮은지 물어볼 수 있지 않아?"
그래. 이게 무어 그리 섭섭한 일일까마는 엄마에 대한 섭섭함에 절여져 버린 나에겐 섭섭하다 못해 또 섭섭하다.
엄마가 어려서부터 내게 씌운 프레임은 '하나밖에 없는 딸이...'였다.
형제가 둘 뿐인 아버지는 작은 집과 담벼락 하나를 경계로 살고 있었다, 아들 셋을 낳은 후 내가 태어났고, 작은 집도 아들만 셋을 낳다 보니 나는 동네에서도 그렇게 불려졌다. '저 집 딸은 화초로 키우나 봐'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난 '두 집에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로서, '화초'의 의무를 다 해야만 했다. 혹 지인이 엄마를 만나게 된다면
"야는 두 집에 하나밖에 없는 공주였어요. 밥 할 줄도 몰랐어. 밖에 비가 와서 콩이 다 젖어도 야는 책만 읽었다니까요. 오빠들이 가시나 소리 한번 안 했지."
등등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은 화초로 자랐는지를, 아주 긴 시간 우아하고 유창한 말솜씨로 자랑을 하신다.
오랜 시간 난 그런 줄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난 그냥 아름답게 피어있어야만 하는 화초의 역할만 필요했음을 깨달았다.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유산은 엄마에게 상속 처리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는 아직까지도 모름)
엄마는 노후에 오빠들에게 나누어 줄 상속 지분을 어느 명절날 남편과 우리 아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통보를 했다.
"아니 엄마 어떻게 이런 결정을 나만 모르게 할 수가 있어?"
"출가외인인 네가 왜 우리 집 재산에 대해서 말을 해?"
그리고 좌절하는 내 침묵 속에 오빠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름 끼치게 겪어왔던 싸늘한 목소리의 엄마와 나눈 짧은 대화는 나의 남편과 어린 나이의 우리 아이들에겐 충격적이었던 거 같다. 엄마는'출. 가. 외. 인'이란 용어를 이렇게 사용하셨다. 오빠 표현처럼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맞아 죽듯이 나는 섭섭함의 치명적인 상처가 한 가지 더 추가했다.
"장모님은 딸인 자네를 자식으로 인정하질 않는구먼"
이후로 남편은 엄마와의 거리를 지금까지 둔다. 그리고 나의 프레임이 하나 더 늘었다. '출가외인' 나의 상처와 상관없이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가끔씩 사용한다. 나는 경악하고 있지만.